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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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학 칼럼 15>
나는 나를 넘어섰을까?
1988년 초여름이었을까. 난 갑작스레 산에 가고 싶었다. 그 젊은 날! 산에 오른다는 의미는 단 하나였다. 나를 넘어서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산행은 산과 나의 총 없는 전쟁이었다. 정상을 딛고 서서 포효하는 것! 얼마나 시간을 단축하느냐는 것! 그런 것들만이 중요했다. 그것은 내가 나를 얼마만큼 넘어섰는지를 보여주는 확실한 표식이었다. 그런데 이런! 그날은 하필 손전등이 고장 났다. 그럼에도 나는 기록 욕심에 늦은 시간까지 산행을 고집하다가 그만 길을 잃어버렸다. 새벽까지 헤맸지만 결국 한치 앞도 벗어나지 못했다. 비까지 내렸다. 텐트를 펼칠 곳은 고사하고 비 피할 곳도 찾지 못했다. 나는 바위틈에 쪼그려 앉았다. 날짐승들의 울음소리가 어느 틈에 자장가로 들리면서 난 고꾸라져 잠이 들었다. 얼마나 잠들었을까. 누군가 내 몸을 흔들어 깨웠다. 묘령의 여인이 서 있었다. 난 그녀가 건네준 물과 알 수 없는 음식을 먹고서야 조금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이곳이 벽소령 근처라고 알려주었고 그만 내려가는 것이 좋을것 같다는 충고를 남긴 채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묘한 기분이었다. 난 그런데도 비몽사몽간에 천왕봉을 올라섰다.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기쁘기는커녕 순간 서러웠다. 완주는 했지만 몸과 마음이 만신창이가 된 느낌이었다. 그 산행을 통해 얻은 것이라고는 며칠동안 식지 않은 신열과 몸살뿐이었다.
또 하나의 산행
나는 최근동안 산을 오르지 못했다. 하지만 또 하나의 산을 오르고 있다. 그 산은 아직 높이조차 가늠할 수 없다. 구름에 가려 전체를 알 수 없다. 그 산을 나는 조심스럽게 오르고 있다. 아니, 오히려 즐기고 있다. 옛날처럼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신발 끈을 조여 매지는 안는다. 계곡물에 발을 담그고 찌든 마음을 빨아 바위위에 널어놓고 늘어지게 한 숨 자기도 한다. 산에서 나고 자라나는 것들이 무엇인지 길섶을 살펴본다. 다른 사람이 길을 잃지 않도록 나뭇가지에 깃을 달아놓기도 한다.
그 산은 ‘무의식’이라는 산이다. 그 산은 얼핏 보면 무섭다. 산길은 표식도 없고 길은 닦이지 않아 욕심을 내면 길을 잃기 십상이다. 그 산은 좌절의 경험들이 몰려다니다 갑자기 비와 안개로 변해 시야를 흐려 놓기도 한다. 지난날의 아픔들이 울부짖으며 삭풍을 만들어 계곡을 휩쓸기도 한다. 어디선가 덫에 걸려 신음하는 들짐승처럼 나의 비명소리가 환청처럼 괴롭히고 산을 정복하려다가 쓰러진 나의 분신들이 나뒹구는 곳이다. 하지만 그것들은 그 산의 실체가 아니다. 그 산에는 태초의 생명 에너지가 숨을 쉬고 있다. 뭇 생명이 둥지를 틀고 뛰어 놀고 있다. 상처와 시련을 아물게 해주는 천연의 약초가 자생하고 있고 젊음을 되돌려주는 신비의 샘물이 솟아난다. 원하는 사람에게는 항상 안식과 희망을 주는 곳이다. 원하는 사람에게는!
나를 넘어선다는 것
자연을 자연으로 보지 못할 때 나는 길 위에서 길을 잃었다.
나를 ‘나’로 보지 못할 때 나는 삶 속에서 ‘삶’을 잃었다.
내 안에 ‘더 큰 나’를 만나지 못할 때 나는 길 위에서 그만 나뒹굴었다.
나를 넘어선다는 것!
그것은 ‘무의식’이라는 산을 발견하고 이해하고 가꾸며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것은 의식과 무의식을 넘나들며 심연 속에 묵혀 있던 생명 에너지를 끌어 올리는 것이다.
그것은 나라는 산과 당신이라는 산의 발밑으로 같은 맥이 흘러감을 느끼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큰 산맥의 각기 다른 봉우리들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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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고자 하는 열망을 버리는 만큼 정상의 문은 조금씩 열리기 시작했다. 대자연과 마주하고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게 고작 경건하고 또 경건한 마음을 지녀야 할 뿐이라는 사실을 나는 조금씩 터득해 나갔다. 히말라야가 정말로 신들의 영역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세상의 큰 신들이 히말라야의 저 높은 봉우리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믿기 시작한 것이다. 히말라야로 들어서면 나는 큰 신들을 향해서 한 없이 겸손해질 것을 맹세하며 머리를 조아렸다.
- 엄 홍길 著, <8,000미터의 희망과 고독>중에서-
* 지난주 저는 ‘아! 에베레스트’라는 특집 다큐멘터리를 인터넷으로 보았습니다. 8,750m의 높이에서 목숨을 걸고 이루어진 휴먼원정대의 시신 수습을 지켜보며 울고 또 울었습니다. 부디 고인들의 넋이 평생 좋아했던 산속에 머물러 산악인들의 길잡이가 되어주기를 기원해 봅니다.
