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 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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뜰에 나팔꽃이 맹렬한 기세로 번져가고 있다. 나는 덩굴식물을 좋아한다. 나팔꽃이나 메꽃의 덩굴은 살아있다. 허공을 향해 뻗쳐 오르는 저 절실함. 나는 나팔꽃의 덩굴을 보면서, 옛날 교과서에서 배운 “이것은 소리없는 아우성”이라는 은유를 비로소 이해한다.
나팔꽃이 크고 있는 것을 보면서 낚시줄이라도 매어줄까, 생각만 하고 있는 며칠동안 나팔꽃의 덩굴은 서너 겹으로 꼬아져 스스로 버팀목이 되었다. 지줏대없이도 서로 의지가 되어 나팔꽃 성벽을 이루고 모과나무를 포획하기 시작했다.
아직 나팔꽃의 봉오리는 맺히지 않았다. 나는 아침마다 문안드리며 나팔꽃이 피기를 기다린다. 신의 손끝으로 접은 그 정교한 별무늬와 청보라의 신비한 색깔이 인도하는 미궁을 보기위해 기다린다. 그처럼 나약한 것이 그처럼 오묘하게 아름다울 수 있다니!
오늘도 나팔꽃은 피지 않았다. 봉오리조차 보이지 않는다. 그대신 키다리 모과나무의 허리까지 감아 올라갔다. 이제 나는 나팔꽃 덩굴이 어디까지 올라갈까 그것도 궁금해졌다.
고사목에 올린 능소화가 장관이듯이, 모과나무에 나팔꽃을 달아준다면 그것역시 신비로운 아침풍경이 될 것이다. 그리고 나는 알게 되었다. 나팔꽃이 피기를 기다리면서 알게 되었다.
나팔꽃은 필 것이다. 밥벌이의 지겨움이나 게으름이나 몰이해에 지쳐 후줄근해진 하루를 접어도 다시 아침이면 개벽할 수 있을 때, 그 때 나팔꽃은 필 것이다. 아득하게 커버린 모과나무도 때로 외롭고 고단한 존재라는 것을 알아, 아기 손바닥같은 이파리로 휘감아 위로하고 꽃 한 송이 달아줄 수 있을 때, 그 때 나팔꽃은 필 것이다. 고귀하고 신비로운 청보라의 미궁으로 빨려드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때, 그 때 나팔꽃은 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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