별로 기억나는 대사가 많지 않아 몇 가지 대사를 중심으로 영화에 대한 느낌을 이야기 하고자 한다. 이 영화는 ‘삶의 상처와 치유’를 복싱을 통해 이야기한다. 가진 것 없고 이룬 것도 없는 인생들이 모여 사는 권투도장이 영화의 무대이다. 재미있는 것은 주연은 물론 조연들까지 가족과 관계다운 관계를 맺고 사는 이가 없다. 모두들 홀로 살아가는데 묘하게도 그들이 모여 또 하나의 가족이 된다.

‘자기를 보호해야 돼!’

자기를 보호해야 한다는 말은 작품 전체적으로 관장이자 매니저인 프랭키(매니저)의 입을 통해 여러 번 강조되는 말이다. 프랭키는 능숙한 지혈사이지만 자신이 데리고 있는 선수들의 상처를 감당할 자신이 없는 사람이다. 충분한 도전의 시간이 되었음에도 그는 선수들의 손쉬운 시합만을 주선한다. 물론 이는 관리인으로 일하는 스크랩의 실명에 대한 자책감이며 필요한 시기에 친딸을 보호해주지 못해 빚어진 단절의 상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함이기도 하다. 그는 무뚝뚝한 겉모습과는 달리 자신을 사업가로 여기지 않으며 한 집안의 가장처럼 느끼며 선수들에 대한 과도한 책임감을 안고 사는 예민한 인간이다.

하지만 과도한 보호와 버림받음을 두려워하는 그의 태도는 결국 어느 시점부터 선수들의 성장을 가로막고 떠나게 만든다. 선수들이 그의 곁을 떠나가지만 그는 자신의 문제는 돌아보지 못한다. 애써 태연한 척 하지만 속으로는 자신의 진심을 몰라준다며 그들을 책망한다. 그는 선수들의 성장과 미래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상처와 과거에 집착하여 사는 인간이다. 선수들이 떠난 것은 그런 면에서 보면 배신행위가 아닌 독립을 위한 행동이다.

선수들에게 가드를 올려 자신을 보호하라고 강조하는 프랭키의 말은 자신의 테두리 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스스로의 상처를 핧고만 있는 고독한 프랭키 자신에게 하는 말에 다름 아니다. 그에게 자신을 보호한다는 것은 자신을 개방하지 않고 감추고 사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하지만 프랭키의 ‘수동적인 자기방어’는 챔프에 도전하는 메기에게 전해지면서 ‘자기가치의 적극적 보호’라는 의미로 질적 전환을 이룬다.

영화 내내 메기는 자신이 가장 원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 자체가 자신을 가장 잘 지키는 것임을 온몸으로 보여준다. 그녀는 깨지고 상처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인생의 챔피언이라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그러한 아픔은 얼마든지 감수할 열정이 있고 그 아픔마저 성장의 발판으로 삼을 지혜도 갖추고 있다. 또한 가족들로부터 얻을 수 없었던 가족애와 친밀감을 위해서는 얼마든지 관계의 상처를 견뎌낼 인내의 능력도 있다.

정작 그녀가 견딜 수 없었던 것은 예고하지 못한 불행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할 수 없는 삶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다리를 절단하고도 욕창으로 썩어가는 몸을 보며 그녀는 스스로 삶을 마감하기로 결심한다. 그것은 예상 못한 불행에 대해 그녀가 주체적으로 취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이었다. 그녀의 죽음은 삶의 최후까지 자기 결정권을 놓치지 않으려는 한 숭고한 정신의 상징적 표현일 뿐 안락사 논쟁으로 이어질 소재가 될 수 없다.



‘너무 가까이 다가서면 주먹을 날릴 수가 없다. 주먹을 날리려면 물러서야 한다. 하지만 너무 멀어져도 주먹을 날릴 수가 없다.’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라는 이 말은 프랭키의 대사가 아닌 스크랩의 대사로 영화 초기에 등장한다. 스크랩은 이 영화에서 힘과 따뜻한 애정을 간직하는 바람직한 어머니의 역할을 묵묵히 수행한다. 그는 프랭키와 달리 약간은 덜 떨어진 데인저라는 젊은이에게도 진심어린 애정을 보이고 메기의 가능성을 일찍 발견하고 지속적인 성장을 도우며 도장의 험한 살림을 도맡아 하는 자애로운 어머니와 같은 존재이다. 그러면서 데인저와 메기를 보호해주어야 하는 순간에는 주저함 없이 인파이터로 변신하여 싸우는 관록 있는 베테랑 선수이다. 스크랩은 영화 내내 묵묵히 프랭키와 메기의 관계를 애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고 감싸 안으면서도 두 사람의 삶을 지배하려거나 조종하려들지는 않는다. 그의 스텝이야말로 적절한 거리를 어떻게 확보하는지를 보여주는 진정한 본보기이다.

프랭키는 권투를 가르치는 것에 있어서는 리듬감 있는 스텝을 잘 밟아 나가지만 인간관계에서의 스텝은 엉망이다. 종교를 통해 위안을 얻고자 하지만 젊은 신부와의 관계는 자꾸 꼬여만 간다. 그는 메기를 만나 딸로 인한 오랜 상처를 치유받기 원하지만 안타깝게 친딸에게 했을 법한 오류를 반복한다. 매니저를 맡는 조건으로 ‘질문하지 말 것’과 ‘자신의 말에 절대복종할 것’을 요구한다. 계속 4회전짜리 시합에만 내 보내다가 다른 매니저에게 보내버릴 음모(?)를 꾸미기도 한다.

