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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성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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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4월 25일 05시 05분 등록
어떤 선사께서 그러셨다.
'깨우쳐 돌아와 보니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더라.'

아마도 선사께서는 '변화하고 있는 변화하지 않음'을 깨달은
자신을 대변한 것이었지 않을까 싶다.

나도 칼 한 자루 들고 30년이란 세월을 세상을 떠돌아 다녔다.
돌아왔을 때 내게 남은 것은 "있는 그대로"를 볼 수 있는 내가 있을 뿐이었다.

변화하고 있는 변화하지 않는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혹시 도움이 될까 싶어 쓴다.

지식사회에서 행위의 주체인 신체적인 활동이나 노동에 관심이 적지만
나의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신체적인 활동 즉 실천이 결여되어 있는 생각들은
유용하지가 못하다.

잘 만들어진 컴퓨터 프로그램은 수없이 많은 오류수정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기획과 구상이 아무리 정교하다 하더라도 그것은 생각하는 사람의 기억과 수용할 수 있는 정보의 통합에 의한 상상력의 총합일 뿐이다.
그것은 실제 프로그램의 전체는 아니라는 것이다. 즉 프로그램의 사용에 있어서 모든 변수를 다 고려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수없는 실험이라는 시행을 통해 보완 될 수 밖에 없다.

생각의 주체는 자아라는 것이지만 그 자아는 인간이 가진 생물학적인 유전정보에 후천적인 환경 속의 학습과 경험에 의해 만들어진 추상적인 존재다.
더욱 중요한 것은 자아는 신체와 분리되어 있는 신경회로망의 집합적인 구조다. 이러한 자아는 자신의 생각과 판단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신체를 빌려야만 한다.

그러나 그 신체는 또 다른 주관자가 있다. 흔히 우리가 말하는 무의식이라는 동양적으로 말하면 무아나 진아라는 것이다.
우리는 자아가 없을 때도 있었다. 우리가 막 태어나서 젖을 빨고 울고 움직이는 것을 주관하는 주체가 자아가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때는 신체와 마음이 분리되어 있지 않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것이 분리되어진다.
갓난 아이는 커가면서 많은 것을 배운다. 현상속에서 사람과 사물에 대한 느낌을 언어적 개념으로 대치하고 용어인 상징을 배우게 되고 그리고 그것들을 생각이라는 것 속에서 이리저리 조합하여 상상이라는 것을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나는 원래 김성렬(상징)이 아니다. 그냥 살아있는 영장류의 생물체 호모사피엔스인 것이다. 그런데 모두가 성렬아! 성렬아! 하고 부른다. 그리고 나는 성렬이가 나라는 것을 알게 되고 성렬아에 반응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이 내가 되는 것이다.
삶의 대부분은 김성렬이라는 존재가 주관하지만 거기에는 또 다른 나가 있다.
더 커다란 생명을 주관하는 힘, 우리가 배운 모든 이성과 윤리와 도덕을 앞서서 느껴지는 존재가 있다.
생각이 멈출 때 가끔씩 우리는 이런 존재를 느낄 수 있다. 아름다운 풍경이나 드라마틱한 장면을 볼 때 생각보다 약간 먼저 느껴지는 그런 존재말이다.
예를 들어 예쁜 여자가 지나가면 자기도 모르게 시선이 간다. 순식간에 받아들여진 주의가 아직 초점을 갖기전에 갖는 감각, 우리가 느낌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거기에 주의의 초점을 맞춰 우리는 생각을 보탠다. 와~ 멋지다. 한 번 사귀어볼까? 하고 생각이 시작된다. 그때부터는 자아가 주관한다.
실제가 아닌 실재에서는 그것들은 상호보완한다. 학습과 경험에 의해서 어떤 사람은 쫓아가서 프로포즈를 하고 어떤 사람은 그냥 쳐다보기만 할수도 있다. 또 상황에 따라서 달리 반응을 보이기도 한다.

요즈음에 연구되어지고 있는 신경생리학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자아는 생물학적 신경세포의 추상적 집합체다. 그러므로 자아는 생각하지만 실행할 몸이 없다. 그래서 그는 몸을 빌린다.
그러한 자아는 하나가 아니다. 우리가 가끔씩 머릿속에서 생각을 주고 받는 두 개 또는 여러개의 생각의 주체가 있다는 것은 조금만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다.
흔히 말하는 긍정적인 생각과 부정적인 생각같은 것이 동시에 충돌할 때 자주 느낄 수 있다.
불가에서는 천수천안이라고 했다. 천개의 손과 천개의 눈을 가진 존재 그것이 자아다.
그러나 그 자아는 용량이one channel capacity 다. 예를 들어 우리는 동시에음악을 들으면서 다른 한편 밥을 먹고 신문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동시에 하는 것이 아니라 음악 듣다 밥먹다 신문보다를 하고 있는 것이다. 주의의 초점이 한 곳으로 가면 나머지 두곳은 자동화라는 것을 하게 되는데 그 자동화를 주관하는 것이 자아가 만든 무의식의 주체다.
그것은 가끔씩 실수를 한다. 가끔씩 주의가 쏠려 얼굴이 틀어졌음을 인식하지 못하고 밥 숟가락을 볼태기에 들이 대거나 음악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게 된다.

