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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성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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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8월 19일 11시 51분 등록
중용 가장 인간적인 메카니즘

나는 인간행동에 관해 과학적 방법론의 결과들을 인문학적으로 해석하고 접근해서 많은 비판을 받았다. 아니 어쩌면 맹 비난을 받았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그래도 물리적인 자연의 법칙의 지배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정신의 영역을 구축하고 있는 인간행동을 단순한 인과적 논리와 구조적인 해석이라는 과학적인 방법론에 대한 부정적 견해를 바꿀 생각은 눈꼽 만큼도 안 든다.
과학이 심리학이라는 이름 아래 인간의 마음과 행동을 다루기 시작한 지난 150여년의 결과들은 정신의 실재를 부정하고 가치중립이라는 가당치 않은 객관성을 가지고 살아있는 생명에 대한 존엄성을 해체해 왔다. 최첨단의 과학이 스스로 자기부정을 하기 전까지 생물학적이고 물리 역학적인 메카니즘의 정답 없는 공식 만들기에 전념해왔다. 그 대가는 도덕적 해이와 물질만능주의, 그리고 전 지구적인 생태적 위협과 핵폭탄 같은 인류 문명의 종말의 가능성이라고 생각한다. 실재로는 인간에 대한 이해의 메카니즘적인 공식이 복잡해지면 해 질 질수록 그만큼 더 명확하게 실재하는 인간으로부터 멀어졌다.
그래도 과학적인 방법론을 종교적 맹신이 세상을 지배했던 것처럼 숭배할 수 있겠는가?

반면에 인문학적인 인간행동에 대한 접근은 행위적인 움직임에 대해 지나치게 추상적이고 사변적이거나 미학적인 그런 상징적인 표현들로 과장되어 있다. 그래서 자주 지나치게 환상적이고 모호해진다. 그것들은 때로 신화로 치부되거나 실천되지 않고 철학적이고 사변적인 개념에 멈추어 의미나 실제 감각을 부여하지 못한다. 아마도 검증이나 재현이 보편성을 넘어서 있는 그런 지나치게 개별적이고 주관적인 이유 때문이다.
소소한 일상의 행동이든 한 나라와 이데올로기를 지배하는 이념적 행위이든 은유나 비유적인 표현들은 오용되거나 남용되기 쉬워서 깨어있는 현자들의 지혜로운 충고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가치와 정의가 힘 있는 자의 손에 넘어가기 쉬운, 숨겨진 의도 속에 화려하게 치장 될 수 있는, 그런 개인과 집단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 위험함과 무절제함은 내부적 붕괴에 의한 위대한 제국의 멸망처럼 스스로 발명한 과학적 방법론이란 도구에 의해 붕괴되어졌으며 효율과 효과라는 신의 노예가 된 것이다.

인간행동에 관한 한 이해와 실천 사이에 상상할 수 없는 넓은 틈이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실천적 행동이 이루어졌다고 해서 이해가 완성됐다고는 볼 수 없으며 지적으로 개념과 논리를 확보했다고 해서 실천적 행동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볼 수도 없다. 왜냐면 부분적 혹은 본질적 요소들의 이해와 전체적인 통찰, 그에 따른 관계와 질서는 동일한 내부에 완전히 다른 양면성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동양은 자기감각적 인식을 중요시 했으면서도(一切唯心造) 사상과 사유의 섬세함과 그러한 지적이해에 대한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그것이 실천적 행동에 따른 실재하는 세계에 대한 감각의 미묘하고 복잡함을 섬세하게 구분하기 위한 적극적 이해의 발판이 되기 때문이다. 경험 혹은 학습과 같은 지적이해의 도구나 정보들은 바뀌어도 자기감각적인 깨달음이라는 ‘체득’을 목표로 하고 있다는 것 자체는 바뀌지 않는다.
그래서 인간이 궁극적으로 이루고자하는 자기 존재에 대한 가치와 의미에 대해 인문학적인 접근이 그 방향을 제시해 줄 수 있고 어떻게 그 길을 갈 것인지에 대해 과학적인 방법론들이 풍부하고 다양한 대안들을 제시해 줄 수 있다고 나는 굳게 믿고 있다.

