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노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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阮堂評傳 - 완당은 어떻게 자신을 세계와 접속시켰나?
완당이 세계와 접속할 수 있었던 바탕에는 스승 박제가의 앞선 교류에 힘입은 바가 크다. 박제가는 연경에 세 차례나 다녀온 바 있으며 북학의北學議를 쓴 사람이다.
한·중 문화교류를 활짝 연 것은 1776년 담헌 홍대용의 연행 때부터이며, 북경 선무문안의 남천주당을 방문하거나 우연히 강남의 천재라고 불리던 엄성·반정균·육비등과의 교류로 그 물꼬를 텃다고 할 수 있겠다. 이후 정조시대의 활발한 청조문화와의 교류에 힘입어 박제가는 기윤, 나양봉, 조강 등과 교류하였으며, 제3차 연행시 중국학자들에게 추사라는 영민한 제가를 가르치고 있다고 소개해 두었고 완당은 그 중 조강(당시 29세)과 연경행에서 처음으로 세계와의 접속을 시작하였다.
조강을 통해 완당은 평생의 두 스승을 만나게 된다. 한 분은 담계 옹방강翁方綱이고 또 한분은 운대 완원阮元이다. 그 중 완원으로부터 완당阮堂이라는 아호를 얻었다.
완원은 청조문화를 완성하고 선양함에 절대적 공로자이자 당시 제일인자로 평을 받고 있었고, 옹방강은 당대의 금석학자이자 서예가이며 스스로 경학의 대가로 자부하는 연경학계의 원로였다.
완당은 완원으로부터 사원옥감, 연경실집, 13경 주소 교감기(245권), 황청경해 등을 선물로 받으면서 실사구시와 평실정상平實精詳의 자세로 학문을 닦고 경전을 연마하라는 가르침을 받았으며, 그리고 옹방강으로부터는 석묵서루에서 화도사비의 진본, 숭양첩의 진본, 소동파의 초상 3본 등을 직접 보거나 선물로 받아(진적·진본 배관拜觀) 이후 완당이 금석학과 고증학에 전념하는 큰 계기가 됐을 뿐만 아니라 그 학식의 정확한 토대가 되었다.
북경에서의 60일 동안 수많은 벗들과 친교를 맺고 완원·옹방강이라는 대학자를 만나 사제를 맺으며, 활짝 만개한 청조 고증학의 성과를 직접 보고 배우고 익혀 돌아온 완당은 많은 자극을 받았고 스스로의 학예에 새로운 의욕과 자신감을 얻었으며 무엇보다도 자신이 앞으로 추구할 학예의 길이 경학과 고증학과 금석학의 연찬에 있다는 확신을 세울 수 있었다.
이후 완당이 연경이라는 당시 세계와 끊임없이 지속된 자료와 편지를 주고받는 것으로 교류(접속)한다.
완당이 열어놓은 길로 수많은 학예인들이 직간접적인 완당의 소개와 추천으로 청나라 학자들과 교류하고 완당이 미처 만나지 못한 학자들을 만나며 그 교류의 폭과 깊이를 더해갔다.
자하 신위, 이재 권돈인, 동리 김경연, 황산 김유근, 운석 조인영, 운경 조용진, 육교 이조묵, 산천 김명희 등의 사대부를 포함하여, 우선 이상적, 추재 조수삼, 대산 오창렬, 소당 김석준, 역매 오경석 등의 연경에 갈 기회가 많은 역관譯官들은 완당의 애제자가 되어 완당이 연경학계와 계속 교류할 수 있도록 연결고리가 되어 주었다. 특히 이상적은 거의 절대적일만큼 완당의 다리가 되어 주었다.
또한 완당의 학예연찬은 연경학계와의 끊임없는 교류속에서 이루어졌다. 무수한 편지를 통해 의견이 교환되었고, 인편이 있을 때마다 책·서화작품·탁본·붓·먹·종이·선물 들이 오갔다. 이러한 교류는 완당 자신뿐만이 아니라 조선 지식인 사회 전체로 퍼져나갔으며 완당바람으로 불리어질 정도였다고 한다.