자아는 학습과 경험에 의해서 점점 강력해지고 몸을 빌려 수행을 하는데 효율과 효과를 높이기 위해 습관이라는 것을 만드는데 이것에는 부정적인 면이 있다.
익숙한 것에 갇히게 되는 것이다. 즉 자동화라는 메카니즘에 갖히는 것이다.
안정된 조건과 환경에서는 유용한 것이지만 조건과 환경이 극심한 변화를 갖는 상황에서는 이것이 장애가 된다.
옛날에는 아버지 따라서 3년만 농사지으면 그 방법으로 평생을 사는데 지장이 없었다.
한 때는 대량생산의 작업대에서 기계적인 반복만 해도 사는데는 문제가 없었기 때문에 그것은 유용한 것이었다.

그러나 정보화 세계화 그리고 무한 경쟁이라는 급변하는 사회구조나 환경속에서 습관이라는 영역에 갖힌 환경의 변화에 민감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그것은 장애일 수 밖에 없다.

부모의 보호와 학생이라는 신분으로 보호받다가 어느날 갑자기 사회라는 것에 내동댕이 쳐지는 경우나 목매달고 살았던 직장에서 어느 날 갑자기 실직한 경우에 그렇다.
그 습관적 행동이나 사고들은 자동화되어 현실과 괴리감을 갖게 된다.
긴 세월동안의 자아의 무의식적(습관적) 행동들은 생각이전에 행동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자아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하는데 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며 새로운 습관을 만든다. 우리가 항상 걷던 풀밭 길이나 예전에 살았던 집으로 운전하던 습관은 새로운 길을 걷는 동안 자주 무의식속에 등장한다. 다른 생각 다른 이야기를 하다보면 우리는 어느 새 예전의 길로 걷거나 운전하고 있는 경우를 접하게 된다. 시간이 흐르며 반복을 통해 새로운 길을 만든다. 그리고 새 길은 점점 굳어지고 과거의 습관의 길에는 풀이 자라 무성해져서 흔적이 기억속에 남아있을 뿐 현실속에서 없어지는 것이다.

고도로 훈련된 선수의 길은 하나의 목표를 향해 가는 수없이 많은 여러 갈래의 길을 만들고 상황과 조건에 따라 무의식적으로 적절한 길을 선택해서 나가도록 끝없이 훈련하는 것이다.나의 스승은 신기에 이르는 동작은 300만번의 반복연습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렇게 해서 얻어진 동작만이 전술적인 기술로서 기능을 발휘할 수 있다. 다시말해 무의식적으로 선택적인 반응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기업이 말하는 프로젝트 팀 같은 전략적 프로세스, 즉 기존의 기능들을 목적에 따라 재구성하는 구조같은 것이다.
일반적으로 생활이나 삶에서는 개인의 꿈과 소망이 담긴 추상적인 하나의 길이 필요하고 그 길을 가기위한 구체적이고 방법적이며 행위적인 길들을 필요로 한다.

생각을 바꾸기 위해서는 보다 정확한 지도와 안내서가 있다면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특히 이곳 변화경영 연구소가 제공해주는 지도와 안내서들은 사회적 검증과 실증적인 검증이 이루어진 정확도와 신뢰도가 높은 마치 항공촬영으로 만든 지도와 같은 것이다.

그렇다면 진짜변화를 꿈꾸는 사람이라면 이 안내서에 대한 믿음만 있으면 된다. 그리고 그러한 안내서에 대한 믿음의 증거는 실천하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이렇게 말하지 않는다.
“ 감동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계획을 세웠습니다.” “많은 도움을 주십시요?”
진정한 믿음이 있다면 아마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그래서 저는 어떻게 했습니다.” “이렇게 해보니 이런 문제가 생겼습니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 할까요. 이 방법말고 다른 방법은 없을까요?”

누군가가 내게 와서 물었다.
“선생님, 이제 운동을 그만 두어야 하는데 뭘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아무것도 할 줄 아는게 없거든요!”
“ 그래! 그러면 아주 간단하다. 아무거나 하거라. !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데 무엇이든 하면 되지 않겠냐? ”
“ 지금 네게는 가야할 길이 없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다. 아직 가지도 않았는데 길이 있겠는가? 길은 사람이 가야 생기는 법이다. 이제부터 네가 가면 그것이 너의 길이다. ”
“어떤 길을 갈 것인지는 구본형의 변화경영 연구소에 들어가보아라. 네가 갈 길이 어딘지는 알수 있을 것이다.”

이길수 있다는 믿음, 성공할 수 있다는 믿음, 목표에 도달할 수 있다는 믿음
그것이 무엇이든 믿음이란 본능이 아니다.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성실한 훈련과 바른 수양으로 이루진 자기 노력의 산물이다.

“변화 아닌 변화”에서 벗어나 자기 개혁을 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됐으면 싶다.
구본형 선생님이 그러셨다.
변화는 절실한 당위성과 확신 그리고 단계적인 증거들이 통합될 때 이루어진다.
‘아주 오래전 강연에서’

사람은 믿는 만큼 행동한다.
변화를 꿈꾸는 사람들에게 묻는다. 겨자씨만한 믿음만 있어도 천국에 갈 수 있다는 데
당신은 변화에 대한 믿음은 얼마만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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