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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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학 칼럼 11>
길 잃어버리기
심심해서였을까? 어릴 때 나만의 놀이가 있었다. 일명 ‘길 잃어버리기’ 놀이!
방법은 무지 간단하다. 무작정 집을 나가 낯선 길을 따라 헤매고 다닌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거리라는 것이 고작 버스로 서너 정거장 정도의 거리나 되었을까? 하지만 어린 나에게는 새로운 문명을 찾는 탐험가의 심정처럼 매번 설레고 흥분되었다. 그 탐사에는 길동무가 함께 했다. 처음에는 두 명이었다. ‘더 가면 무엇이 나올까? 아! 가보고 싶다!’고 하는 호기심 친구와 ‘집으로부터 너무 벗어난 것이 아닐까?’ 라는 불안감 친구가 내 두 손을 양쪽에서 꼭 잡아 주었다. 호기심 친구는 늘 더 멀리까지 가보자며 나를 재촉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또 다른 친구인 불안감이 자꾸 강하게 제동을 걸었기 때문이다. 나와 불안감은 호기심이라는 친구를 설득시켜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에 불안감과 나는 음모를 꾸미고 호기심 친구를 몰래 먼 곳에 남겨두고 돌아왔다. 불안감과 손을 잡고 집에 오면서 후회는 없었지만 남겨진 친구가 걱정되어 자꾸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며칠 후에 두고 온 친구를 찾으러 길을 나섰다.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안전빵 인생!'
그 뒤로 난 호기심이라는 친구를 까맣게 잊고 살았다. 그런 친구가 있었다는 사실도 기억해내지 못할 정도였다. 그때부터 불안감이라는 친구와 나는 둘도 없는 단짝 친구가 되었다. 그의 손만을 잡고 우리는 남들이 많이 가는 잘 닦여진 길만을 다녔다. 말 그대로 ‘안전빵 인생’이었다. 주위에서도 잘하고 있다는 칭찬 일색이었다. ‘이게 아닌 것 같은데...’하는 의문도 들었지만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무언가 다른 길도 있는 것 같아 주위를 곁눈질 했지만 내 단짝 친구의 손을 뿌리치지 못했다. 그런데 언제부터 그 길 위에는 사람이 넘쳐흘렀다. 앞은 잘 보이지 않았고 조금만 천천히 갈려고 해도 인파에 떠밀려 나의 속도를 지킬 수 없었다. 급하다며 밀치고 가는 사람들, 길옆에 가꾸어진 꽃밭으로 지나가는 사람들, 넘어진 사람을 밟고 가는 사람까지 있었으며 어느 날은 그 속에 내가 있었다. 짜증과 권태와 푸념의 나날들이었지만 조금만 더 가면 넓은 신작로가 펼쳐 있을 것이라 믿었다.
yesterday once more
그러던 어느 날! 내가 걷는 이 길의 끝이 궁금했다. 몹시도 궁금했다. 친구와 주위 사람들에게 물어 보았다. ‘아직도 그런 질문을 하며 사니?’ ‘다른 길도 다 똑같아. 그나마 이 길이 편해.’ ‘인생 뭐 있어!’라는 대답뿐이었다. 그러나 난 끝을 알고 싶었고 다른 길은 어떤 모습인지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다. 습관적으로 흔들거리는 팔다리를 붙잡았다. 그리고 길옆에 높은 나무위에 올라갔다. 불안감이라는 내 친구는 펄펄 뛰며 내려오라고 했지만 난 듣지 않았다. 높은 곳에 올라가니 길은 하나가 아니었다. 험난한 길도 보였지만 작고 아름다운 길도 놓여 있었다. 미로에 갇히거나 돌밭을 걷는 사람도 있었지만 아름다운 오솔길에서 길 맛을 음미하며 걸어오는 이들도 있었다. 그 중에 아는 얼굴이 있었다. 그는 ‘yesterday once more'라는 노래를 부르며 나를 보고 환하게 웃었다. ‘에브리 샤랄라라~♪ 에브리 오우오우~♬’ ‘누구더라? 그래! 맞아!’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호기심이라는 옛 친구였다. 그 친구를 보는 순간 고구마 넝쿨을 캐듯이 어린 시절의 기억들이 따라 올라왔다.
'변화'라는 길
지금 나는 깨복장이 옛 친구를 만나 새 길을 간다. 처음에는 익숙함에서 멀어져 낯설음으로 향해가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은 말라빠진 익숙함에서 벗어나 끈적거리는 그리움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불안감이라는 오랜 친구를 버린 것은 아니다. 애를 먹었지만 그 역시 우리의 길에 함께 하고 있다. 호기심과 다시 만난 나는 예전처럼 불안감이라는 친구의 이야기를 맹신하는 것이 아니라 균형있게 들어주고 차분히 설득시킬 여유와 자신이 붙었다. 지금 변화의 길 위에 우리 세 친구는 함께 서 있다.
갈 길이 보이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 세상이 미로처럼 탈출구가 보이지 않는다면 어찌 해야 하나? 일단 가던 길을 잠시 멈춰 보자. 그리고 지금 눈 위치보다 더 높은 곳이 있다면 올라가 살펴 보자. 그 곳에서 그리운 옛 친구를 찾아보자.
‘확실성이란 의심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여행은 나로부터 밖으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 이 땅의 무수한 삶을 찾아 헤매는 절실함으로 내 안으로 들어가면서 사색하는 행위일 터이다. 여행의 목적지가 다르다고 해도 되돌아오는 곳은 같다. 바로 자기 자신이다. 여행은 자기 자신을 기억하는 행위이다.’
