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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병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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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6월 19일 18시 49분 등록
구본형 변화경영연구원 활동을 통해 본격적으로 책을 읽게 된지 약 3개월이 지났다. 신영복 선생의 ‘강의’에서부터 강영희 평론가의 ‘금빛 기쁨의 기억’에 이르기까지 12권을 읽으면서 내 마음을 일관되게 관통하는 단어가 하나 있으니 그것은 바로 ‘성찰(省察)’이다. 그래서 근자에 ‘성찰’을 주제로 한번 칼럼을 써보리라 마음을 먹고 있었는데, 여기에 불을 당긴 것은 다름 아닌 윤동주 시인이었다.

감수성이 예민한 사춘기 뜨락에서,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라는 그의 서시를 느끼며 순수함을 지향하는 의연한 다짐을 해본 기억은 대부분 한번쯤 있으리라. ‘성찰’에 대해 생각하다 불현듯 떠오른 그의 시가, 이 시대 꼭 필요한 가치인 ‘부끄러운 성찰’로 읽혀지는 것이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서시).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쓰여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쉽게 쓰여진 시).
‘돌담을 더듬어 눈물짓다 쳐다보면 하늘은 부끄럽게 푸릅니다’ (길).

성찰(省察)은 반성과 관찰이다. 반성을 하기 위해서는 뒤를 돌아봐야 한다. 마치 자동차를 운전할 때 가끔씩은 백미러를 봐야 하는 것과 같다. 오늘날 우리에게 성찰의 여백이 실종된 것은 근대화라는 미명하에 서구화에 대한 무비판적인 조급한 수용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것의 결과는 암울한 근대 100년의 역사가 대변해준다.

서구화로 인한 가장 큰 부작용은 ‘공간의 상실’과 ‘기억의 상실’이다. 인간의 몸처럼 생동감이 넘치고 장독대 옹기종기 널린 앞마당 같은 정겨움의 공간은 없어지고 대신 위치 정보만을 정확하게 표시하는 지도가 그 위치를 황량하게 메우고 있다. ‘시간의 화살 위에 올라탄 인간이 잡담 제하고 일직선 저편의 목표에 몰두한 채 앞만 보고 질주한다면, 공간의 치마폭에 싸인 인간은 반성적인 성찰의 시선으로 주변을 둘러보며 걸어간다’ (강영희, 금빛 기쁨의 기억).

마찬가지로 시간의 뒤를 되돌아 보지 못함으로 인해 우리는 기억을 점점 상실해 버렸으며, 이는 정체성의 위기를 가져왔다. 서양의 합리란 과학적인 형식합리에만 치우쳐 있고 역사를 통해 발굴되는 실질합리를 원천적으로 배제해 왔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바쁨’이라는 시간의 굴레 속에서 자신을 점점 잃어버린 채 물신(物神)을 좇고 있다. 아니, 어쩌면 이미 자기 자신을 기억하고 싶지 않는 ‘필름이 끊긴’ 만취 상태에 있는 지도 모른다.

성찰은 과거에 대한 기억이 전제되어야 한다.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면 과거의 오류를 반복하게 된다. 고대 은나라 때의 갑골문을 보면 살필 '성(省)' 자의 모습은 부라린 커다란 눈동자를 상형화하고 있다고 한다. 돌아보되 두 눈을 부릅뜨고 돌아보아야 한다. 냉철한 관찰자의 시선으로 관조적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무엇을 반성하는 지가 분명해야 한다.

성찰이 필요한 것은 비단 우리 인생을 잘 알기 위한 것만은 아니다. ‘인생은 오직 뒤돌아볼 때에만 이해할 수 있지만,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앞을 바라보아야 한다.’고 키에르케고르는 말했다. 우리가 과거를 성찰하는 것은 미래의 창조와 맞닿아있기 때문이다. 뼈에 사무칠 정도로 깊이 있는 성찰은 빛나는 혜안을 안겨준다. 후회에 머물러 있지 않고 부끄럽지만 미래에 대해 의연한 태도를 취한다. 진정한 성찰은 깊은 우물에서 한 바가지 건져 올린 두레박과도 같다. 농축되어 있는 엑기스와도 같고 나무의 뿌리와도 비슷하다. “감나무도 산목숨이어서 작년에 뿌리가 너무 힘을 많이 써부러서 올해는 꽃도 열매도 피우지 않고 시방 뿌리 힘을 키우는 중이란다.” (박노해 ‘해거리’)

성찰을 하기 위해서는 기록을 해야 한다. 일전에 회사에서 교육을 받던 중 들었던 호암 이병철 회장의 일화가 생각난다. 평소에 이병철 회장은 메모광이었다고 한다. 요즘 플랭클린 플래너를 쓰는 사람도 많아 메모하는 것이 그리 특별한 일은 아니지만, 이회장의 메모는 기억을 보완하기 위한 메모가 아닌 ‘자기 성찰’의 메모였다고 한다. 그 날 있었던 사건, 만났던 사람들을 기억하면서 써내려 간 자기 반성의 그것이었다고 한다.

요즘 온라인 1인 미디어 시대가 활짝 열리면서 자신의 생각을 기록하고 표현하는 문화가 확산되고 있는 점은 긍정적인 현상이다. 학창시절 몰래 썼던 나만의 일기가 공개된 일기장으로 탈바꿈하고 있다. 물론 예전에 비해 성찰의 깊이는 얕고, 아직 역기능도 많이 있지만 나는 온라인 미디어를 보면서 ‘성찰과 연대’의 싹수를 눈여겨본다. 아무튼 나의 일상을 규칙적으로 담아내야 한다.

무엇보다 성찰에 관해 명심해야 할 것은 가슴으로 담아내야 한다는 점이다. 내 자신의 골수로 느끼고 이해해야 한다. “성찰이란 매일 매일의 크고 작은 것들을 하나하나 깨트려나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머리보다는 가슴(Warm heart)으로 해야 합니다” (신영복). 그래서 이제 우리는 다시 가슴으로 거울 앞에 서야 한다.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줄의 참회록을 써야 한다” (윤동주, 참회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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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박설탕
2005.06.20 01:05:20 *.102.36.38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성찰은 가슴으로하라~ 그동안 머리로 해온 것 같네요;;
저도 최근에 블러그라는 것을 통해서 나의 생각을 적어나갔는데,
정말 부끄럽더라구요.
뭐에 그리 조급했는지 얕은 생각만 적은 것 같구. 그리곤 그만 뒀습니다.
공책에 적는 내 일기장이 더 좋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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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요한
2005.06.22 23:51:05 *.253.83.250
좋은 글 맛있게 씹어 먹었습니다. 냠냠!
잠깐 딴지 걸어도 되나요? 저도 학창시절에 동주형 왕팬이었죠. 그런데 언제부터 그의 시가 잘 와닿지가 않더라구요. 내가 변해버린 것인지 아니면 그의 성찰이 너무 힘없게 느껴져서인지... 아마 둘 다일것 같습니다. 시대적 소산이겠지만 그의 강박적 자기성찰이 때로는 스스로를 겨누는 칼 끝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습니다. 그래도 오랜만에 동주형 시가 나오니까 참 좋네요. 그리고 아버님 건강이 좋아지신다니 무척 다행입니다. 건승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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