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경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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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이다. 일주일 간의 노동이 끝난 다음날이며 그 대가로 이틀간의 자유로움이 주어지는 첫 날이다. 그리고 이 날은 나를 넓고 깊게 만들어주는 세 가지 보물을 모두 만나는 날이기도 하다.
<책>
책은 매일 만나고 있지만 그래도 토요일에 가장 오래 그리고 편하게 만날 수 있다. 내가 책 읽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과 세상에 읽을 만한 책이 아주 많다는 것은 누구에게라도 감사하고 싶은 일이다. 읽고 싶은 책의 리스트를 놓고 본다면 도무지 일주일에 한 권으로는 턱없이 모자라지만 아직 나의 책 읽기는 그리 능수능란하지 않다. 하루 두 시간, 책을 온전하게 읽을 수 있다면 60페이지 정도 읽을 수 있다. 이야기라면 더 많이 읽을 수 있고 사색을 요하는 책이라면 그보다 덜 읽게 되지만 대략 5~6일 정도면 300페이지 책 한 권을 읽게 되는 것 같다.
책을 좋아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현재를 살면서 만날 수 없는 것들을 만나게 되기 때문이다. 오래 전에 살았던 동서양의 명사들을 만날 수도 있고 도무지 나의 인맥으로는 손 한번 잡기 힘든 이 시대의 유명인들도 단돈 만원에 내 앞에 불러 앉힐 수 있다. 또, 수백 년 전의 사건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기본이고 아주 저렴한 삯을 주고도 세계 일주를 할 수 있으니 이것이 남는 장사가 아니고 무엇이랴. 이렇게 즐기다 보니 책을 곱게 볼 리 만무하다. 줄 치기는 기본이고 여기저기 휘갈겨 쓴 것 투성이다. 어째 그렇게 봐야 본 것 같다. 전봇대에 영역 표시하는 심정인가보다.
<걸어서 세상 속으로>
아무리 어렵더라도 일년에 한번은 바다 밖의 땅을 밟아 보고 싶었다. 다른 것이 있는 곳, 다른 사람들이 사는 곳을 보게 되면 그만큼 넓어 질 수 있다.
토요일에는 나의 이런 갈증을 풀어주는 프로그램이 하나 있으니, 바로 KBS에서 방송하는 ‘걸어서 세상 속으로’라는 영상 기행문이다. 이 프로그램은 일주일에 한 번, 한 시간 동안 세계의 아름다운 도시 한 군데를 여행시켜 주는데, 다행히 제작진이 편식을 하지 않아 세상의 곳곳을 골고루 볼 수 있다. 주로 도시의 모습과 역사적인 장소를 먼저 보여주고, 그 곳에서 살고 있는 (또는 살았던) 사람들을 가까이서 보여준다. 시장은 빠짐없이 들르는 장소이고 거리에서 만난 민속 음악도 꼭 한 두 곡 녹음해서 들려준다. 나는 이 프로그램을 보며 나의 다음 목적지를 슬그머니 정해본다. 대서양과 인도양을 나누는 희망봉도 가보고 싶고 적도가 지나가는 에콰도르의 수도도 가보고 싶다. 비록 브라운 관을 통해 만나보는 세상이기는 해도, 나름대로 집중해서 화면 구석구석을 잘 보면 마치 내가 여행하는 것처럼 나만의 발견을 해낼 수도 있다. 여행이 떠나고 싶으신가? 그럼 아침 10시에 이 프로그램을 보라.
<그녀와의 나들이>
나는 원래 활동적인 사람이 아니다. 밖을 돌아다니는 것 보다 집구석에 틀어 박혀 있는 것을 더 좋아하고 새로운 것을 찾아 다니기 보다, 가던 곳, 익숙한 곳을 더 선호하는 편이다. 다행히 그녀는 이런 나와 다르다. 호기심이 많아 가보고 싶은 곳, 해보고 싶은 일이 아주 많다. 덕분에 나는 서울 시내를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다양한 것들을 구경할 수 있다. 사람 많은 번화가를 들여다 보기도 하고, 한적한 공원을 찾기도 하며, 요새는 산에 오르기도 한다. 원래는 지도를 하나 사놓고 표시를 해가며 서울 시내를 샅샅이 뒤져보려고도 했었다.
간혹 몸이 처지거나 좀 쉬고 싶은 날이 있기도 하지만 막상 나가고 나면 의외로 생기가 돌게 된다. 그리고 결코 책상 앞에서는 만날 수 없는 것들을 대하게 된다. 보는 것 만으로도 생명력을 느끼게 해주는 아이들과 강아지, 작은 풀꽃들을 만날 수 있고, 버스 안이나 시장 속에서 잠깐씩 만들어지는 작은 이야기들도 만날 수 있다. 그녀와의 나들이는 가끔 안으로만 파고 드는 나로 하여금 균형을 잡을 수 있게 해준다.
