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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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학 칼럼 12>
지붕위에 올라간 아이
또 녀석이 보였다. 대략 대 여섯 살쯤 되었을까? 어떻게 그곳에 올라갔는지 모르지만 신비하게도 그 아이는 매번 지붕위에 올라가 있었다. 날개짓이 버거워서 잠시 쉬었다 가는 아기 새처럼 지붕 위에 쭈그려 앉아 있곤 했다. 고개를 푹 숙이고 기왓장위에 무언가를 쓰기도하고 그러다가 가만히 고개를 들어 하늘만 하염없이 바라보는 아이였다. 아이의 눈은 슬프고 외로웠지만 드물게 가벼운 미소도 스쳤다. 얼굴은 창백해 보였고 표정 속에는 무언가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것 같은 상실감이 가득 차 보였다. 누구인가 하는 궁금증에 작정을 하고 재촉하듯 물었다. ‘너 누구니?’ 거듭되는 물음에도 아이는 대답이 없었다. 자꾸 부르는 내 소리가 듣기 싫었는지 아이는 일어섰다. 그리고 지붕위에 놓인 좁은 용마루 위를 양팔로 균형을 잡으며 위태롭게 걸어갔다. ‘어어, 조심해!!’ 혹시라도 헛딛지는 않을까 싶어 나도 모르게 큰 소리로 외쳤다. 그새 아이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부드러운 네 입술에 입 맞추다
며칠 동안 아이를 기다렸지만 보이질 않았다.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일까?’ 마음속에 걱정도 되고 보고 싶었다. 하루는 조심스레 지붕 위를 걸어가서 아이가 앉았던 자리에 가 보았다. 기왓장 위에 무어라고 썼다가 지워버린 흙먼지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난 그 곳에 앉아 한 동안 그 아이가 쳐다보던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늘에는 시시각각으로 모양을 바꾸며 흘러가는 구름이 지나갔다. 순간 ‘구름이 아이의 친구였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난 녀석이 낙서하기 좋아했던 기왓장위에 ‘우리 친구할까?’라고 또박또박 써 놓고 내려왔다.
그리고 며칠이나 흘렀을까? 드디어 그 아이가 찾아왔다. 역시 다름 아닌 지붕 위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눈이 마주친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활짝 웃었다. 난 지붕위로 올라가 아이 옆에 앉았다. 깊은 슬픔에 빠진 눈이 골고루 축축해 있었다. 난 아이를 안아주었다. 어린 새가 파드닥거리는 것처럼 움찔하며 떨더니 이내 내 가슴속을 파고 들어왔다. 나는 자장가를 불러주었고 아이는 평화롭게 잠이 들었다. 창백해 보이는 아이의 볼과 입술에 나는 내 입술을 맞추었다. 한없이 부드러웠다. 순간 내 입속에서 뜨거운 피들이 머금어지더니 아이의 입속으로 스며들었다. 우리의 피가 섞였다. 차가왔던 아이의 몸에 점점 온기가 퍼져나갔다. 그때! 품안의 아이는 점차 사라져가고 등 양쪽으로 무언가 돋아나는 느낌이 들었다. 몸이 가벼워졌다.
내 안에 '애'있다!
우리들 마음속에는 모두 아이들이 살고 있다. 한편으로는 때 묻지 않은 동심이 살고 있고 또 한편으로는 미숙한 어린아이가 살고 있다. 변화의 여정 속에 우리는 그들의 존재를 모두 만난다. 변화를 결심하고 길을 나설 때 잃었던 동심을 만나기도 하고 무한한 가능성을 되찾기도 한다. 그리고 고비에 부딪혀서는 미숙한 어린아이들을 만난다. 하염없이 자신에게만 모든 관심을 쏟아달라며 보채는 아이, 현실은 포기하고 비현실적 공상에 빠져 자기 방에 문을 잠그고 나오지 않는 아이, 갈 곳이 없어 외로움에 길을 헤매는 아이 등 여러 어린아이를 만난다. 그런데 우리는 그 아이들을 버리고 떠날 수는 없다. 왜냐면 우리가 낳고 키운 아이이기 때문이다.
변화란 자신에게 원하는 부모가 되어주는 것
변화하고 성장하는 사람이란 마음속에 미숙한 어린아이가 없는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마음속의 아이들을 잘 들여다보고 그들이 원하는 것을 파악해서 바람직한 부모 역할을 해주는 사람이다. 과도한 탐욕을 부리는 아이에게는 양보의 미덕을, 너무 많은 꾸지람에 위축된 아이에게는 격려와 칭찬을, 무관심 속에 외로워하는 아이에게는 따뜻한 사랑을 베푸는 사람이야 말로 변화하고 성장하는 사람이다. 자신이 원했던 부모상(父母象)이 되어 자신을 대해주는 것이 바로 변화이자 성장이다.
당신의 마음속에는 어떤 어린아이가 살고 있습니까?
당신은 그 아이들을 친자식이라고 여깁니까, 의붓자식이라고 여깁니까?
당신은 그들에게 어떤 부모가 되어주고 있습니까?
