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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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학 칼럼 17>
'지금 무엇을 위해 그렇게 바삐 갑니까?'
누가 만든 에티켓인지 모르겠지만 언제인가부터 바쁜 사람들을 위해서는 에스컬레이터의 왼쪽 공간을 비워두게 되어 있다. 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바쁜지 움직이는 계단의 좌측에는 늘 많은 사람들이 오르내린다. 몇 초의 시간을 위해서 누군가를 밀쳐내기도 한다. 그러다보면 노란 선을 조금이라도 벗어난 사람은 이웃이 아니라 나의 앞길을 가로막는 장애물로 보일지도 모른다. 만일 에스컬레이터에 위와 같이 적힌 플랑카드가 걸려있다고 해보자. 사람들의 반응이 어떨까? 내 생각으로는 별다른 주목을 끌지 못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보이는 눈앞의 세상(현실)을 외면하고 늘 다른 세상에 빠져 있으니까! 삶을 살면서도 우리는 위와 같은 물음을 불쑥 만난다. 애써 무시하기도 하지만 누군가는 이런 물음을 만나 에스컬레이터 우측에 서기도 하고 아예 넓은 계단을 이용하기도 한다. 정작 소중한 것은 지금이고 나를 둘러싼 세상인데 느끼지 못하는 시공간을 위해 매달리는 자신이 갑자기 허망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우리들의 자화상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비극은 무엇일까? 우리는 늘 여기(here)에 있으면서 저기(there)를 바라본다. 내가 발 딛고 있는 이 곳은 스산한 습지이지만 남이 서 있는 저 곳은 향긋한 초원이라고 느낀다. 그 차이(gap)만큼이나 자신을 괴롭히기도 하고 남에게 질투를 느끼고 또는, 그 불만을 변화의 원동력으로 승화시켜 내기도 한다. 하지만 그 차이가 클수록 변화의 위치 에너지가 커지는 것은 아니란 것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오히려 그 차이가 닿을 수 없는 아득함으로 여겨지면 깊은 체념에 빠지기도 하고 자기(self)가 분열되거나 붕괴되기까지 한다. 그럼, 우리가 할 일은 무엇인가? 바라는 그 곳을 내가 닿을 수 있는 지점까지 끌어내리면 되는 것일까?
우리는 왜 변화하려고 할까?
물론 여러 가지 대답이 있겠지만 공통적으로는 행복해지기 위해서이지 않을까? 그 행복이 나만의 행복이냐 공동체의 행복이냐가 큰 차이겠지만 말이다. 그런데 행복하려고 애쓰는 사람들이 정작 오늘은 그렇지 못하다. 미래의 그 곳에서만 행복감을 느끼려는지 오늘의 나는 즐겁지 못하다. 그들은 자신이 원하는 상태에 도달을 해야 비로소 행복할 수 있다는 강한 확신에 서 있다. 그것은 마치 ‘시장이 반찬’이기 때문에 배고픔을 참고 한없이 밥 먹기를 미루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곳에 있지 않는 오늘의 나에게는 ‘행복감’ 이나 ‘안도감’과 같은 느낌들은 사치라고 여기거나 방해꾼이라고 규정하고 숨통을 끊어 놓는다. 오늘은 단지 빛나는 내일을 위한 희생의 시간으로만 규정된다. 모든 가치는 ‘목표달성(성공)’이라는 절대적인 가치 앞에 종속된다. 그리고는 황량한 마음을 상투적 수법으로 달랜다. 목표를 달성한 미래 자신의 모습을 생생하게 상상하며 쾌감을 느끼는 강박적인 자위행위에 몰두하고 만다.
우리를 기쁘게 하는 것들
진정한 변화는 삶의 미세한 정서의 결들을 일으켜 세워 긍정적 감정들로 충만하게 한다.
열대야가 그치고 열린 창문으로 스며드는 새벽기운의 서늘함, 평안하게 잠든 아이의 가느다란 숨소리, 문득 바라본 신록의 아름다움, 우산을 쓴 나를 만나려고 사선으로 달려드는 빗방울의 몸짓, 출근길에 가끔 마주치는 귀여운 여고생... 이런 사소한 것들이 때로는 삶을 기쁘게 한다.
변화의 여정은 그 자체가 행복이어야 한다. 미세한 감정의 떨림, 작은 성공의 결실, 나로부터 퍼져가는 작은 영향력의 동심원 등을 느끼면서 나아가는 것이다. 변화는 현재의 위치를 경시하고 보다 높은 곳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위치를 감사하며 보다 높은 곳을 지향하는 삶이다. 변화하는 자는 기약할 수 없는 내일의 아름다움을 꿈꾸는 사람이 아니라 오늘의 아름다움을 만끽하는 사람이다. 삶의 여정속의 잔재미를 느끼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미래의 자신으로 나아가는 에너지원이 된다.
잊지 말아야 할 삶의 물음들
‘나는 지금 행복을 위해서 또 다른 행복을 포기하는 것은 아닐까?’ ‘나의 행복이 누군가의 불행을 담보로 하는 것은 아닐까?’ ‘나의 변화의 몸짓으로 주위가 밝아지는가?’ ‘나는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가?’ 너무나 상투적인 물음들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 물음 앞에 갇혀서도 안 되지만 도망가서는 안 된다.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순간은 오로지 ‘지금’ 밖에 없다. ‘지금’이라는 이 시간은 어떤 것과도 바꿀 수가 없고 또한 대신 할 수 없다. ‘변화된 자신’으로서가 아니라 ‘지금의 자신’을 수용하고 사랑하라.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진정 취해야 할 변화의 실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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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레바퀴가 땅에 닿는 그 순간
문 요한 (변화경영 연구소 연구원, 정신과 전문의)
'지금 무엇을 위해 그렇게 바삐 갑니까?'