완당은 연경학계와 교류하며 청조 경학과 고증학과 금석학을 적극 받아 들였을 뿐만 아니라 조선의 옛 금석문을 연구하여 우리의 고증학을 발전시키며 토착화하여 그의 학문적 정체성도 확보하였다. 그 대표적인 예가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 고증이다.(예당금석과안록/진흥2비고) 또한 완당은 실사구시설實事求是設을 통해 학문의 가장 중요한 도리로 삼았다. 불과 이때 나이 31세(1816년) 때이며 이후 완당의 논論·설說·변辯에서 이 실사구시의 정신을 벗어나는 글은 하나도 없다고 할 정도이다.
** 여기서 말하는 실사구시는 “현실에 즉해서 참을 구한다”라는 조선 후기 실학자들에 의해 해석된 의미로 바라본 것이아니라 [사실에 의거하여 사물의 진리를 찾는다]라는 뜻으로 해석하였고 완당은 이 명제를 학문의 가장 중요한 도리로 삼았다고 한다.
완당을 중심으로 한 청조 경학經學·금석학金石學·고증학考證學의 교류가 낳은 대표적인 업적이 조선 땅에 한번도 와본 적이 없는 유희해가 펴낸 해동금석원海東金石苑이다.(전 8권) 이 책은 진흥왕 순수비, 평백제비, 봉덕사 에밀레종 명문, 무장사비 단편 등 우리나라 고비古碑·고종古鐘의 금석탁본 중 유명하고 오래된 것은 거의 다 망라한 기념비적 편찬이다.
또한 완당이 53세 되던 해(1838년) 해외묵연海外墨緣(청나라 학예에 대한 평가를 한 장문의 편지)을 통하여 고전적인 학설과 청나라 당대 학자들에 대한 견해, 그리고 그 견해에 대한 자신의 소견을 밝히는 등 여러 글들을 통하여 활발한 활동을 전개한 완당이 [청조학 연구의 일인자]라는 칭송이 빈말이 아니며 그가 단지 국제적인 사조에 휩싸여 그것을 받아들이는 데 급급한 사람이 아니라 완전히 소화하여 체화·육화·토착화시켰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완당은 한국성(koreanity)을 내재한 세계인이라 일컬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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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당이 세계와 접속할 수 있었던 바탕에는 스승 박제가의 앞선 교류에 힘입은 바가 크다. 박제가는 연경에 세 차례나 다녀온 바 있으며 북학의北學議를 쓴 사람이다.
한·중 문화교류를 활짝 연 것은 1776년 담헌 홍대용의 연행 때부터이며, 북경 선무문안의 남천주당을 방문하거나 우연히 강남의 천재라고 불리던 엄성·반정균·육비등과의 교류로 그 물꼬를 텃다고 할 수 있겠다. 이후 정조시대의 활발한 청조문화와의 교류에 힘입어 박제가는 기윤, 나양봉, 조강 등과 교류하였으며, 제3차 연행시 중국학자들에게 추사라는 영민한 제가를 가르치고 있다고 소개해 두었고 완당은 그 중 조강(당시 29세)과 연경행에서 처음으로 세계와의 접속을 시작하였다.
조강을 통해 완당은 평생의 두 스승을 만나게 된다. 한 분은 담계 옹방강翁方綱이고 또 한분은 운대 완원阮元이다. 그 중 완원으로부터 완당阮堂이라는 아호를 얻었다.
완원은 청조문화를 완성하고 선양함에 절대적 공로자이자 당시 제일인자로 평을 받고 있었고, 옹방강은 당대의 금석학자이자 서예가이며 스스로 경학의 대가로 자부하는 연경학계의 원로였다.
완당은 완원으로부터 사원옥감, 연경실집, 13경 주소 교감기(245권), 황청경해 등을 선물로 받으면서 실사구시와 평실정상平實精詳의 자세로 학문을 닦고 경전을 연마하라는 가르침을 받았으며, 그리고 옹방강으로부터는 석묵서루에서 화도사비의 진본, 숭양첩의 진본, 소동파의 초상 3본 등을 직접 보거나 선물로 받아(진적·진본 배관拜觀) 이후 완당이 금석학과 고증학에 전념하는 큰 계기가 됐을 뿐만 아니라 그 학식의 정확한 토대가 되었다.
