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커뮤니티

살다

여러분이

  • 정재엽
  • 조회 수 2544
  • 댓글 수 2
  • 추천 수 0
2006년 7월 5일 15시 42분 등록


영화 ‘이터널 선샤인’을 보면 문득 노르웨이의 화가 에드바르 뭉크 (1863-1944)의 작품 ‘절규’ 가 떠오른다.

영화가 흐르는 사이로 기억을 잃어버린 자신이 귀를 막고 난간에 힘없이 걸쳐 있는 한 인간의 모습이 겹쳐진다. 두 손으로 귀를 막고 눈과 입을 크게 열고있는 성(性)이 불분명한 이 인물은 마치 절규하고 있는 모습으로 다가오지만, 사실은 자연을 통해 크게 부르짖는 소리를 느끼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다. 화면전체에 사용된 유연한 곡선과 강직한 직선과의 대비를 통해 보는 이로 하여금 내적 불안감을 증폭시키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인물 뒤로 비치는 붉은 구름을 보면, 마치 불타고 있는 것 같은 곡선과 난간의 직선이 만나는 화면은 일몰의 빛남과 동시에 공포의 화면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영화 ‘이터널 선샤인’의 주인공인 조엘(짐 캐리)과 클레멘타인(케이트 윈슬럿)은 그림 속 두 명의 엑스트라처럼 주인공의 자리를 멤도는 것으로 묘사된다.

회사에 출근 하던 중, 무작정 찾아간 해안에서 만난 조엘과 클레멘타인. 적극적으로 대시하는 클레멘타인을 부담스러워하던 조엘은 첫 데이트 이후 그녀에게 부쩍 호감을 느낀다. 그녀의 집 앞에서 기다리던 조엘은 느닷없이 자동차 창문에 대고 “무슨 일이냐”고 묻는 남자 (엘리야 우드)를 만난다. 조엘도, 관객도, 그 남자의 정체와 의도를 알지 못한다. 다만 그 남자는 마치 조엘의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듯한 표정만을 남겨놓을 뿐이다. 짐을 가지고 나온 클레멘타인에 대한 설명은 뒤로 한 채, 난데없이 서글픈 눈물을 흘리며 차를 모는 조엘의 얼굴 위로 오프닝 크레딧이 올라간다. 오프닝 씬 에 비치는 조엘의 얼굴은 마치 ‘절규’의 인물과 흡사하다. 감정마저 메말라버린 어두운 도시의 중앙을 자동차로 달리는 가운데 영문도 모른채 눈물을 흘리는 그의 모습은, 직선과 곡선, 붉은 빛과 파란 빛의 강렬한 색 차이를 통해 공간의 간극을 메우며 그 이유를 설명하는 방식이 ‘절규’의 필체와 닮아았다.

그러나 관객들은 이내 그들의 절규의 실체가 무엇이었는지를 알게 된다. 그것은 본인의 의지에 의해서 지워진 기억들에 대한 상실감이다. 본인이 지우고 싶은 기억을 컴퓨터에 회로화시켜 삭제할 수 있다는 설정은 그래서 괴로운 것이다. 현재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지원진 기억은 컴퓨터의 del 키를 누르는것 만큼이나 쉽지 않다. 그리고 컴퓨터의 기억 메모리처럼 완벽하게 재현되기도 힘들다.

기억삭제의 코드는 조엘과 클레멘타인의 과거를 이야기 해주기 위한 훌륭한 장치가 되어주고 있다. 조엘이 자고 있던 침대가 문타우크 (Montauk) 의 바닷가로 이동하는 장면, 의도적으로 작게 설정된 조엘의 모습, 조엘의 엄마와 클레멘타인을 동시에 화면에 등장시켜 시간적으로 다른 두 세계를 동시에 일치화 시킨 장면 등은 기억의 상실을 훌륭하게 서사화시켜주는 장치를 마련해 주었다. 이러한 서사 구조를 시간적은 흐름으로 이야기 해주는 것이 아니라 기억의 삭제 순서로 버무려 놓은 의도는 그들만의 아름다운 공간이 한때 얼마만한 사랑으로 빛났었는지, 그러나 사랑이 지나 버린 후에는 얼마만한 비극으로 암울해졌는지를 동시에 보여주는 효과를 드러낸다.