현대에 와서 긍정적인 삶(Well-being)의 체득에 대한 접근방법의 두 입장을 조화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다. 효율성의 입장에서 과학적인 방법론의 이해와 활용, 그리고 존재가치적인 입장에서 깨달음에 이른 선각자들의 지혜로운 이정표적 안내를 통합적으로 수용하여 이해하려는 것이다.
그러한 접근은 현대의 최첨단의 과학 문명 속에서 2000년이 지난 성인의 경전이나 노장의 사상이 모순 없이 실존적 의미를 지닐 수 있게 하였다.


실천적 행동과 지적인 이해라는 인간행동의 두 개의 수레바퀴를 연결해 주는 개념으로서 우리는 “적절함” 이라는 전통적인 개념을 사용한다. 그것은 인간의 존재를 이루고 있는 내 외적인 많은 구성요소들을 통합적으로 균형을 갖추게 하는 요소들 간의 개별적인 평형상태이다.
(그것은 소극적인 입장에서 Nash Equilibrium(내쉬 평형)과 같은 것이지만 Nash Equilibrium은 존재와 가치에 대한 자기중심적인 인간의 합리성과 현실적인 상황 속에서 그 평헝 상태에 대한 해석의 어려움이 문제가 된다.)
(( Nash Equilibrium (내쉬 평형) : Noncooperate 게임에서 각 플레이어들이 라이벌에 전략이 주어진 상황에서 전략을 바꿀 필요가 없을 때 나타나는 Equilibrium(최적상태)입니다. Equilibrium은 어떠한 손님이나 회사도 교환조건 (물건과 돈)을 바꿀 의향이 없을 때 나타나는 것이다. 예로 ‘죄수의 딜레마’라는 것이 있다))

인간행동에 있어서 ‘적절함’ 이라는 개념을 적극적으로 해석하면 인간행위에 관한 정교한 지식과 섬세한 기능적 행동(靜中動,動中靜)이 유연함으로 이어질 수 있게 해주는 근거가 되며 무지하고 단순한 행동의 격렬함과 거친 힘을 지배(柔能制剛)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물리적인 힘과 정신적인 힘을 조화시키는 인간이 수행할 수 있는 최고의 메카니즘이다. 크게는 사유와 실천의 균형으로 나타나겠지만 그 모호하고 추상적인 개념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언행일치라는 실천적 행위를 통해서만 이해되어 질 수 있다.(至誠) 우리는 지식 없는 행동들이 위태롭고 행동이 없는 지식들은 말이 많고 복잡해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삶과 존재에 대한 모든 가치 있는 전통적인 훈련들은 의식적 자아의 신체적 훈련의 심화(深化)가(外功) 강화(强化)로 끝나지 않고 개방(開放)으로(內功)) 이어지도록 하였던 것은 행동의 강력함 만으로는 ‘진정한 행복(至福)’에 대한 치밀한 선택을 능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정신과 신체를 분리한 과학적 방법론은 이러한 면에 있어서 항상 딜레마에 빠진다.
동양은 ‘중용’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기울거나 지나치거나 모자람이 없이 평범하면서도 영원한 상태라고 했으며 그것이 곧 깨달음이 완성되는 길(中庸之道)이라고 했다. 깨달음이란 사물, 사건, 상황, 상태에 대한 의식적 활동을 초월하여 순간적이며 직접적으로 자기감각적 인식(自覺)에 이르는 것이다.
중용(中庸)에 이르기를 적절함에 이르는 방법은 지성(至誠)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 성(誠)을 이루는 것이 인(仁)이고 만물을 성취시키는 것이 지(智)라고 말하고 성(誠)은 스스로 이루는 것이고 도(道)는 스스로 가게 되는 길이다. 라고 말했다.
그리고 성(誠)은 하늘의 도(道)이고 성(誠)에 이르는 것은 사람의 도(道)이다. 성(誠)은 망령되지 않은 진실을 말한다. 성실함은 곧 준비이며 행함이다. 성(誠)은 수단도 아니며 방법도 아닌 도덕(자연과 인간의 질서)의 근본이로다. 라고 말하고 있다.