-안 치운, 그리움으로 걷는 옛 길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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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친구
문 요한 (변화경영 연구소 연구원, 정신과 전문의)
길 잃어버리기
심심해서였을까? 어릴 때 나만의 놀이가 있었다. 일명 ‘길 잃어버리기’ 놀이!
방법은 무지 간단하다. 무작정 집을 나가 낯선 길을 따라 헤매고 다닌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거리라는 것이 고작 버스로 서너 정거장 정도의 거리나 되었을까? 하지만 어린 나에게는 새로운 문명을 찾는 탐험가의 심정처럼 매번 설레고 흥분되었다. 그 탐사에는 길동무가 함께 했다. 처음에는 두 명이었다. ‘더 가면 무엇이 나올까? 아! 가보고 싶다!’고 하는 호기심 친구와 ‘집으로부터 너무 벗어난 것이 아닐까?’ 라는 불안감 친구가 내 두 손을 양쪽에서 꼭 잡아 주었다. 호기심 친구는 늘 더 멀리까지 가보자며 나를 재촉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또 다른 친구인 불안감이 자꾸 강하게 제동을 걸었기 때문이다. 나와 불안감은 호기심이라는 친구를 설득시켜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에 불안감과 나는 음모를 꾸미고 호기심 친구를 몰래 먼 곳에 남겨두고 돌아왔다. 불안감과 손을 잡고 집에 오면서 후회는 없었지만 남겨진 친구가 걱정되어 자꾸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며칠 후에 두고 온 친구를 찾으러 길을 나섰다.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안전빵 인생!'
그 뒤로 난 호기심이라는 친구를 까맣게 잊고 살았다. 그런 친구가 있었다는 사실도 기억해내지 못할 정도였다. 그때부터 불안감이라는 친구와 나는 둘도 없는 단짝 친구가 되었다. 그의 손만을 잡고 우리는 남들이 많이 가는 잘 닦여진 길만을 다녔다. 말 그대로 ‘안전빵 인생’이었다. 주위에서도 잘하고 있다는 칭찬 일색이었다. ‘이게 아닌 것 같은데...’하는 의문도 들었지만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무언가 다른 길도 있는 것 같아 주위를 곁눈질 했지만 내 단짝 친구의 손을 뿌리치지 못했다. 그런데 언제부터 그 길 위에는 사람이 넘쳐흘렀다. 앞은 잘 보이지 않았고 조금만 천천히 갈려고 해도 인파에 떠밀려 나의 속도를 지킬 수 없었다. 급하다며 밀치고 가는 사람들, 길옆에 가꾸어진 꽃밭으로 지나가는 사람들, 넘어진 사람을 밟고 가는 사람까지 있었으며 어느 날은 그 속에 내가 있었다. 짜증과 권태와 푸념의 나날들이었지만 조금만 더 가면 넓은 신작로가 펼쳐 있을 것이라 믿었다.
yesterday once more
그러던 어느 날! 내가 걷는 이 길의 끝이 궁금했다. 몹시도 궁금했다. 친구와 주위 사람들에게 물어 보았다. ‘아직도 그런 질문을 하며 사니?’ ‘다른 길도 다 똑같아. 그나마 이 길이 편해.’ ‘인생 뭐 있어!’라는 대답뿐이었다. 그러나 난 끝을 알고 싶었고 다른 길은 어떤 모습인지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다. 습관적으로 흔들거리는 팔다리를 붙잡았다. 그리고 길옆에 높은 나무위에 올라갔다. 불안감이라는 내 친구는 펄펄 뛰며 내려오라고 했지만 난 듣지 않았다. 높은 곳에 올라가니 길은 하나가 아니었다. 험난한 길도 보였지만 작고 아름다운 길도 놓여 있었다. 미로에 갇히거나 돌밭을 걷는 사람도 있었지만 아름다운 오솔길에서 길 맛을 음미하며 걸어오는 이들도 있었다. 그 중에 아는 얼굴이 있었다. 그는 ‘yesterday once more'라는 노래를 부르며 나를 보고 환하게 웃었다. ‘에브리 샤랄라라~♪ 에브리 오우오우~♬’ ‘누구더라? 그래! 맞아!’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호기심이라는 옛 친구였다. 그 친구를 보는 순간 고구마 넝쿨을 캐듯이 어린 시절의 기억들이 따라 올라왔다.
'변화'라는 길
지금 나는 깨복장이 옛 친구를 만나 새 길을 간다. 처음에는 익숙함에서 멀어져 낯설음으로 향해가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은 말라빠진 익숙함에서 벗어나 끈적거리는 그리움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불안감이라는 오랜 친구를 버린 것은 아니다. 애를 먹었지만 그 역시 우리의 길에 함께 하고 있다. 호기심과 다시 만난 나는 예전처럼 불안감이라는 친구의 이야기를 맹신하는 것이 아니라 균형있게 들어주고 차분히 설득시킬 여유와 자신이 붙었다. 지금 변화의 길 위에 우리 세 친구는 함께 서 있다.
갈 길이 보이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 세상이 미로처럼 탈출구가 보이지 않는다면 어찌 해야 하나? 일단 가던 길을 잠시 멈춰 보자. 그리고 지금 눈 위치보다 더 높은 곳이 있다면 올라가 살펴 보자. 그 곳에서 그리운 옛 친구를 찾아보자.
‘확실성이란 의심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여행은 나로부터 밖으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 이 땅의 무수한 삶을 찾아 헤매는 절실함으로 내 안으로 들어가면서 사색하는 행위일 터이다. 여행의 목적지가 다르다고 해도 되돌아오는 곳은 같다. 바로 자기 자신이다. 여행은 자기 자신을 기억하는 행위이다.’
-안 치운, 그리움으로 걷는 옛 길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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