기억이 지워진 두 사람은 영화 초반으로 거슬러올라가 아주 우연히 그들이 처음 만났던 모타우크의 바닷가에서 마주치게 되고, 한밤중에 다시 만나 찰스 강의 얼음판 위에서 별자리를 이야기 한다. 기억의 삭제와 우연한 만남, 이유 모를 슬픔과 억지가 담긴 웃음- 그것은 조엘과 클레멘타인의 만남이 결코 어느 누구의 의도도, 또한 완벽한 우연도 아니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기억이 삭제된 두 사람이 동일한 장소에서 마치 클레멘타인이 물들인 녹색의 머리카락처럼 ‘파릇파릇하게’ 피어오르는 사랑을 시작한다는 점에서 <이터널션사인>은 ‘회귀’의 공식을 불어일으킨다.

결국 기억 속의 조엘과 클레멘타인은 더 이상 그들의 의지에 의해서 치유될 수 없음을 깨닫는다. 조엘의 기억이 두 사람이 처음으로 만났던 그 순간을 인식하게 되었을 때 모든 것을 채념하며 클레멘타인은 말한다. 지금 이순간의 기억도 곧 사라지게 될 것이라고. 그러자 조엘은 어쩔 줄 모르는 클레멘타인에게 말한다. ‘이 순간을 즐기자’고.

자신의 선택에 의해 사라져버리는 기억을 향해, 모든 기억이 소멸되기 직전에 어떡해야 좋을지를 묻는 연인을 향해 그 순간을 그저 ‘즐기자’, 고 이야기하는 조엘의 대사는 이제 더 이상 뭉크의 그림 속의 주인공이 아니다. 기억이, 그리고 사랑이 지워지는 순간까지 두 사람은 그림 속의 주인공이 아닌, 뒷편의 쓸쓸한 부속인물로 화면을 벗어나려한다.

“망각한 자는 복이 있나니, 자신의 실수조차 잊기 때문이라”는 니체의 말이 만남과 헤어짐, 의식과 무의식, 꿈과 현실, 현상과 실재의 분열과 융합을 거쳐 한편의 새로운 ‘희망의 절규’를 낳은 것이다.

IP *.118.101.211

프로필 이미지
한명석
2006.07.05 22:47:29 *.225.18.123
독립된 영화와 그림을 매치시킨, 멋진 구성이네요. ^^

영화를 안 본 상태에서, 윗 글만 보고 생긴 의문 하나.
본인의 의지에 의해서 선별한 기억만 삭제한다는 설정이잖아요, 그러면 두 남녀가 기억이 소멸되기 직전에 안타까워 할 이유가 없지 않나요?
프로필 이미지
정재엽
2006.07.07 08:03:19 *.118.101.211
한선생님,

두 남녀의 기억이 소멸되기 직전에 안타까워 하는 이유는, 본인이 언제 기억을 삭제했는지조차 모르기 때문입니다. 기억삭제병원(Lackuna)을 찾아가 본인이 없애고 싶은 기억을 삭제하려는 시도가 처음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은 처음이 아닐 수도 있거든요. 병원에 간 기억조차도 삭제되었기때문이죠.

이 영화는 기억 삭제후 밀려드는 안타까움, 쓸쓸함, 그리고 언젠가 본 듯한 불분명함. 그 스산한 허무함이 안개처럼 전체 분위기를 이끌어가고 있습니다. 기억은 삭제되었지만, 그래도 인간의 감정마저도 '기억삭제'가 지배하지는 못함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인것 같습니다. 지표없이 떠도는 현대인들의 무기력함을 기억삭제를 통해 나타낸 혼란스러운 영화입니다.

작년에 아카데미영화제에서 각본상을 수상했다고 하는군요.

덧글 입력박스
유동형 덧글모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