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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미영
  • 조회 수 1998
  • 댓글 수 3
  • 추천 수 0
2005년 12월 12일 13시 14분 등록
내가 첫아이를 낳던 봄날, 나의 엄마는 남편의 엄마에게 죄송하다는 인사를 건넸었다.
주변의 반응도 축하의 분위기보다는 ‘남동생 보게 생겼네’가 대부분이었다.
나는 조금 억울하다는 생각을 하긴 했지만 화를 내진 못했었다.
언제나처럼 그냥 조용히 웃으면서 참고 넘어갔었다.
그리고는 뒤돌아서서 ‘정말로 다음엔 아들을 꼭! 낳아야겠다’고 굳게 다짐을 했었다.

2년 뒤 그 뜨겁던 중복 날, 나는 둘째를 만났고 내 엄마의 고개는 더 숙여져 있었다.
그 당시 우스갯소리로 떠돌던 말 중에는 딸 낳고 아들 낳으면 200점, 아들 낳고 딸 낳으면 100점, 아들만 둘이면 50점, 딸만 둘이면 0점이라는 이야기가 있었다.
나는 어느 날 갑자기 빵점짜리 시험지를 손에 들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조금씩 화가 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내 주변엔 아들 낳기 위해 딸을 다섯이나 낳은 엄마와, 그 딸들과, 거기서 별반 다르지 않은 사람들뿐이었다.
그 공기는 참담했다.

나는 찍소리도 못하고 ‘셋째 낳으면 되지’란 말을 인사처럼 듣게 되었다. 꽤 오랫동안.
어여쁜 딸들에게 눈물 나게 미안했다. 왜냐하면 나조차도 그 공기에서 자유롭지 못했기 때문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건강한 두 아이는 씩씩하게 자라주었고 더불어 나도 자랐다.
참으로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높아진 눈높이로 바라본 세상에는 듣도 보도 못했던 온갖 기쁨들이 널려있었다.
나는 아직 어린 두 아이의 손을 잡고 그곳을 찾아다녔고 그 새로운 공기는 나를 더욱 자라게 했다.

2000년 봄, 여성신문사 주최 ‘신주부아카데미’를 수강한 일은 나의 첫 발걸음이었다.
지금은 걸스카우트 연맹에 계신 육정희 선생님과 ‘줌마네’ 대표로 계신 이숙경 선생님을 만난 것은 내 행운의 시작이었다.
나는 여성들의 연대에 참여하게 되면서 가슴으로 눈물을 흘렸고 뜨겁게 알을 깨고 나올 수 있었다.
인터넷을 통해 걸음마를 배우기 시작했고 여성학자 오한숙희 선생님의 여성학 수업을 통해서 나는 비로소 걷는 법을 익히게 되었다.
그 길에서 만난 고마운 인연들은 내 행운의 상징이 되었다.

그 사이에 아이들도 나와 함께 무럭무럭 자랐다.
서로의 손을 놓고도 각자 걸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래서 나는 또 감사히 걸어갔다. 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로!

어쩌면 나는 내가 자란 환경과는 참 다른 길을 걸어왔다.
물론 또 걸어갈 것이다.
내 안의 나를 따라서..간절히..두려움 없이..그 어느 곳이라도 말이다.


IP *.210.111.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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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진
2005.12.12 22:57:37 *.118.67.206
내 안의 나를 따라서... 간절히...두려움 없이..그 어느 곳이라도

그렇게 갈 수 있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내 삶은 나의 지난 날의 결정의 결과들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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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병곤
2005.12.14 00:20:34 *.51.68.82
0점짜리 아빠 한마디 합니다.
저 역시 미영님처럼 아이들이 너무 귀엽고 소중합니다.
아들이 더 낫다는 그런 편견, 그런 관습이 옳은 것인지. 그리고 그게 왜 중요한건지,,
아들이건 딸이건 부모와의 커뮤니케이션이 더 중요한지 아는지 모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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벗이자 동생
2005.12.15 11:48:55 *.120.97.46
다 쓴 거 맞아?
다 털어낸 것 맞아?
뭔가 빠진 것 같은데!
절실하게 쓴 것 맞아?

아니면 누나 혼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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