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노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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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이 이영남을 찾았다.
내일이면 임금의 출전령을 어긴 역도의 칼를 쓰고 아직도 적들의 노략질로 수리되지 않은 궁궐이 있는 한양으로 압송될 것이었다.
이영남은 강한 신하가 두려운 임금의 새 삼도수군통제사로 원균을 임명하고 그 첫번째 임무로 무사히 한산을 접수하고 이순신을 의금부로 잡아올리라는 명을 몸으로 거부하고 원균의 전라감영을 이탈하여 이순신을 지키고자 했던 원균의 사람이었지만 끝끝내 유비의 사람이 된 조자룡처럼 조선의 장수를 지키려 했던 이였다.
이순신은 전장에 참가한 이래 한 번도 곁에서 벗어 놓지 않았던 애검을 건네 주었다.
이영남은 말없이 그 검을 건네 받았다.
내가 없는 한산을 네가 대신 지켜달라는 뜻이었을까?
크고 작은 전투마다 이기기만 하는 이순신이 무서운 임금이 언젠가는 자기를 해할것이라는 알고 마지막을 준비하는 것이었을까?
저 멀리 전라해안 수영 안에 혹시라도 역모의 군사라도 기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의심하는 임금의 조선의 안위보다는 사직의 보전이 더 염려스러움에 내가 믿고 가야할 장수가 너밖임을 너는 알겠는가?
이영남은 한양으로 압송되는 함거의 뒤를 따라 걸어서 올라왔다.
일개 지방의 관리에 불과한 그가 어떻게 임금을 대면하였을지는 모르나, 이영남은 이마로 대전 마루를 찧으며 말했다.
'전하, 통제공의 죄를 물으시더라도 그 몸을 부수지 마소서. 전하께서 통제공을 죽이시면 사직을 잃으실까 염려되옵니다.'
이순신은 정유년 정월 초하룻날 의금부에서 풀려나 백의종군을 명받았다.
이영남은 수영을 이탈한 죄로 곤장 50대를 맞고 풀려났다.
임진왜란 내내 선조의 가장 큰 공적은 아마 이순신을 등용하고 재등용한 일일 것이다. 아니 이순신을 죽이지 않고 살려둬서 스스로 죽게 한 일일지도 모른다.
무릇 최고경영자의 가장 중요한 업무가 인사라 했던가.
어쩌면 선조가 전쟁의 와중에 병사라도 했었으면 조선은 일본에 항복했을지도 모를일이다. 나약한 관료들이 당장 살고 싶어 어린 광해를 꼬드겼을지 모르지.
어쨌던 선조는 전쟁이 끝나는 내내 죽지않고 살아서 사직의 안위를 걱정하였다. 그에게는 조선의 안위보다 이씨조선왕조의 숨결이 더 중요했을테니까.
그러나 이영남한테는 임금의 사직보다는 이순신의 목숨이 더 중요했다.
조선의 안위도 임금의 사직도 전쟁의 마감도 이순신에 달려있었음을 알고 있었기에 그는 스스로를 버려서라도 이순신을 살리고자 하였다.
이영남은 제7대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으며, 이순신이 살아 생전 '나를 대신할 사람은 이영남이다.'라고 극찬하였다고 한다.
이영남은 극중 이름이며 본명은 이운룡으로 추정된다.
최고경영자는 언제 어디서나 현장에서 멀어지면 않된다.
내부 고객의 소리, 외부 고객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있어야 한다.
선조는 이순신을 죽이게 되면 혹 전쟁이 질까봐 여러 신하들의 애끓는 구명을 못이기는 척 방면하고 언젠가 한번 쓰일지 모를 페이스메이커로 만들을지도 모른다. 멀리 한양에서 부산, 한산에서 벌어지는 현장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고 수십가지로 들려오는 전쟁의 정보속에서 그나마 최선의 결정이었을지도 모른다.
이순신은 병영내 자기 사람을 확실하게 심어놓고 준비한 탓에 자기를 대신할 사람을 이끌어 냈을 것이다.
나같은 사람을 많이 복제해 놓는 것만이 전쟁을 하루 빨리 종결할 수 있다는 믿음에서 한 당연한 업무들이 만고의 영웅으로 만들어 준 것이다.
요즈음 자기보다 뛰어난 밑의 직원이 있으면 어떻게 쫓아내나 눈에 불을 키고 덤비는 상사들이 득실되는 상황에 비하면 이순신의 선견지명은 우리가 내내 배워야 할 일이다.
수백년이 지난 오늘 우리에게는 이순신만이 임진란의 영웅이겠지만 .... 이영남도 임진란의 영웅이리라.
그렇다면 선조는 어떻게 평가되어야 할까?
