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미 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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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뚜막에 쪼그려 수제비 뜨는 나어린
처녀의 외간 남자가 되어*
김사인
부뚜막에 쪼그려 수제비 뜨는 나어린 그 처자
발그라니 언 손에 얹혀
나 인생 탕진해버리고 말겠네
오갈 데 없는 그 처자
혼자 잉잉 울 뿐 도망도 못 가지
그 처자 볕에 그을어 행색 초라하지만
가슴과 허벅지는 소젖보다 희리
그 몸에 엎으러져 개개 풀린 늦잠을 자고
더부룩한 수염발로 눈꼽을 떼며
날만 새면 나 주막 골방 노름판으로 쫓아가겠네
남는 잔이나 기웃거리다
중늙은 주모에게 실없는 농도 붙여보다가
취하면 뒷전에 고꾸라져 또 하루를 보내고
나 갈라네, 아무도 안 듣는 인사 허공에 던지고
허청허청 별빛 지고 돌아오겠네
그렇게 한두 십년 놓아 보내고
맥없이 그 처자 몸에 아이나 서넛 슬어놓겠네
슬어놓고 나 무능하겠네
젊은 그 여자
혼자 잉잉거릴 뿐 갈 곳도 없지
아이들은 오소리 새끼처럼 천하게 자라고
굴 속같이 어두운 토방에 팔 괴고 누워
나 부연 들창 틈서리 푸설거리는 마른 눈이나 내다보겠네
쓴 담배나 뻑뻑 빨면서 또 한 세월 보내겠네
그 여자 허리 굵어지고 울음조차 잦아들고
두 눈에 파랗게 불이 올 때쯤
나 덜컥 몹쓸 병 들어 시렁 밑에 자리 보겠네
말리는 술도 숨겨놓고 질기게 마시겠네
몇 해고 애를 먹어 여자 머리 반쯤 셀 때
마침내 나 먼저 숨을 놓으면
그 여자 이제는 울지도 웃지도 못하리
나 피우던 쓴 담배 따라 피우며
못 마시던 술이나 배우리 욕도 배우리
이만하면 제법 속절없는 사랑 하나 안되겠는가
말이 되는지는 모르겠으나
*이 시는 김명인 시인의 "너와집 한 채" 가운데 한 구절에서 운을 빌려왔다.
<가만히 좋아하는> 창비 2006
- 수요일에 쉬어서인지 여유만만한 주말의 시작, 시 한 편 읽어보실래요? 70평생도 지나고 나면 한 시간 생각거리가 안된다더니, 시 한 편에 인생이 다 들었네요~~
IP *.81.61.152
처녀의 외간 남자가 되어*
김사인
부뚜막에 쪼그려 수제비 뜨는 나어린 그 처자
발그라니 언 손에 얹혀
나 인생 탕진해버리고 말겠네
오갈 데 없는 그 처자
혼자 잉잉 울 뿐 도망도 못 가지
그 처자 볕에 그을어 행색 초라하지만
가슴과 허벅지는 소젖보다 희리
그 몸에 엎으러져 개개 풀린 늦잠을 자고
더부룩한 수염발로 눈꼽을 떼며
날만 새면 나 주막 골방 노름판으로 쫓아가겠네
남는 잔이나 기웃거리다
중늙은 주모에게 실없는 농도 붙여보다가
취하면 뒷전에 고꾸라져 또 하루를 보내고
나 갈라네, 아무도 안 듣는 인사 허공에 던지고
허청허청 별빛 지고 돌아오겠네
그렇게 한두 십년 놓아 보내고
맥없이 그 처자 몸에 아이나 서넛 슬어놓겠네
슬어놓고 나 무능하겠네
젊은 그 여자
혼자 잉잉거릴 뿐 갈 곳도 없지
아이들은 오소리 새끼처럼 천하게 자라고
굴 속같이 어두운 토방에 팔 괴고 누워
나 부연 들창 틈서리 푸설거리는 마른 눈이나 내다보겠네
쓴 담배나 뻑뻑 빨면서 또 한 세월 보내겠네
그 여자 허리 굵어지고 울음조차 잦아들고
두 눈에 파랗게 불이 올 때쯤
나 덜컥 몹쓸 병 들어 시렁 밑에 자리 보겠네
말리는 술도 숨겨놓고 질기게 마시겠네
몇 해고 애를 먹어 여자 머리 반쯤 셀 때
마침내 나 먼저 숨을 놓으면
그 여자 이제는 울지도 웃지도 못하리
나 피우던 쓴 담배 따라 피우며
못 마시던 술이나 배우리 욕도 배우리
이만하면 제법 속절없는 사랑 하나 안되겠는가
말이 되는지는 모르겠으나
*이 시는 김명인 시인의 "너와집 한 채" 가운데 한 구절에서 운을 빌려왔다.
<가만히 좋아하는> 창비 2006
- 수요일에 쉬어서인지 여유만만한 주말의 시작, 시 한 편 읽어보실래요? 70평생도 지나고 나면 한 시간 생각거리가 안된다더니, 시 한 편에 인생이 다 들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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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사인의 시적 관심은 화려하거나 크고 엄청난 것에 있지 않다. '쓰다 버린 개 한마리' '고무신 밖으로 발등이 새카맣던 어린 나' '노가다 이 아무개' 신용카드 한 장 변변찮은 헌털뱅이' '천지에 기댈 곳 없는 사람 하나' '스타킹 속에 든 그 새끼발가락' 또는 '눈여겨보는 이 아무도 없는' ' 키 낮은 풀들' 같은 것들이 그가 즐겨 노래하는 것들이다. 그의 시적 미덕은 이것들을 맹목적으로 찬양하는 데 있지는 않다. 삶의 큰길에서 조금은 비껴나 있고 조금은 뒤처져 있는 이것들을 삶의 중심에 갖다 다시 세우는 것이 말하자면 그의 시다. 말 한마디 보태거나 빼거나 바꿔놓을 수 없는 시적 섬세함도 그의 이 시적 관심을 돋을새긴다. 그의 시들은 너무 슬프고 너무 아름답다. 그러나 그 슬픔과 아름다움 속에, 과연 시란 무엇인가라는, 오늘의 우리 시단을 향하여 던지는 매서운 질문이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 신경림(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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