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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명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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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3월 6일 21시 24분 등록
지극히 간단한 고양이 캐릭터가 있다. 누구라도 그릴 수 있음직한 고양이 캐릭터 하나로 자기 세계를 구축한 일러스트레이터가 있다. 그 고양이의 이름은 Snowcat이고 창조주의 이름은 권윤주이다. Snowcat은 단순한 선에 갇힌 무표정이 압권이다. 그러나 그 가녀린 몸매로 못하는 일이 없다. 의구심과 쓸쓸함의 표현, 엎드려 잠자기, 종종 걸음치기, 스카프를 휘날리며 표표히 사라지는 뒷모습은 짠하기까지 하다.

권윤주는 지금 뉴욕에 가 있다. 1997년에 이 캐릭터를 창조하여 다음해에 홈페이지를 개설한 후 요즘 조회 수가 수만이 넘는 것을 보면 탄탄한 독자층이 형성된 것같다.
전에는 다이어리 형식의 한 컷짜리 만화를 올리더니, 요즘엔 뉴욕 생활의 단면을 컷이나 사진으로 올리는데 사소하고 사소한 일상이라는 점에서는 똑같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스크림 가면이 걸려있는 공원풍경이나 텅 빈 지하철 풍경, 마음에 드는 찻집이나 서점, 요리했거나 사 먹은 음식 사진들이다. 그 중에서 내가 박장대소한 것은 베이글을 먹고난 뒤, 맛있기는 한데 베이글에서 떨어지는 검은 깨가 귀찮았다며, 한 개의 베이글에서 떨어진 검은 깨 전부를 찍어 올려놓은 사진이었다. 대단한 예술이 아니라 개인의 일상이 작품의 소재가 되는 것이 흥미롭다.


권윤주는 홍익대 시각디자인과를 졸업한 30대초의 여성으로 보여진다. 철저하게 자신을 은폐하여 무책임한 대중의 시선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였다. 사실을 확인할수는 없지만 출판사와도 이메일을 통해서만 접촉한다는 이야기도 있다. 나는 그녀가 인기를 얻은 이유를 곰곰 생각해 보았다. 첫째 개인주의이다. 그니는 사람과 어울리는 것을 포함해서 여타 생존에 필요한 일들을 일절 하기 싫어하는 귀차니즘의 신봉자이다. 자기가 하고 싶어하는 딱 한 가지 일인 일러스트를 빼고는 세상에 대해 참견하는 것도 참견받는 것도 싫은 개인주의자이다.
둘째 그니의 작품세계는 일상이다. 사회와 역사같은 구세대적인 이념은 물론 희망이나 도덕같은 어떤 덕목도 강요하지 않는다. 나 자신의 하루를 꾸려나가는 것 외에는 그 어느 것에 대해서도 부담이 없다. 세째 그니의 작품세계는 독특하고 이국적이다. 약간 삐뚤고 정형화되지 않은 필체조차 Snowcat과 어울린다. 피규어라고 부르기도 무엇한 조그만 레고인형 스무 개를 뉴욕까지 가지고 갔다. 그리고는 눈 위에서 그 인형을 가지고 10컷짜리 초미니 영화를 찍어 올렸다. 눈이 녹기 전에 급조해서 만드느라 힘들었다는 후기와 함께. 가히 ‘혼자놀기’의 진수를 보여준다. 혼자 놀기는 아무나 하나? 구선생님 말씀처럼 자기 안에 데리고 놀만한 세계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고 권윤주의 ‘혼자놀기’를 수만 명의 팬이 ‘훔쳐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특징들이 젊은 세대의 감수성을 휘어잡은 것같다. 파리에서 4개월을 체류한 후에 ‘Snowcat in Paris'를 출간했으며, 지금 뉴욕에서 장기간 머물며 그곳의 풍경을 그리는 것도 신세대의 이국적 취향을 만족시키기에 그만이다.

끝으로 그니의 고양이에 대해 이야기해야겠다. 권윤주의 고양이 냐옹은 정말 아름답다. 머리에는 세로로, 두 볼에는 뺨을 따라서 둥글게, 상반신에는 나이테처럼 둥글게 무늬지어진 기품있는 털과 총명한 얼굴, 고즈넉이 창밖을 바라보는 모습 그리고 냐옹의 순간순간을 잡아내는 권윤주의 시선은 냐옹이 친구요 가족이요 철학자인 것을 보여준다. 고양이가 누구인가? 게으르면서도 탐미적인 몸짓과 ‘혼자 놀기’의 진수를 아는 영물이다. 그대로 권윤주의 분신이자, 권윤주에게 접속하는 사람들의 분신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처음 권윤주에게 접속하기 시작한 것은 자신의 개인적인 성향을 생업과 연결시킨 독특한 생활방식 때문이었다. 나역시 주5일 근무와 상담전화가 심히 부담스러운 내향성의 귀차니스트로서 부러웠던 것이다. 그러다가 구선생님의 저서에서 ‘내향적인 사람은 식물적인 유인방법을 써야 한다’는 글귀를 읽었다. 권윤주는 본능적으로 식물적인 유인방법을 차용해서 성공한 케이스로 보여진다. 이번에는 제러미 리프킨의 ‘소유의 종말’을 읽었다. 방대한 자료를 사용하여 소유의 시대가 가고 접속의 시대가 왔음을 주술적으로 반복하는 대단한 저술이었다. 산업시대를 살았던 부모와 조부모 세대의 부르주아 인간형과는 ‘종자부터’ 완전히 다른 새로운 인간형이 탄생하고 있다는 대목에서는 전율이 왔다. 신인류의 탄생이 아닐 수 없다. 창조적이고 찰나적이며 유연하고 순간적인 삶을 추구하고 글자보다 이미지로 생각하는 신인류의 흐름에 도도하게 떠 있는 권윤주가 보였다. 나는 아직도 나의 특성을 생업과 연결시키지 못하고 불안과 불만 속에서 또 하루를 보냈는데, 실로 부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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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로사랑
2006.03.07 07:38:11 *.118.67.206
참 좋은 글입니다.
차분하고 섬세하며 책과 연결하는 것까지 깊은 내공을 느끼게 하는군요.
좋은 글로 자주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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