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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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숨쉰다는 것
문 요한 (변화경영 연구소 연구원, 정신과 전문의)
어릴 때 풍경을 떠올리면 장독대가 생각나곤 한다. 이사를 가면 햇살이 잘 들고 바람이 잘 통하는 자리는 으레 장독대가 놓여 있었다. 햇살 좋은 날이면 어머니는 잘 익은 장맛을 내기 위해 뚜껑을 열어 놓으셨다. 그래서 갑작스럽게 비라도 내리는 날이면 후다닥 달려가 뚜껑을 닫곤 했었다. 그 장독대를 채우고 있는 그릇은 모두 크고 작은 옹기였다. 어머니는 옹기를 장독대에 놓을 때는 공기가 잘 통하라는 의미로 벽돌을 받혀 올려놓고 집안의 온갖 살림 밑천들을 넣어두셨다. 각종 양념은 물론이고 없어서는 안 될 김치와 쌀도 담겨 있었다. 그리고 틈만 나면 불뚝한 옹기를 쓰다듬으며 윤기나게 닦아 주시곤 했었다.
우리 맛의 특징은 단연 오래 익혀서 발효하는 맛에 있다. 발효는 그 과정의 흡사함에도 불구하고 부패와는 질적으로 다른 과정이다. 외부 생명체의 분해활동을 목적의식적으로 받아들이면서도 핵심을 잃지 않을 때 부패가 아닌 발효가 된다. 그 발효음식들을 더욱 숙성시키고 보관해온 그릇들이 바로 옹기이다. 자기(瓷器)는 체에 걸러 입자가 고운 흙만 사용하기 때문에 유리처럼 단단하다고 한다. 반면 옹기는 흙의 입자가 고르지 않아 구울 때 여드름자국 같은 기포덩어리가 생긴다. 이렇게 우둘투둘 돋아난 수많은 기포들이 바로 통풍이 잘 되게 하는 숨구멍 역할을 한다. 습기는 차단하고 공기는 통하게 해주는 옹기의 이런 특성이야말로 발효식품의 숙성을 돕고 곡식을 넣어도 썩지 않는 방부성을 자랑하게 해준다는 것이다. 그래서 옹기란 다름 아닌 ‘숨쉬는 항아리’라 부른다.
제 맛을 위해 푹 익힌다는 것은 이렇듯 ‘섞음’과 ‘열림’과 그리고, ‘기다림(숙성)’이 필요하다. 우리의 삶이 변화하고 성장하는 것도 발효의 과정과 다를 바가 없다고 본다. 외부의 생명운동을 받아들여 서로 섞이고 주고받으면서도 자신을 잃지 않고 지켜낼 때 새로운 맛이 나타난다. 그리고 단순한 기다림이 아닌 많은 틈 사이로 외부와 쉼 없이 주고받는 공간속에 내가 위치해 있을 때 그 맛은 완성되어 간다. 그것이 변화이자 성장이다.
삶이라는 삼각지에는 여러 가지 외부의 유입물들이 흘러 들어온다. 우리는 그 유입물들 가운데 부패균과 발효균이 무엇인지를 잘 구분해야 한다. 나를 익힌다는 것은 발효균만을 선택해서 받아들이는 것이며 부패균을 물리칠 산도(酸度)를 유지하는 행위이다. 그리고 그 발효균이 질식하지 않고 나와 하나가 되어 뒤섞일 수 있도록 살아 숨쉴 구멍을 트여 주는 것이다. 햇볕 좋은 날에는 햇살을 가득 선사해주고 예상하지 못한 소나기가 퍼부을 때는 뚜껑을 잠시 닫아두는 것이다.
내 생각과 마음은 안과 밖으로 통하고 있는가? 제 때 뚜껑을 여닫고 있는가? 혹시 뚜껑을 닫지 못해 내리는 소나기를 하염없이 맞아 장맛이 물맛이 되가는 것은 아닌지, 옹기그릇이 아닌 좁고 답답한 자기에 담아둔 것은 아닌지, 혹은 성장의 햇살마저도 거부하고 뚜껑을 닫고 사는 것은 아닌지 살펴보자.
깊은 맛을 내려면 푹 익혀야 하고 푹 익히려면 열려 있어야 한다.
열려 있을 때만이 우리는 살아 숨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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