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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명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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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5월 20일 22시 20분 등록


시인 이면우의 詩 중에 TV프로그램 <동물의 왕국>에 대해 쓴 것이 있다. 이면우는 51년생 현직 보일러공으로서 독학으로 시를 공부하여, 아름다운 서정성과 깊이있는 사유에 도달한 좋은 시를 쓰고 있다. 지하 보일러실에서 그가 나꾸어채는 싯귀에서는, 몸을 쓰는 사람 특유의 강인함과 의연함에 도통함이 더해져 숙연한 느낌마저 든다.

밥, 돼지고기, 공납금이 다 보일러 불길에서 나왔다고, 녹차의 쓸쓸함도 따라나오고, 가족의 웃음, 눈물이 보일러 불길 속에 함께 타올랐다고, 때가 되면 육신을 들어 너-불길에게 바칠테니 아직은 나와 가족을 지켜다오, 하는 그의 詩 한 편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동물의 왕국 중독증

TV 모니터 속에서 사자가 사슴을 먹고 있다
바로 직전까지 도망치는 사슴을 사자가 쫓아다녔다
나는 사슴이 사자 속으로 벌겋게 들어가는 걸 본다
아니 저런, 꼭 제집 대문 들어가듯 하네 입이 문이면
송곳니는 어서 들어가자고 등 떠미는 다정한 손
아니지 지금 사슴이 사자로 변하는 중이잖아
서로 꽉 붙들렸으니 영락없는 한몸뚱어리지
그렇게 한 순간 죽음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돌연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핏빛
--- 중략 ---

고전학자 고미숙도 <동물의 왕국> 매니아이다. 그녀의 성찰은 조금 어렵다. 정리를 해 보자면 다음과 같다.

<동물의 왕국>의 숨은 주인공은 인간이다. 모든 야생동물의 서식지를 무자비하게 빼앗고, 마침내 죽음의 벼랑 끝으로 내모는 저승사자, 인간이다. 이 때의 인간이란 인간 일반이 아니라, 서구문명의 도래와 함께 출현한 근대인이다. 만오천 년 간 지속되어 온 인디언과 버팔로 사이의 공존의 사슬을 무자비하게 끊어버린 미국 문명이 잘 보여주고 있듯이, 문명의 발전이란 곧 야생동물의 멸종의 역사인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근대적 지식의 배치와도 깊은 연관이 있다. 인간이라는 개념은 근대의 탄생물이며, 인간이 탄생하는 순간 동물은 단지 동물원을 통해서만 존재할 수 있게 되었다.
인간의 동물에 대한 완벽한 지배는 제국주의와 식민지, 서구와 동양, 백인과 원주민 사이의 관계로 변주된다. 고미숙 “아무도 기획하지 않는 자유” 233쪽

고미숙은 친절하게 <동물의 왕국>의 방영시간 - 일요일 오후 5시 15분 -까지 알려주고 있다.

그런데 오늘, 조용헌의 “고수기행”을 읽다가 <동물의 왕국>을 또 발견했다. 미국 태권도의 대부 이준구가 원숭이상이라는 이야기를 하는 중이었다. 관상보는 법 중 하나로 물형법<物形法>이 있는데 동물의 형태로 환원시켜 보는 관상법이라고 한다. 조물주가 볼 때 인간이나 동물이나 같은 피조물이니까, 서로 호환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문제는 어떤 사람의 얼굴을 보고 동물로 바로 환치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느냐인데, 물형법의 대가 한 사람이 주장하기를 <동물의 왕국>을 보면서 동물들의 행태와 특성을 관찰하다 보면, 어느 시점에 사람들의 행태가 동물들의 행태에 겹치는 순간이 온다는 것이다. 오버랩이 되면 그 때가 물리物理가 터지는 순간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말<馬> 관상은 말처럼 지칠 줄 모르는 체력과 추진력을 지닌 한편, 자중해야 할 상황에서 가만히 앉아 있지를 못하고 요동을 치다가 일을 그르치거나 함정에 빠진다고 하니, 재미있는 관점이다. 조용헌, “고수기행” 246쪽

너무 TV를 안봐서 유선방송비가 아까울 정도였는데 아무래도 <동물의 왕국>을 봐야할까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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