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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병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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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4월 17일 23시 03분 등록
지난 한 주는 고난주간이었다. 글을 쓰는 것이 이렇게 괴로울 줄이야 예전엔 미처 몰랐다. 어떤 주제로 글을 써야겠다는 결정부터 쉽지 않고 버겁게 느껴지는 것이다. 변화경영연구원 과제 중의 하나인 일주일에 한편씩 글을 써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마치 사채를 쓰다 빚 독촉에 몰린 채무자의 괴로운 심정을 짐작하게 한다.

글을 쓰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아이디어다. 아이디어가 없이 문장력만으로 때우고자 하면 당장 '붓끝으로 속임수를 쓰는 것'과 다름 아니다. 암탉의 배를 가르고, 생기다만 알을 꺼내는 어리석은 일을 하고 싶지는 않은데 도무지 글의 소재를 찾기가 어렵고 눈앞에 보이는 사물이 그저 무의미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이틀을 전전긍긍하다가 수요일에는 옛 선인들의 노하우를 벤치마킹 하기로 결심했다. 글을 잘 쓰려면 송나라 문인인 구양수의 삼다(三多), 즉 '다독(多讀), 다작(多作), 다상량(多商量)'을 흔히 이야기한다. 구양수도 사람인지라 생각이 떠오르지 않으면 즐겨 찾는 장소가 있었다고 한다. '마상(馬上), 침상(枕上), 측상(厠上)'의 '삼상(三上)'이 바로 그곳이다.

'마상(馬上)'은 오늘날로 치면 전철이나 버스 또는 승용차 안이 될 것이다. 승용차는 평일에는 거의 운행을 안하고 또 운전하는데 집중해야 하기 때문에 전철에서 승객들의 이야기, 옷차림, 광고포스터를 유심히 보기로 했다. 눈과 귀를 열어 승객들의 동향을 세밀하게 관찰하다 보니 상대방의 눈초리가 예사롭지 않다. 나 또한 피곤한 출퇴근길을 남의 이야기로 허비하는 것 같아 이게 무엇 하는 짓인가 싶고, 차라리 잠을 자거나 책을 보는 편이 백 번은 낫다는 결론을 내리고 질끈 눈을 감아버렸다.

침상(枕上)은 잠자리다. 잠자리에서는 긴장이 풀려 좋은 아이디어가 나온다. 아뿔싸, 긴장이 풀려도 너무 풀리는 거다. 숫자 열을 세기가 무섭게 꿈나라로 직행하는 날이 다반사다. 어쩌다 금요일 하루는 누워서 한참을 생각하다 좋은 생각이 나서 메모지에 얼른 적어두었다. 다음날 아침에 적어둔 내용을 보니 일장춘몽이요, 쓸데없는 착각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재빨리 구겨 쓰레기통에 처박았다.

측상(厠上)은 화장실이다. 변기에 앉아 있으면 이상할 정도로 생각이 잘 떠오른다. '삶은 무엇인가? 행복을 느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는 관념적 고민을 위한 고민을 하던 시절이 생각난다. 삼일동안 생리적 욕구를 억제한 후에 변기에 앉아 아랫배에 한껏 힘을 주면서 '아~ 이게 바로 행복이다.'를 득도한 순간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처구니 없는 일이지만, 아무튼 고민을 해결해주는 해우소(解憂所)의 역할을 충분히 해 준 장소인 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아침에 일어나면 제일 먼저 화장실을 가는 습관이 있다. 비몽사몽으로 측간을 가다 보니 형이하학적인 문제는 해결되지만 형이상학은 천만의 말씀이요, 만만의 콩떡이다.

구양수의 약발이 안 듣는지라 아르키메데스의 목욕요법을 쓰기로 했다. 아르키메데스는 목욕 중에 부력(浮力)의 원리를 생각한 뒤 "유레카!"(발견했도다)를 외치며 발가벗고 뛰쳐나온 일화로 유명하다. 요즘 건강에 대한 관심과 웰빙 열풍으로 인해 반신욕이 널리 확산되고 있다. 이러한 시류에 영합하고 칼럼 쓰기 과제를 해결하고자 찜질방으로 향했다. 게르마늄 열탕 안에서 흐느적흐느적 거리고 있는데 누가 탕 안에 첨벙 들어오는 것이다. 순간 나도 모르게 '유레카'를 속으로 외쳤다. 거의 20년만에 보는 고등학교 동창이 세월의 무게만큼 나온 아랫배를 툭툭 치며 다가오는 것이다. 너무나도 반가워 한참을 탕 안에서 이야기를 하다가 찜질방을 나왔다. 탕 안을 뛰어 들며 다짐했던 각오가 예기치 않은 상황으로 인해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

결국 원점으로 돌아왔다. 하릴없이 거실을 왔다 갔다 하며 곰곰이 다시 생각해 보았다. 내가 지금 정말로 글을 쓰고 싶어서 쓰는 것인가? 쓰고 싶을 때에 쓰고 싶은 말을 써야 글쓰기가 즐거운 작업이 되지 않겠는가? 안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괴지 않은 생각을 억지로 짜내려 하는 건 아닌가? 그만큼 나의 자화상은 성숙되지 못한 거울이 아닌가? 내가 진정 가슴으로 글을 쓰고 싶었던 적이 언제였던가? 쓰고 싶은 내용은 많은데 실타래처럼 얽혀 도무지 정리가 안 되는 건 아닐까? 너무 추상화된 주제로 인해 구체적인 소재, 사물과 연결이 잘 안 되는 건 아닐까?

그래, 막 써보는 거다. 이것 저것 가리지 않고 논리적인 순서없이 생각나는 대로, 손가락이 가는 대로 적어보는 것이다. 다시 한번 훑어보면 마치 모래속의 진주처럼 발견되는 것이 있으리라.

직장동료와, 친구들과 술 한잔 하고 집으로 들어가는 전철 안에서, 택시 안에서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용솟음치는 언어와 감상(感想)의 향연(饗宴)을 느껴본 적이 적지 않다. 물론 뇌세포를 마비시키는 것이 아닌 자극할 수 있을 정도의 적당한 양의 술 한잔이 전제되어야 한다.

지금은 모두가 잠든 고요한 밤이다. 최후의 수단으로 야심한 밤을 틈타 양주 한잔 들이키며 컴퓨터 앞에 마주 앉아 손(手)수다를 떨어보는 것이다.

'개인화 기기에 대한 단상', '포털의 옐로우 저널리즘', '너희가 유비쿼터스를 믿느냐?', '멀티 타스킹', 'CMMI 시비걸기', '그들만의 프로젝트', '웹서비스적인 생각', '킬러 애플리케이션'......

글쓰기 주제가 밤하늘의 별빛처럼 무수히 쏟아져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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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진
2005.04.19 20:42:50 *.247.50.145
일주일에 한편씩 글을 써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마치 사채를 쓰다 빚 독촉에 몰린 채무자의 괴로운 심정을 짐작하게 한다는 대목이 제 마음을 바늘로 콕 찌르는 것 같습니다. 제 생각인데요. 우리 힘들면 여름 즈음에 해병대 합숙 한번 갔다 올까요? 아니면 야간산행(예를 들면 북수도북?)이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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