오늘, 토요일에는 니체를 만났고, 쿠바의 하바나를 다녀왔으며, 서울 숲에서 짧은 소나기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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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탄
나도 책 읽으며 밑줄 긋고 갖은 부호와 메모를 해 놓는 편인데, 그것을 전봇대 영역표시로 비유한 것이 재미있네요. 관련기사를 옮겨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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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속에 미래가 있다]명사들이 말하는 책읽기
[동아일보] 2006. 4. 1
《우리 시대 대표적인 책벌레들에게 물었다. 당신들은 도대체 어떻게 책을 읽느냐고. 비슷한 대답이 쏟아질 줄 알았다. 착각이었다. 그들은 저마다 독특한 방식으로 책을 고르고, 읽고, 갈무리했다.
어떤 이는 집중적으로 몇 시간을 투자해 한 권을 읽었고, 어떤 이는 틈틈이 시간을 쪼개 여러 권을 나눠 읽었다. 어떤 이는 책을 읽었다는 흔적을 남기는 것을 싫어했고, 어떤 이는 서슴없이 책을 찢기도 했다. 어떤 이는 책의 주요 내용을 적어 둔 메모상자를 활용했고, 어떤 이는 낭독하거나 대화 중에 섞어 넣는 등 몸으로 책을 읽었다.
책 읽는 개성은 달랐지만 그들의 결론은 같았다. 책은 지식을 얻는 가장 경제적이고 효과적인 방법이며 책은 꾸준히 읽다보면 그 학습 효과가 기하급수적으로 배가된다고.》
○ 이미지맵을 통한 입체적 독서-시인 장석주
신문 서평을 읽거나 제목과 필자를 보고 직관적 판단에 의존해 책을 고른다. 온라인 서점에서 책의 목차를 훑어보고 주로 인터넷 주문으로 1주일에 15권가량 구입한다. 온라인으로 책을 사지만 실망한 확률은 20권에 1권꼴밖에 안 된다. 하루 한 권 이상은 꼭 읽으려 한다.
한번 책을 잡으면 3시간 이상 집중적으로 읽는다. 책을 많이 읽다 보니 속독을 배우지 않고도 단어가 아니라 덩어리로 읽는 버릇이 생겨 이론서도 1시간에 60쪽 이상의 속도로 읽는다. 책에 대한 결벽증이 있어 메모도 하지 않고 줄도 치지 않는다.
다만 책을 읽을 때 머릿속에 직육면체의 공간을 상상하고 읽어 가면서 깨달은 내용을 그 안에 배열하는 이미지맵 독서를 한다. 이런 입체적 독서를 하다 보면 책을 읽다가 앞으로 되돌아가서 읽을 필요가 없다. 다만 쉽게 이해하기 힘든 책은 책장 가까이 두고 읽고 또 읽는다.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가 쓴 ‘천 개의 고원’이 그런 경우로 완독만 5번 했고 부분적으로는 거의 매일 읽는다. 노자의 ‘도덕경’은 개인적으로 좋아해서 국내의 거의 모든 역주본을 찾아서 읽지만 읽을 때마다 좋다.
○ 메모함을 이용한 DB독서-출판평론가 표정훈
매주 서너 개 신문의 서평을 샅샅이 읽고, 온라인 서점의 신간 코너를 두루 검색해 구입할 책 목록을 작성한다. 책 구입은 반드시 오프라인 서점을 방문해 책의 ‘신체적 건강 상태’를 점검한 뒤 결정한다. 한 달에 대략 30권의 책을 구입한다.
책을 읽을 때는 중요한 부분, 필요한 부분만 찾아 읽는 ‘스킵(skip) 독서’를 많이 한다. 서문, 목차, 찾아보기 등을 먼저 훑어보고 무작위로 펼쳐서 읽다 보면 내게 필요하고 중요한 부분이 저절로 찾아진다. 꼼꼼하게 정독할 필요가 있는 책은 한두 달이나 그 이상에 걸쳐 조금씩 읽어 나간다. 이런 책들은 한약방 약상자처럼 언제든 꺼내 볼 수 있게 가까운 책장에 꽂아 놓고 본다. 책을 읽으면서 어떤 페이지에 어떤 주제의 내용이 있다는 것을 메모지에 적어 두고 주제별 메모 상자에 넣어 둔다. 카페에서 잡지를 읽다가도 좋은 구절이 나오거나 TV 교양프로를 보다가도 좋은 말이 나오면 메모해 뒀다가 이 메모 상자에 보관한다. 독일의 사회학자 니클라스 루만에게서 배웠는데 매우 효과적이다.
실용서는 아예 필요한 페이지를 찢어서 별도의 파일 형태로 보관하다가 새 책을 한 권씩 만들기도 한다. 요즘은 소장서적 1만3000권의 서지사항을 데이터베이스화하고 있다.