IP *.247.37.150
내일이면 임금의 출전령을 어긴 역도의 칼를 쓰고 아직도 적들의 노략질로 수리되지 않은 궁궐이 있는 한양으로 압송될 것이었다.
이영남은 강한 신하가 두려운 임금의 새 삼도수군통제사로 원균을 임명하고 그 첫번째 임무로 무사히 한산을 접수하고 이순신을 의금부로 잡아올리라는 명을 몸으로 거부하고 원균의 전라감영을 이탈하여 이순신을 지키고자 했던 원균의 사람이었지만 끝끝내 유비의 사람이 된 조자룡처럼 조선의 장수를 지키려 했던 이였다.
이순신은 전장에 참가한 이래 한 번도 곁에서 벗어 놓지 않았던 애검을 건네 주었다.
이영남은 말없이 그 검을 건네 받았다.
내가 없는 한산을 네가 대신 지켜달라는 뜻이었을까?
크고 작은 전투마다 이기기만 하는 이순신이 무서운 임금이 언젠가는 자기를 해할것이라는 알고 마지막을 준비하는 것이었을까?
저 멀리 전라해안 수영 안에 혹시라도 역모의 군사라도 기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의심하는 임금의 조선의 안위보다는 사직의 보전이 더 염려스러움에 내가 믿고 가야할 장수가 너밖임을 너는 알겠는가?
이영남은 한양으로 압송되는 함거의 뒤를 따라 걸어서 올라왔다.
일개 지방의 관리에 불과한 그가 어떻게 임금을 대면하였을지는 모르나, 이영남은 이마로 대전 마루를 찧으며 말했다.
'전하, 통제공의 죄를 물으시더라도 그 몸을 부수지 마소서. 전하께서 통제공을 죽이시면 사직을 잃으실까 염려되옵니다.'
이순신은 정유년 정월 초하룻날 의금부에서 풀려나 백의종군을 명받았다.
이영남은 수영을 이탈한 죄로 곤장 50대를 맞고 풀려났다.
임진왜란 내내 선조의 가장 큰 공적은 아마 이순신을 등용하고 재등용한 일일 것이다. 아니 이순신을 죽이지 않고 살려둬서 스스로 죽게 한 일일지도 모른다.
무릇 최고경영자의 가장 중요한 업무가 인사라 했던가.
어쩌면 선조가 전쟁의 와중에 병사라도 했었으면 조선은 일본에 항복했을지도 모를일이다. 나약한 관료들이 당장 살고 싶어 어린 광해를 꼬드겼을지 모르지.
어쨌던 선조는 전쟁이 끝나는 내내 죽지않고 살아서 사직의 안위를 걱정하였다. 그에게는 조선의 안위보다 이씨조선왕조의 숨결이 더 중요했을테니까.
그러나 이영남한테는 임금의 사직보다는 이순신의 목숨이 더 중요했다.
조선의 안위도 임금의 사직도 전쟁의 마감도 이순신에 달려있었음을 알고 있었기에 그는 스스로를 버려서라도 이순신을 살리고자 하였다.
이영남은 제7대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으며, 이순신이 살아 생전 '나를 대신할 사람은 이영남이다.'라고 극찬하였다고 한다.
이영남은 극중 이름이며 본명은 이운룡으로 추정된다.
최고경영자는 언제 어디서나 현장에서 멀어지면 않된다.
내부 고객의 소리, 외부 고객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있어야 한다.
선조는 이순신을 죽이게 되면 혹 전쟁이 질까봐 여러 신하들의 애끓는 구명을 못이기는 척 방면하고 언젠가 한번 쓰일지 모를 페이스메이커로 만들을지도 모른다. 멀리 한양에서 부산, 한산에서 벌어지는 현장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고 수십가지로 들려오는 전쟁의 정보속에서 그나마 최선의 결정이었을지도 모른다.
이순신은 병영내 자기 사람을 확실하게 심어놓고 준비한 탓에 자기를 대신할 사람을 이끌어 냈을 것이다.
나같은 사람을 많이 복제해 놓는 것만이 전쟁을 하루 빨리 종결할 수 있다는 믿음에서 한 당연한 업무들이 만고의 영웅으로 만들어 준 것이다.
요즈음 자기보다 뛰어난 밑의 직원이 있으면 어떻게 쫓아내나 눈에 불을 키고 덤비는 상사들이 득실되는 상황에 비하면 이순신의 선견지명은 우리가 내내 배워야 할 일이다.
수백년이 지난 오늘 우리에게는 이순신만이 임진란의 영웅이겠지만 .... 이영남도 임진란의 영웅이리라.
그렇다면 선조는 어떻게 평가되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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