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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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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6월 6일 23시 21분 등록
그를 평하기에 앞서 ‘착하다’의 사전적 의미가 갑자기 궁금해진다. 뒤적여본 사전에 ‘착하다’는 것은 ‘(마음씨나 행동이) 바르고 어질다. 선하다’는 뜻이란다. 이제야 좀 더 명확해진 단어를 생각하며 그를 표현한다. 그는 참 선한 사람이다.

내가 그를 처음 만난 것은 우리 회사를 들어와서다.
그는 나의 입사동기이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 회사를 ‘들어와서’라는 말은 정확하지 않다. 왜냐하면 나는 우리 회사를 들어오기 전인 면접날의 그의 모습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많은 면접대기자들 속에서 오직 유일하게 그의 모습만을 기억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 모르겠다. 다만, 면접 그 짧은 순간을 위해 때 빼고 광낸 사람들의 무리 속에서 한쪽 구석에 조용히 자리 잡고 앉아있는 소박한 모습에 눈길이 끌렸었던 것 같다. 허름해 보이는 양복에 낡은 학생용 가방을 양 어깨에 둘러메고 그가 면접장을 향해 사라질 때에도 나는 내 면접 따위는 안중에도 없이 그가 궁금했다. 그런데 우연인지 그 짧은 만남 후에 면접합격자 모임에서 또 그가 있었다. 잘 알지 못하는 사람한테 반가움을 느끼는 내가 우스웠지만 사실이 그랬다.

입사 후 수습사원의 신분을 떼고 그와 같은 부서로 발령을 받았다. 짧은 수습기간과 부서생활을 하면서 그에 대해 알아낸 것은 이랬다. 그는 나보다 나이가 많고, 몇 안 되는 입사동기 중에서도 제일 나이가 많다는 것, 지방에서 수재소리를 들으며 공부를 하다가 큰물에서 공부하라는 권유 반과 의지 반으로 서울의 유명 대학교에 입학하였다는 것, 대학시절에는 학교 근처의 자취방에서 자취생활을 하였다는 것, 졸업이 다가와 취업준비를 하였으나 취업난에서는 그 학벌도 소용없는 일이었는지 몇 번 물을 먹었다는 것, 거듭되는 취직 실패가 그의 풍족하지 않은 생활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기에 지금은 학교 후배와 함께 자취방을 나눠 쓰고 있다는 것 등의 내용을 말이다.

입사초기 우리의 회사생활은 참 뻔~했다. 신입사원에게는 일을 잘 주지 않으므로 우리가 하는 일은 회사에 출근해서 자리를 지키는 것이 다반사였는데, 전화 받는 일조차도 서투르던 때였으므로 주로 업무와 관련된 책을 보는 일이 많았다. 그런데 책보는 일은 점심을 먹고 난 오후시간이 특히 고역스러웠다. 예고라도 하듯 식곤증이 몰려들 때면 나는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잠을 무찌르는 방법을 택한 반면 그는 여전히 진득하게 앉아있는 것을 택했다. 그래서 조용한 사무실에서 종종 그 혼자 머리방아를 찧기도 했다. 한 번은 누군가가 방아를 잘 찧는다며 한마디를 했었는데, 바로 다음날 그가 자리를 박차고 사라져서 웬일인가 했다. 그러나 얼마 후 그가 이마에 동그랗게 도장을 만들어서 나타났을 때 사무실 사람들 모두가 박장대소를 했다. 화장실 변기에 기대어 앉아 옹색한 낮잠을 붙이고 온 그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신입사원 환영회에서도 그는 빛났다. 이쪽저쪽에서 서로 권해주는 술을 마다하지 못하고 넙죽넙죽 다 받아먹더니 제대로 취해서는, 사내에서 가장 서슬이 퍼렇던 총무부장님의 곁에 비틀거리며 다가가서 어깨를 두르고 흥얼거렸기 때문이다. 그 누구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다음날 아침 자신의 행적을 전해들은 그는 오전 내내 혼자서 심각했다. 그리고 부장님이 그를 보고 미소를 흘리셨을 때 그의 진지함은 최고조에 달했다. 덕분에 사무실 사람들은 또 오전 내내 그런 그를 보며 매우 유쾌했지만.

그러던 그가 입사 일 년이 채 되지 않아 조용히 동기들의 술자리를 마련했다. 술 고프단 말에 덜렁덜렁 쫓아갔다가 휑한 소리를 들었다. 퇴사이야기. 하고 싶은 공부가 있다며 지금 그만둬야겠다는 말에 덤덤히 ‘응, 그래’라고 했다. 표현력도 부족하지만, 별로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 말이 있고 얼마지 않아서 그가 퇴사의견을 회에서 밝혔고 꽤 빨리 일이 처리됐다. 든 사람은 몰라도 난 사람은 안다고 막상 그의 자리가 비자 느낌은 꽤 컸다. 우리는 그에 대한 그리움을 사소한 일상에서도 꺼내어 기억하고 또 추억하였다.

그가 시험에 붙었다는 소식이 왔다. 그리고 하고 싶다던 일을 시작했다는 이야기도 들렸다. 내 일처럼 기뻤다. 새로 시작하는 그의 일이 이전에 그가 하던 업무보다 보수가 더 나은 것도, 업무가 더 쉬운 것도 아니었지만 그가 하고 싶어 하는 일을 드디어 하게 되었다는 생각에 마냥 좋았다.