○ 몸으로 읽어라-고전연구가 고미숙
연구실(연구공간 ‘수유+너머’) 식구들이나 전문가들이 추천하는 책을 빌려 읽거나 필요할 때는 인터넷으로 구매한다. 집필을 위해 읽는 책과 매일 반복해 읽는 경서(동양고전)를 빼고 일주일에 최소 두세 권을 읽는다. 일반 책을 읽을 때는 이해 못하는 부분은 그냥 건너뛰면서 단숨에 쭉 읽는다. 필요하면 줄도 많이 치고 여기저기 메모도 하면서 거칠게 읽는다.
책에 대한 집착이 없어 쉽게 빌려주고 잃어버리는 경우도 많다. 책으로부터 지식이나 정보를 얻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 책은 새로운 세상을 만나게 해 주고 내 몸을 바꿔 주는 통로일 뿐이다. 경서를 읽으면서 터득한 것은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읽으라는 것이다. 예전에 소리 높여 낭독하게 한 것은 교육의 현장감과 신체적 교감을 중시했기 때문이다. 낭독은 기운을 소통시키고 읽다가 막힌 부분을 뚫어 주는 마력이 있다. 요즘 책도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이 있으면 일부러 소리 내 읽다 보면 이해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특히 청소년에게는 낭독을 통한 독서를 권한다. 또 책에서 읽고 깨친 부분이 있으면 일상의 대화나 토론 현장에서 그 내용을 끊임없이 응용할 때 비로소 내 것이 된다.
○ 책에 대한 엄숙주의를 깨라-경영저술가 공병호
매년 한 해 동안 얼마의 책을 읽을 것인지 수량 목표를 설정한다. 작년에는 300권을 목표로 했는데 380권을 읽었다. 올해는 500권을 목표로 삼았다. 새 책을 읽을 때마다 꼭 500권 중에 몇 권째임을 기록해 둔다. 한 달에 두 번씩 오프라인 서점을 찾아 정신없이 바쁘게 책을 고른다. 책을 잡으면 목차를 보고 중요한 부분부터 찾아 읽는다. 정독할 가치가 있다고 판단되면 앞에서부터 차례로 읽지만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되면 발췌 독서로 충분하다. 이제는 센서 기능이 발달해서 내게 필요한 부분만 잘 찾아 읽게 됐다.
책에 대한 엄숙주의를 버려야 한다. 돈 내고 내게 필요한 지식을 사는 것이다. 예전엔 책을 읽다 필요한 페이지는 과감하게 반을 접어서 언제든 찾을 수 있도록 했다. 요즘에는 책을 읽고 맨 앞 페이지에 사용가치가 있는 아이디어, 사례, 키워드가 담긴 페이지를 메모하는 방식을 택한다. 또 책을 연속적으로 읽지 못하고 틈틈이 읽기 때문에 마침내 한 권을 다 읽고 나면 20∼30분의 시간을 들여 메모한 주요 내용을 복습한다.
스트레스를 받거나 일이 손에 안 잡힐 때 남들은 술을 마시지만 나는 몇 시간 동안 집중적으로 책을 읽는다. 피터 드러커에게서 배운 휴식 방법이다.
○ 자투리 시간을 이용하라-안철수 안철수연구소 이사회 의장
아마존닷컴과 반스 앤드 노블 등 해외 온라인 서점의 실시간 베스트셀러 목록과 독자들의 서평을 참고해 온라인으로 구매한다. 특히 맬컴 글래드웰, 짐 콜린스, 토머스 프리드먼, 존 그리셤처럼 좋아하는 필자의 책은 바로 구매한다. 주로 경영 관련 서적이 주를 이루는데 한국에 있을 때도 번역돼 나오는 것을 참기 힘들어 원서로 읽었다.
여러 권의 책을 동시에 보기보다는 한 권의 책을 집중적으로 본다. 책 읽을 시간이 부족해 틈틈이 읽는 경우가 많다. 승강기를 기다리는 동안 책을 읽기도 하는데, 몇 년 전까지 입주했던 회사 건물의 승강기가 느려서 한 달에 한두 권은 충분히 읽을 수 있었다. 절대로 요약본은 보지 않는다. 책의 대강의 줄거리를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저자의 사고의 흐름을 따라가면서 자신의 지식이나 현재의 상황과 대비하면서 사색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많이 읽는 것도 좋지만, 능동적으로 생각하면서 읽는 것이 더 중요하다.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을 때는 그 부분에 집착하기보다는 다음에 같은 분야의 다른 책을 읽는다. 다른 표현 방식과 다른 관점으로 설명을 하는 것을 읽고 있노라면, 그 전의 책에서 이해가 안 가던 부분도 자연스럽게 이해되는 때가 많기 때문이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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