IP *.245.167.102
나에게 입 맞추다
문 요한 (변화경영 연구소 연구원, 정신과 전문의)
지붕위에 올라간 아이
또 녀석이 보였다. 대략 대 여섯 살쯤 되었을까? 어떻게 그곳에 올라갔는지 모르지만 신비하게도 그 아이는 매번 지붕위에 올라가 있었다. 날개짓이 버거워서 잠시 쉬었다 가는 아기 새처럼 지붕 위에 쭈그려 앉아 있곤 했다. 고개를 푹 숙이고 기왓장위에 무언가를 쓰기도하고 그러다가 가만히 고개를 들어 하늘만 하염없이 바라보는 아이였다. 아이의 눈은 슬프고 외로웠지만 드물게 가벼운 미소도 스쳤다. 얼굴은 창백해 보였고 표정 속에는 무언가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것 같은 상실감이 가득 차 보였다. 누구인가 하는 궁금증에 작정을 하고 재촉하듯 물었다. ‘너 누구니?’ 거듭되는 물음에도 아이는 대답이 없었다. 자꾸 부르는 내 소리가 듣기 싫었는지 아이는 일어섰다. 그리고 지붕위에 놓인 좁은 용마루 위를 양팔로 균형을 잡으며 위태롭게 걸어갔다. ‘어어, 조심해!!’ 혹시라도 헛딛지는 않을까 싶어 나도 모르게 큰 소리로 외쳤다. 그새 아이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부드러운 네 입술에 입 맞추다
며칠 동안 아이를 기다렸지만 보이질 않았다.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일까?’ 마음속에 걱정도 되고 보고 싶었다. 하루는 조심스레 지붕 위를 걸어가서 아이가 앉았던 자리에 가 보았다. 기왓장 위에 무어라고 썼다가 지워버린 흙먼지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난 그 곳에 앉아 한 동안 그 아이가 쳐다보던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늘에는 시시각각으로 모양을 바꾸며 흘러가는 구름이 지나갔다. 순간 ‘구름이 아이의 친구였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난 녀석이 낙서하기 좋아했던 기왓장위에 ‘우리 친구할까?’라고 또박또박 써 놓고 내려왔다.
그리고 며칠이나 흘렀을까? 드디어 그 아이가 찾아왔다. 역시 다름 아닌 지붕 위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눈이 마주친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활짝 웃었다. 난 지붕위로 올라가 아이 옆에 앉았다. 깊은 슬픔에 빠진 눈이 골고루 축축해 있었다. 난 아이를 안아주었다. 어린 새가 파드닥거리는 것처럼 움찔하며 떨더니 이내 내 가슴속을 파고 들어왔다. 나는 자장가를 불러주었고 아이는 평화롭게 잠이 들었다. 창백해 보이는 아이의 볼과 입술에 나는 내 입술을 맞추었다. 한없이 부드러웠다. 순간 내 입속에서 뜨거운 피들이 머금어지더니 아이의 입속으로 스며들었다. 우리의 피가 섞였다. 차가왔던 아이의 몸에 점점 온기가 퍼져나갔다. 그때! 품안의 아이는 점차 사라져가고 등 양쪽으로 무언가 돋아나는 느낌이 들었다. 몸이 가벼워졌다.
내 안에 '애'있다!
우리들 마음속에는 모두 아이들이 살고 있다. 한편으로는 때 묻지 않은 동심이 살고 있고 또 한편으로는 미숙한 어린아이가 살고 있다. 변화의 여정 속에 우리는 그들의 존재를 모두 만난다. 변화를 결심하고 길을 나설 때 잃었던 동심을 만나기도 하고 무한한 가능성을 되찾기도 한다. 그리고 고비에 부딪혀서는 미숙한 어린아이들을 만난다. 하염없이 자신에게만 모든 관심을 쏟아달라며 보채는 아이, 현실은 포기하고 비현실적 공상에 빠져 자기 방에 문을 잠그고 나오지 않는 아이, 갈 곳이 없어 외로움에 길을 헤매는 아이 등 여러 어린아이를 만난다. 그런데 우리는 그 아이들을 버리고 떠날 수는 없다. 왜냐면 우리가 낳고 키운 아이이기 때문이다.
변화란 자신에게 원하는 부모가 되어주는 것
변화하고 성장하는 사람이란 마음속에 미숙한 어린아이가 없는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마음속의 아이들을 잘 들여다보고 그들이 원하는 것을 파악해서 바람직한 부모 역할을 해주는 사람이다. 과도한 탐욕을 부리는 아이에게는 양보의 미덕을, 너무 많은 꾸지람에 위축된 아이에게는 격려와 칭찬을, 무관심 속에 외로워하는 아이에게는 따뜻한 사랑을 베푸는 사람이야 말로 변화하고 성장하는 사람이다. 자신이 원했던 부모상(父母象)이 되어 자신을 대해주는 것이 바로 변화이자 성장이다.
당신의 마음속에는 어떤 어린아이가 살고 있습니까?
당신은 그 아이들을 친자식이라고 여깁니까, 의붓자식이라고 여깁니까?
당신은 그들에게 어떤 부모가 되어주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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