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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재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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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4월 10일 21시 41분 등록
제 1 요일

작년 이맘때가 생각난다.
변화경영연구소 1기 연구원을 뽑는다는 문구를 홈페이지를 통해 보았다. 나 자신의 이야기를 써야 하는데, 이미 미국에 있는 경영대학원을 지원했을 때의 내용과 흡사해 어느 정도 정리는 되어있었다. 문제는 우리 정서에 어떻게 하면 잘 읽힐 수 있도록 나 자신을 ‘한국어’로 쓰는 것이었다.

아직도 매주 토요일에 있는 간부회의 도중에 써야 할 내용을 만지작거리면서 회의에 들어갔던 것을 기억한다. 임원들이 넘실대는 그 살벌한 회의 중에 온통 나의 머릿속은 어떻게 하면 나를 잘 표현 할 수 있을까,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그리고 한번에 몰아쳐서 써야 겠다는 생각을 했을 무렵, 데레사 할머님의 부고소식을 듣게 되었다. 나에 대해서 생각했던 나의 머리속은 거짓말처럼 새하얗게 변했고, 대신 데레사 할머니에 대한 그리움으로 가득찼다. 나는 나 자신에 대한 생각을 까맣게 잊어버렸다.

제 2 요일

거짓말처럼 올해도 공고가 났다.

작년에 눈물로 보냈던 데레사 할머니가 제일 먼저 떠올랐다. 그 동안 많은 변화가 생겼다.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되었으며, 회사에서는 마케팅부로 옮겼으며, 박사과정의 학생까지 되었다.

그래. 다시한번 해 보는 거야, 하고 나 자신에 대해서 쓰기 시작했다.
자신이 없었다. 몇 몇의 이야기는 너무 진부했다. 시간이 부족했다. 저녁때만 되면 울기 시작하는 아이를 달래면서도 아이가 잠들면 당장 컴퓨터 앞에 다시 다가가 모니터를 켰다.

마지막 날, 나는 그만 포기해 버렸다. 나 자신이 드러나 보이지 않았다. 원고를 다시 보았을 때, 나는 그만 울고 싶어졌다. 데레사 할머니의 얼굴이 그 눈물속에 넘실댔다.

그래.. 이번에는 그냥 맛보기로 넣어보는 거야.

제 3 요일

책을 읽는다.

직장과 학업, 그리고 예비 연구원 과정을 다 하기 위해선 출,퇴근 시간과 점심시간을 이용하는 수 밖에 없다.

몇 주 째 차고에서는 차가 잠들고 있다.
어제 시동을 걸었을 때, 시동이 걸리질 않았다. 배터리가 방전 된 것이다. 너무 오랫동안 방치해 놓은 까닭이다.

점심시간에는 혼자 카페에 가서 샌드위치와 커피를 먹으며 책을 읽는 버릇이 들었다. 우리 회사에서는 점심시간이 중요한 커뮤니케이션의 수단이다. 다른 사람의 험담과 칭찬, 그리고 중요한 정책들이 비공식적으로 이루어진다.

나는 이 책을 읽.어. 버.려.야.한.다.

어제 회의에서는 일본 프로젝트건이 심도있게 논의되었다. 나는 회의 내용을 다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다 끄덕거리면서 회의에 열정적으로 임했다. 후에 조용히 옆에 있는 김부장에게 물어본다.
‘아- 그건 어제 점심시간에 이야기 된 사항이에요.’

혼자 먹는 샌드위치가 이젠 제법 익숙하다.
더 이상 커피가게 집 주인의 눈치를 더 이상 살피지 않고 책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오늘도 월요일까지 제출해야 하는 책에 줄을 벅벅 긁어댄다. 이 대목에선 별표를 그려넣는다. 별표는 제출해야 할 내용에 포함되어야 할 중요한 대목을 뜻한다.

그래, 내 자신의 발전을 위해서는 차라리 성질 더러운 왕따가 되자.

제 4 요일

-5시
자명종이 울린다.
그날의 기분에 따라 자명종 소리가 광시곡일 때가 있고, 자장가일때가 있다.
일어나 책상 앞에 있는 모닝페이지장을 편다.
그냥 손 가는대로, 어떤 때는 꿈 이야기를 쓸 때도 있다. 오늘은 ‘천리마운동’, ‘새벽별 보기 운동’, 과 같은 전투적이고 원색적인 표어를 쓸 때도 있다. 중요한 것은 그저 손 가는 대로 쓰는 것이다.

-5시40분
하루는 요가 클래스를 들으러 가고 하루는 새벽미사를 간다.
나의 계획서에 보면 둘다 ‘영적행위’로 규정되어있다.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는 요가를 하면서 내가 늘 잊고 있었던 호흡의 중요성을 다시한번 깨닫기 시작한다.

-7시
아침을 간단하게 먹고는 출근을 한다.
출근 가방에는 월요일까지 읽어야 하는 책이 담겨있다. 이런 속도로 나가면 아무래도 월요일 자정이 다 되어서야 제출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는 생각을 한다.

-10시
월요일은 특히 수업이 있는 날이라 아침 영업부 교육자료만 세팅하고 바로 학교로 향한다. 학교로 향하는 지하철에서도 책을 읽고있다. 어느새 슬며시 밀려드는 졸음에 나 자신을 빼앗기기도 하지만-.