프랭키는 멀어질 때 멀어지지 못하고 가까워져야 할 때 다가서지 못한다. 그래서 그의 감정은 임팩트가 실리지 않고 매번 헛손질하거나 아니면 뒤엉켜 버린다. 하지만 그런 프랭키를 치유시킬 수 있었던 것은 메기의 힘이다. 그녀를 향한 프랭키의 애정을 스펀지처럼 한없이 빨아들이면서도 그의 요구에 무작정 끌려가지 않고 계속 질문하며 그의 가르침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낸다. 그리고 다른 선수들처럼 그의 곁을 떠나지 않고 오히려 서서히 고집스러운 늙은이를 변화시킨다. 그가 지어준 ‘모쿠슈라’라는 뜻도 모르는 이름을 기쁘게 받아 안으면서도 메기로서의 정체성을 결코 잃은 적이 없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우리는 너무 멀어지면 체온을 느낄 수 없고 너무 가까워지면 상처를 주는 고슴도치처럼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기 위해 쉴 새 없이 푸드웍을 밟아야 한다. 하지만 우리들은 너무 쉽게 링을 도망쳐 나오거나 반대로 상대를 클린치하고 헉헉거리며 밀고 당긴다. 인생을 살면 때로 백스텝도 밟고 사이드스텝도 밟아야 정타를 날릴 수 있다. 그렇지만 등을 보여서는 안 된다. 스텝을 밟으면서도 자신이 바라보아야 할 시선은 더더욱 목표물을 향해야 한다. 그것이 삶이라는 링에서 취해야 할 중요한 태도라고 영화는 말해준다.

‘갈 때는 비행기로 가고 올 때는 자동차로 오고 싶다고 했더니 정말 그렇게 되어 버렸네요.’

영화를 보며 소리 내어 웃었던 유일한 대목이다. 메기가 재활치료를 위해 다른 병원으로 이동하면서 앰뷸런스 안에서 프랭키에게 했던 대사이다. 챔피언전이 열리기 전 라스베가스까지 어떻게 움직일지를 묻는 프랭키에게 메기는 갈 때는 비행기로 올 때는 자동차로 오고 싶다는 다소 어려운 주문을 한다. 그녀의 까다로운 주문은 인생의 정점에 다가설 무렵 예상치 못한 불행의 모습으로 현실이 되고 만다. 그 절망의 상황에서도 이를 감히 유머로 소화시켜 낼 수 있었던 그녀의 태도가 무척 인상적이었다. 그녀는 노처녀로 뒤늦게 권투선수가 되어 살아가는 온갖 어려움과 멸시 속에서도 희망과 애정을 잃지 않고 근본에 충실했다.

소감을 쓰다 보니 그녀의 당당한 미소가 다시 한번 보고 싶어진다. 손님이 남긴 스테이크를 주인 몰래 싸다가 들키고도 환히 웃던 메기와 맛있는 저녁식사를 함께 하고 싶어진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주어진 삶이 아닌 선택하는 삶을 살아간 메기야말로 진정한 챔피언이자 누구나 인정하는 밀리언달러 베이비이다.


* 내가 감독이라면 영화를 어떻게 만들었을까?

여러 이야기를 썼지만 솔직히 이야기하면 너무 담백한 영화다. 너무 담백해서 자극적인 입맛에 길들여진 나에게는 싱겁기까지 하다. 기대가 커서였을까? 무언가 예상하지 못했던 각도에서 Uppercut이나 묵직한 롱훅이 한방 터져 주기를 기대했는데 잽과 스트레이트만 오고 간 다소 맥 빠지는 권투시합을 관전한 느낌이 들었다. 21그램이나 레이와 같이 최근에 좋은 느낌을 받은 영화에 비해 못 미치는 느낌이 들었다.

일단 생략과 함축의 의미를 모르는 바도 아니지만 프랭키와 딸과의 단절에 대한 설명이 전혀 되지 않았다는 것이 영화에 몰입하는데 다소 어려움을 느끼게 한다. 또한 자신의 선수(딸)로 메기를 받아들이고 새로운 관계를 통해 과거의 상처를 치유해나가는 과정이 너무 단조롭다. 과거의 갈등이 반복되고 위기에 부딪히며 이를 성찰하는 반복적인 과정을 통해 치유가 이루어질 것인데 그러한 과정의 묘사가 너무 순탄하다. 그래서 영화 중간 중간에 극적 긴장감이 너무 떨어지고 만다. 완급조절도 없고 고저도 없이 그냥 무미건조하다.

영화에서는 현대사회에서의 가족의 위기를 말하고 있다. 프랭키는 아버지로 그려지고 스크랩은 어머니로 그려지는데 너무 그 역할이 전통적이고 대조적이다. 굳이 두 역할을 나누어 연기하게 할 필요가 있었을까 싶다. 처음에는 프랭키의 배역에 충실하다가 관계를 통해 상처가 치유되면서 점차 스크랩의 배역으로 변모하는 과정을 한 인물로 그려냈으면 어땠을까 싶었다. 영화에서 이야기하는 이 시대 아버지의 부재에 대한 해결은 과거 아버지로의 복귀가 아닌 새로운 시대의 아버지상을 필요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능력 많은 사람들에 대한 질투가 많아서일까? 76세의 노구를 이끌고 복싱선수 매니저로 활약하는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노욕에 가득 찬 노인네로 느껴졌다. 저러다 어디 부러지지 않았을까 싶은 걱정도 들면서 ‘다른 배우들에게도 기회를 좀 주지.’ 하는 생각이 영화 보는 내내 떠나질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