북경에서의 60일 동안 수많은 벗들과 친교를 맺고 완원·옹방강이라는 대학자를 만나 사제를 맺으며, 활짝 만개한 청조 고증학의 성과를 직접 보고 배우고 익혀 돌아온 완당은 많은 자극을 받았고 스스로의 학예에 새로운 의욕과 자신감을 얻었으며 무엇보다도 자신이 앞으로 추구할 학예의 길이 경학과 고증학과 금석학의 연찬에 있다는 확신을 세울 수 있었다.
이후 완당이 연경이라는 당시 세계와 끊임없이 지속된 자료와 편지를 주고받는 것으로 교류(접속)한다.
완당이 열어놓은 길로 수많은 학예인들이 직간접적인 완당의 소개와 추천으로 청나라 학자들과 교류하고 완당이 미처 만나지 못한 학자들을 만나며 그 교류의 폭과 깊이를 더해갔다.
자하 신위, 이재 권돈인, 동리 김경연, 황산 김유근, 운석 조인영, 운경 조용진, 육교 이조묵, 산천 김명희 등의 사대부를 포함하여, 우선 이상적, 추재 조수삼, 대산 오창렬, 소당 김석준, 역매 오경석 등의 연경에 갈 기회가 많은 역관譯官들은 완당의 애제자가 되어 완당이 연경학계와 계속 교류할 수 있도록 연결고리가 되어 주었다. 특히 이상적은 거의 절대적일만큼 완당의 다리가 되어 주었다.
또한 완당의 학예연찬은 연경학계와의 끊임없는 교류속에서 이루어졌다. 무수한 편지를 통해 의견이 교환되었고, 인편이 있을 때마다 책·서화작품·탁본·붓·먹·종이·선물 들이 오갔다. 이러한 교류는 완당 자신뿐만이 아니라 조선 지식인 사회 전체로 퍼져나갔으며 완당바람으로 불리어질 정도였다고 한다.
완당은 연경학계와 교류하며 청조 경학과 고증학과 금석학을 적극 받아 들였을 뿐만 아니라 조선의 옛 금석문을 연구하여 우리의 고증학을 발전시키며 토착화하여 그의 학문적 정체성도 확보하였다. 그 대표적인 예가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 고증이다.(예당금석과안록/진흥2비고) 또한 완당은 실사구시설實事求是設을 통해 학문의 가장 중요한 도리로 삼았다. 불과 이때 나이 31세(1816년) 때이며 이후 완당의 논論·설說·변辯에서 이 실사구시의 정신을 벗어나는 글은 하나도 없다고 할 정도이다.
** 여기서 말하는 실사구시는 “현실에 즉해서 참을 구한다”라는 조선 후기 실학자들에 의해 해석된 의미로 바라본 것이아니라 [사실에 의거하여 사물의 진리를 찾는다]라는 뜻으로 해석하였고 완당은 이 명제를 학문의 가장 중요한 도리로 삼았다고 한다.
완당을 중심으로 한 청조 경학經學·금석학金石學·고증학考證學의 교류가 낳은 대표적인 업적이 조선 땅에 한번도 와본 적이 없는 유희해가 펴낸 해동금석원海東金石苑이다.(전 8권) 이 책은 진흥왕 순수비, 평백제비, 봉덕사 에밀레종 명문, 무장사비 단편 등 우리나라 고비古碑·고종古鐘의 금석탁본 중 유명하고 오래된 것은 거의 다 망라한 기념비적 편찬이다.
또한 완당이 53세 되던 해(1838년) 해외묵연海外墨緣(청나라 학예에 대한 평가를 한 장문의 편지)을 통하여 고전적인 학설과 청나라 당대 학자들에 대한 견해, 그리고 그 견해에 대한 자신의 소견을 밝히는 등 여러 글들을 통하여 활발한 활동을 전개한 완당이 [청조학 연구의 일인자]라는 칭송이 빈말이 아니며 그가 단지 국제적인 사조에 휩싸여 그것을 받아들이는 데 급급한 사람이 아니라 완전히 소화하여 체화·육화·토착화시켰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완당은 한국성(koreanity)을 내재한 세계인이라 일컬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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