며칠 전 그를 다시 만났다.
그는 턱시도를 입고 입구에 서 있었다.
‘어~ 왔나.’
편안한 경상도 사투리가 그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얼굴은 조금 더 마른 듯 하였으나 고운 화장 덕분인지 파리함은 느껴지지 않았다. 드라이에 어찌나 힘을 주었는지 한 가닥, 한 가닥이 하늘을 향해 날아갈 듯 세팅한 머리스타일에 연신 신경을 쓰는 눈치다. 누가 뭐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폭탄머리를 해서...머리가 이래놔서...’라며 자꾸 눈이 이마 쪽으로 향한다. 멋있다는 말을 전했다. 아주 잘 어울린다는 말과 함께. 그래도 못미더운 표정은 여전하다. 머리가 심히 마음에 들지 않나 보다. 예식장 도착이 예상시간보다 늦어서 이제 막 예행연습을 마쳤나본데 간단명료하게 설명을 전달하고 유유히 사라지는 예식장 직원의 한 편에서 둘레둘레 주변을 살피는 그의 어눌한 모습이 낯익었다. 역시 그다.

그를 보기 전 그녀에게 먼저 갔었다. 작은 출판사에서 교정을 본다던 그녀는 얼마 전 고된 직업을 바꾸었다고 들었다. 예전에 그녀를 보았을 때 무엇보다 수수한 차림에 동그란 안경, 넉넉한 미소가 특히 기억에 남았었다. 전과 다름없을 줄 알고 대기실에 갔다가 깜짝 놀랐다. 너무나도 다른 모습의 그녀가 신부대기실에 앉아 있었으니까. 드레스에 눈이 부셨다. 사실, 그녀의 그 모습에 눈이 부셨는지도 모르겠다. 현실이라는 테두리에서 많이 자유로와 보았던 사람. 안정적인 직업을 그만두고 그가 하고 싶은 일을 하게끔 조언했던 사람, 그 확실하지도 않은 기간 내내 말없이 그를 기다려주었던 사람. 간단히 인사말을 나누었다. 그보다 훨씬 재기발랄하고 또 여전히 당당한 그녀를 보면서 안도감을 느꼈다. 그녀의 씩씩함과 그의 어눌함은 참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스쳤다.

아직 대기실에서의 모습을 찍지 않은 터라서 촬영기사도 마음이 바쁜지 신랑을 찾느라 난리다. 대기실에서 둘의 포즈를 잡는데 능숙한 언니와 달리 그는 참 어색했다. 웃지도 않는다. 어쩌다 촬영기사의 닦달에 못 이겨 한 번씩 겨우 웃는 얼굴은 가증스럽기가 그지없다.
‘언니~~ 너무 예뻐요!! 오빠 표정 -_-;;’
하지만 주의를 줘도 그 때 뿐이다.
‘이렇게 하면 되나?’
하다가도 이내 굳어져서는 싸우러 온 사람의 분위기를 낸다. 촬영기사가 안타까운 듯 몇 마디를 더 하다가 이내 셔터를 눌러 버린다. 그래도 좋다. 그의 어색함까지 그녀의 화사함이 물들이고 있었으니까.

그네들과 잠깐의 여유를 느끼고 나서 돌아오는 길에 지하철에서였다. 환승역을 걸어가는데 바로 앞 쪽에서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걸어가고 계셨다. 스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무심한 눈길을 던지던 찰나였으므로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리려는 순간이었다. 점잖은 사냥모자와 콤비 자켓을 입은 할아버지의 등 위로, 꽃무늬 프린트가 찍힌 화사한 티셔츠를 입은 할머니가 폴짝 달려들으며 ‘업어봐’라는 말을 내질렀다. 할아버지도 준비는 하셨던 듯 하나 할머니를 받쳐야 하는 손의 타이밍과 할머니의 어부바가 맞지 않고 미끄덩했다. 할아버지의 뒤로 돌린 손은 허공을 휘익 갈랐고 그 바람에 할머니의 다리가 주르륵 도로 바닥에 닿았다. 동시에 할머니가 할아버지의 목에 감았던 팔을 풀고는 ‘에그, 업어준다면서!’ 하며 주먹으로 할아버지의 어깨를 툭 치고는 한 발짝 물러나신다. 이에 할아버지는 멋쩍은 듯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모자 앞부분만 연신 만져대셨다. 그렇게 두 분은 다시 어깨를 마주하고 걸어가셨다.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모습이 마치 오늘 본 그와 그녀의 나중 모습을 보는 듯하여 묘한 여운을 남겼다. 시간 앞에서 조급함을 느끼지 않는 사람들, 그와 그녀, 그리고 할머니와 할아버지. 주위의 것들에 연연해하지 않고 시간이라는 녀석에게 굴복당하지 않은 채 자신만의 방식으로, 자신만의 색으로 세상을 물들이며 살아가는 모습이 부러운 순간이었다. 과연 나는 나의 색을 표현할 수 있을까. 시간 앞에서 조바심치지 않고 여유 있는 편안함을 만끽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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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의 선장
2006.06.06 23:44:45 *.177.160.239
글 고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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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아이드잭
2006.06.06 23:52:10 *.140.145.120
사당역에서 잠시 만났었죠.. 많은 이야기 나누지 못해서 아쉬웠는데
이렇게 미경님의 글을 접하고 나니 저도 모르게 미소가 그려지네요..
마지막 노부부의 모습이 상상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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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한자식
2006.06.08 01:35:06 *.145.121.57
글 느낌이 좋아요.
그와 그녀.
마치 소설을 읽는듯한 느낌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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