IP *.98.168.115
그 산에 내가 있었네
문 요한 (변화경영 연구소 연구원, 정신과 전문의)
나는 나를 넘어섰을까?
1988년 초여름이었을까. 난 갑작스레 산에 가고 싶었다. 그 젊은 날! 산에 오른다는 의미는 단 하나였다. 나를 넘어서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산행은 산과 나의 총 없는 전쟁이었다. 정상을 딛고 서서 포효하는 것! 얼마나 시간을 단축하느냐는 것! 그런 것들만이 중요했다. 그것은 내가 나를 얼마만큼 넘어섰는지를 보여주는 확실한 표식이었다. 그런데 이런! 그날은 하필 손전등이 고장 났다. 그럼에도 나는 기록 욕심에 늦은 시간까지 산행을 고집하다가 그만 길을 잃어버렸다. 새벽까지 헤맸지만 결국 한치 앞도 벗어나지 못했다. 비까지 내렸다. 텐트를 펼칠 곳은 고사하고 비 피할 곳도 찾지 못했다. 나는 바위틈에 쪼그려 앉았다. 날짐승들의 울음소리가 어느 틈에 자장가로 들리면서 난 고꾸라져 잠이 들었다. 얼마나 잠들었을까. 누군가 내 몸을 흔들어 깨웠다. 묘령의 여인이 서 있었다. 난 그녀가 건네준 물과 알 수 없는 음식을 먹고서야 조금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이곳이 벽소령 근처라고 알려주었고 그만 내려가는 것이 좋을것 같다는 충고를 남긴 채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묘한 기분이었다. 난 그런데도 비몽사몽간에 천왕봉을 올라섰다.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기쁘기는커녕 순간 서러웠다. 완주는 했지만 몸과 마음이 만신창이가 된 느낌이었다. 그 산행을 통해 얻은 것이라고는 며칠동안 식지 않은 신열과 몸살뿐이었다.
또 하나의 산행
나는 최근동안 산을 오르지 못했다. 하지만 또 하나의 산을 오르고 있다. 그 산은 아직 높이조차 가늠할 수 없다. 구름에 가려 전체를 알 수 없다. 그 산을 나는 조심스럽게 오르고 있다. 아니, 오히려 즐기고 있다. 옛날처럼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신발 끈을 조여 매지는 안는다. 계곡물에 발을 담그고 찌든 마음을 빨아 바위위에 널어놓고 늘어지게 한 숨 자기도 한다. 산에서 나고 자라나는 것들이 무엇인지 길섶을 살펴본다. 다른 사람이 길을 잃지 않도록 나뭇가지에 깃을 달아놓기도 한다.
그 산은 ‘무의식’이라는 산이다. 그 산은 얼핏 보면 무섭다. 산길은 표식도 없고 길은 닦이지 않아 욕심을 내면 길을 잃기 십상이다. 그 산은 좌절의 경험들이 몰려다니다 갑자기 비와 안개로 변해 시야를 흐려 놓기도 한다. 지난날의 아픔들이 울부짖으며 삭풍을 만들어 계곡을 휩쓸기도 한다. 어디선가 덫에 걸려 신음하는 들짐승처럼 나의 비명소리가 환청처럼 괴롭히고 산을 정복하려다가 쓰러진 나의 분신들이 나뒹구는 곳이다. 하지만 그것들은 그 산의 실체가 아니다. 그 산에는 태초의 생명 에너지가 숨을 쉬고 있다. 뭇 생명이 둥지를 틀고 뛰어 놀고 있다. 상처와 시련을 아물게 해주는 천연의 약초가 자생하고 있고 젊음을 되돌려주는 신비의 샘물이 솟아난다. 원하는 사람에게는 항상 안식과 희망을 주는 곳이다. 원하는 사람에게는!
나를 넘어선다는 것
자연을 자연으로 보지 못할 때 나는 길 위에서 길을 잃었다.
나를 ‘나’로 보지 못할 때 나는 삶 속에서 ‘삶’을 잃었다.
내 안에 ‘더 큰 나’를 만나지 못할 때 나는 길 위에서 그만 나뒹굴었다.
나를 넘어선다는 것!
그것은 ‘무의식’이라는 산을 발견하고 이해하고 가꾸며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것은 의식과 무의식을 넘나들며 심연 속에 묵혀 있던 생명 에너지를 끌어 올리는 것이다.
그것은 나라는 산과 당신이라는 산의 발밑으로 같은 맥이 흘러감을 느끼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큰 산맥의 각기 다른 봉우리들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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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고자 하는 열망을 버리는 만큼 정상의 문은 조금씩 열리기 시작했다. 대자연과 마주하고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게 고작 경건하고 또 경건한 마음을 지녀야 할 뿐이라는 사실을 나는 조금씩 터득해 나갔다. 히말라야가 정말로 신들의 영역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세상의 큰 신들이 히말라야의 저 높은 봉우리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믿기 시작한 것이다. 히말라야로 들어서면 나는 큰 신들을 향해서 한 없이 겸손해질 것을 맹세하며 머리를 조아렸다.
- 엄 홍길 著, <8,000미터의 희망과 고독>중에서-
* 지난주 저는 ‘아! 에베레스트’라는 특집 다큐멘터리를 인터넷으로 보았습니다. 8,750m의 높이에서 목숨을 걸고 이루어진 휴먼원정대의 시신 수습을 지켜보며 울고 또 울었습니다. 부디 고인들의 넋이 평생 좋아했던 산속에 머물러 산악인들의 길잡이가 되어주기를 기원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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