-4시
수업을 마치고 다시 직장으로 향한다.
내일까지 인터넷으로 제출해야 하는 숙제가 있지만, 오늘 저녁에 올려야 하는 이 책 때문에 숙제는 잠시 미뤄두기로 한다.

-8시
월요일이라 잔뜩 밀려있는 전화들에 답변을 주고, 이메일을 체크하고, 간단한 보고서 등을 작성한다.
그리고 ‘변화경영연구소’ 홈페이지를 들어간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글을 올렸는가, 본다.
‘아- 오늘도 내가 꼴찌로 올리겠구나-‘

-10시
시간은 왜 이리 빨리 가는지 모르겠다.
집에서 전화가 온다. 오빠, 언제와? 어- 금방 갈께.

-11시
서둘러서 자리를 정돈하고 직장을 나선다.
피곤함이 몰려와 택시를 잡는다. 택시 안에서 들려오는 음악이 향긋하게 들린다.
아- 이번주도 무사히 올리는 구나-.

제 5 요일

먼저 칼럼을 한편씩 올려야 하는 일 때문에 주위의 글감이 될 만한 것들에 주의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이번 주는 이런 글을 써볼까, 일단 주제가 잡히면 인터넷을 통해, 그리고 수업이 있는 날이면 수업 후 도서관에서 그에 관련된 주제들을 찾는다. 무언가를 써야 한다는 중압감도 있지만, 세 번째 이후로는 편안하게 쓰기로 한다. 글을 쓰는 시간도 비교적 비슷하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책에 대한 글을 쓴다는 것은 아무래도 나에게 남겨진 커다란 숙제이다. 일주일에 한 권씩 읽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혹시 그 문맥을 다 이해하지 못한 채 시간에 쫒겨 양적으로만 써대는 것은 아닌지- 라는 생각이 든다. 책을 두 세 번 읽고 내 것으로 완전히 소화 한 후 글을 썼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이내 이 리듬감이 깨지면 그것도 적지않은 파장을 일으킬 것이라는 생각으로 바뀐다.

제 6 요일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일하고, 토요일 오전에 있는 회의에 참석하고, 일주일에 두번씩 학생으로 탈바꿈하고, 주말에는 소영이에게 동화책을 읽어주며, 월요일 저녁때 부랴부랴 글을 마무리해서 올리고 화요일 오전에 다른 연구원들의 글을 보는 생활은 당분간 지속될 것이다.

중간중간에 두 달에 한번 꼴로 해외출장이 계획되어있으며, 일주일에 한번 정도씩 있을 크고 작은 회식, 그리고 봄 가을에 집중적으로 있을 학회 씨즌을 견디어내면서도 나는 칼럼 한 개, 책 한 권을 지속할 예정이다.

내 자신이 채워야 할 것이 많다는 것을 인정하는 과정이 될 것을 믿지만, 내 자신이 생산해 낸 것들에 대해서는 애착을 가지고 당당함으로 임할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생산해 낸 작품들을 읽어냄으로써 내 자신의 한계를 당당히 인정할 것이다.

제 7 요일

한 권의 책을 저술한 나를 상상해본다.

인문학과 경영학이 만난 아주 재미있는 책이 될 것이다. 특히 문화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책을 저술하고 싶다. 내가 직장생활을 하지 않았으면 무엇을 했을까, 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나는 내가 그린 그림이 전시되어있는 화랑에서 직접 첼로를 연주하는 모습을 상상한다. 그리고 연주 후에는 내가 쓴 단편소설집을 관람한 모든 청중들에게 나누어주는 상상을 한다.

이제 그런 상상 위에 경영의 이미지를 한번 더 덧붙인다. ‘조직’과 ‘전략’이라는 양대 산맥 사이로 ‘인문학’이라는 거대한 강이 흐르고, 그 강 위로는 ‘문화’라는 아름다운 다리가 놓여있는 풍경을 그린다. 그 풍경을 그대로 바람도 불고, 햇살도 비칠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추억이 가득 담긴 한편의 흑백사진으로 존재하게 되겠지만, 사람들의 가슴에 다이아몬드와 같이 반짝이는 한편의 그림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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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한자식
2006.04.11 05:19:45 *.229.28.221
글을 읽자니, 정재엽님을 한번 뵙고 싶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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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로사랑
2006.04.11 20:05:00 *.118.67.206
제 8요일이 기대됩니다.
월화수목금토일팔요일이 되는건가요?
아주 열심인 재엽님이 그려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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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요한
2006.04.11 22:05:24 *.253.83.76
연구원 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그런데, 제 8요일이 쉬는 날인가요?
와! 바쁘다는 말만으로는 부족할 듯 싶네요.

깊은 물에 큰 배가 뜬다고 그랬던가요?
큰 비전이 잘 떠갈 수 있는 깊은 에너지의 흐름이 이어지길 바라겠습니다.

제 7요일에 저도 그 다리위에서 첼로의 선율을 듣고 싶네요.
건승을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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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경
2006.04.11 23:29:29 *.73.132.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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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


와.

놀랍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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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승
2006.04.12 00:34:15 *.44.152.193
재엽님이 그린 그림을 바라보며
재엽님이 연주하는 첼로의 선율을 듣고 있는 것 같네요.
뭐든지 열심히! 라는 '뭐든지' 시대정신이
청소년기를 지배하던 시기가 있었는데
재엽님을 보니 '뭐든지' 시대로 돌아 온 느낌이네요.
앞으로 많이 보고 배울께요...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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