누가 만든 에티켓인지 모르겠지만 언제인가부터 바쁜 사람들을 위해서는 에스컬레이터의 왼쪽 공간을 비워두게 되어 있다. 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바쁜지 움직이는 계단의 좌측에는 늘 많은 사람들이 오르내린다. 몇 초의 시간을 위해서 누군가를 밀쳐내기도 한다. 그러다보면 노란 선을 조금이라도 벗어난 사람은 이웃이 아니라 나의 앞길을 가로막는 장애물로 보일지도 모른다. 만일 에스컬레이터에 위와 같이 적힌 플랑카드가 걸려있다고 해보자. 사람들의 반응이 어떨까? 내 생각으로는 별다른 주목을 끌지 못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보이는 눈앞의 세상(현실)을 외면하고 늘 다른 세상에 빠져 있으니까! 삶을 살면서도 우리는 위와 같은 물음을 불쑥 만난다. 애써 무시하기도 하지만 누군가는 이런 물음을 만나 에스컬레이터 우측에 서기도 하고 아예 넓은 계단을 이용하기도 한다. 정작 소중한 것은 지금이고 나를 둘러싼 세상인데 느끼지 못하는 시공간을 위해 매달리는 자신이 갑자기 허망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우리들의 자화상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비극은 무엇일까? 우리는 늘 여기(here)에 있으면서 저기(there)를 바라본다. 내가 발 딛고 있는 이 곳은 스산한 습지이지만 남이 서 있는 저 곳은 향긋한 초원이라고 느낀다. 그 차이(gap)만큼이나 자신을 괴롭히기도 하고 남에게 질투를 느끼고 또는, 그 불만을 변화의 원동력으로 승화시켜 내기도 한다. 하지만 그 차이가 클수록 변화의 위치 에너지가 커지는 것은 아니란 것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오히려 그 차이가 닿을 수 없는 아득함으로 여겨지면 깊은 체념에 빠지기도 하고 자기(self)가 분열되거나 붕괴되기까지 한다. 그럼, 우리가 할 일은 무엇인가? 바라는 그 곳을 내가 닿을 수 있는 지점까지 끌어내리면 되는 것일까?
우리는 왜 변화하려고 할까?
물론 여러 가지 대답이 있겠지만 공통적으로는 행복해지기 위해서이지 않을까? 그 행복이 나만의 행복이냐 공동체의 행복이냐가 큰 차이겠지만 말이다. 그런데 행복하려고 애쓰는 사람들이 정작 오늘은 그렇지 못하다. 미래의 그 곳에서만 행복감을 느끼려는지 오늘의 나는 즐겁지 못하다. 그들은 자신이 원하는 상태에 도달을 해야 비로소 행복할 수 있다는 강한 확신에 서 있다. 그것은 마치 ‘시장이 반찬’이기 때문에 배고픔을 참고 한없이 밥 먹기를 미루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곳에 있지 않는 오늘의 나에게는 ‘행복감’ 이나 ‘안도감’과 같은 느낌들은 사치라고 여기거나 방해꾼이라고 규정하고 숨통을 끊어 놓는다. 오늘은 단지 빛나는 내일을 위한 희생의 시간으로만 규정된다. 모든 가치는 ‘목표달성(성공)’이라는 절대적인 가치 앞에 종속된다. 그리고는 황량한 마음을 상투적 수법으로 달랜다. 목표를 달성한 미래 자신의 모습을 생생하게 상상하며 쾌감을 느끼는 강박적인 자위행위에 몰두하고 만다.
우리를 기쁘게 하는 것들
진정한 변화는 삶의 미세한 정서의 결들을 일으켜 세워 긍정적 감정들로 충만하게 한다.
열대야가 그치고 열린 창문으로 스며드는 새벽기운의 서늘함, 평안하게 잠든 아이의 가느다란 숨소리, 문득 바라본 신록의 아름다움, 우산을 쓴 나를 만나려고 사선으로 달려드는 빗방울의 몸짓, 출근길에 가끔 마주치는 귀여운 여고생... 이런 사소한 것들이 때로는 삶을 기쁘게 한다.
변화의 여정은 그 자체가 행복이어야 한다. 미세한 감정의 떨림, 작은 성공의 결실, 나로부터 퍼져가는 작은 영향력의 동심원 등을 느끼면서 나아가는 것이다. 변화는 현재의 위치를 경시하고 보다 높은 곳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위치를 감사하며 보다 높은 곳을 지향하는 삶이다. 변화하는 자는 기약할 수 없는 내일의 아름다움을 꿈꾸는 사람이 아니라 오늘의 아름다움을 만끽하는 사람이다. 삶의 여정속의 잔재미를 느끼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미래의 자신으로 나아가는 에너지원이 된다.
잊지 말아야 할 삶의 물음들
‘나는 지금 행복을 위해서 또 다른 행복을 포기하는 것은 아닐까?’ ‘나의 행복이 누군가의 불행을 담보로 하는 것은 아닐까?’ ‘나의 변화의 몸짓으로 주위가 밝아지는가?’ ‘나는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가?’ 너무나 상투적인 물음들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 물음 앞에 갇혀서도 안 되지만 도망가서는 안 된다.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순간은 오로지 ‘지금’ 밖에 없다. ‘지금’이라는 이 시간은 어떤 것과도 바꿀 수가 없고 또한 대신 할 수 없다. ‘변화된 자신’으로서가 아니라 ‘지금의 자신’을 수용하고 사랑하라.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진정 취해야 할 변화의 실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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