적절함을 깨닫는 것이 성실함이며 성실함이 자연의 위대한 법칙이고 그 성실함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것은 자신과 자신이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는 것으로 나아가는 노력이며 그것이 인간의 가장 바른 길이라는 이야기로 나는 해석한다.
인간행동에 있어서 사유와 실천을 포괄하는 개념을 갖고 있는 것이 지성(至誠) 이다.
작은 생활의 습관에서부터 사활이 걸린 프로젝트에 이르기까지 결정적인 행동과 의사결정에 있어서 전면에 드러나지 않는 성실함이 미치는 영향력은 막강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사고와 행동의 일관성을 갖고 있지 않는 한 지속적인 성실함((至極精誠)을 기대하기 어렵다.
인간행동의 적절함은 그가 어떻게 학습과 실천에 충실해 왔는가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자아를 이루고 있는 의식은 삶이라는 존재 형태에 대한 태도에 따라 끊임없이 재구성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보다 더 많은 일상을 구성하고 있는 의식 밖의 자기존재의 영역, 즉 우리가 무의식이라고 말하는 무의지적인 세계의 통찰 없이는 외적 환경의 다양성과 내적인 욕구들에 대한 충족에 이를 수 있는 완전한 ‘적절함’을 발견하기 어렵다.
그래서 중용은 존 내쉬가 말하고 있는 equilibrium 과는 다르다. 중용의 적절함은 제한적으로 이윤이나 만족의 통계적 확률이나 이기고자 하는 집착과 같이 단순히 의식이 주의를 집중하고 있는 표면적인 지적 활동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성실함이란 적절함이라는 모호함의 깨달음을 위한 구체적이고 명료한 행동의 질적 변화를 위한 지침이 된다. 우리가 행동의 적절함에 대한 개념이나 용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개별적이지만 보편적으로 통용될 수 있는 인식상태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중용은 그 인식을 지성에 두고 있다. 그것은 사유 활동이든 실천적 행동이든 학습이라는 양(量)적인 지적이해만으로 습득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반복적인 실천적 행위 속에서 보다 밀도 높고 다양한 정보들을 통해 섬세함과 민감함을 느낄 수 있는 자기 감각적인 통찰을 통해서 달성되어지는 것이다.
숙련된 운동행동 뿐 아니라 삶의 대부분의 행위들은 경험과 학습의 과정을 거쳐서 의식적인 주의와 집중 없이 자동화 즉 무의식화 되어 이루어진다. 그런 훨씬 많은 일상을 지배하는 무의식적이며 자기조직적인 그리고 의지와는 무관하게 이루지는 자기감각의 선택(直觀)이 정교함과 정확성을 유지(적절함, 중용, 최적 균형)하기 위해서는 빈복연습을 통한 동일한 움직임 속의 감각적 차별화와 다양성을 터득하여야만 한다. 그래야만 의도 행동의 복잡함 속에서 의식적 노력 없이 통합적인 창발성을 유지할 수 있으며 즉각적인 대응을 할 수 있다. 그래야만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일상 속에서 황홀함을 발견할 수 있다.
창조 이면에 기억이라는 감수성이 존재하듯이 자각이라는 직관적 통찰에는 의식적이고 체계적인 인간적인 노력으로 다다를 수 있는 문이 있음이 분명하다.
실전에 있어서 고도로 훈련된 선수들은 반복훈련의 자기 감각적 강화를 통한 사지의 정확하고 효율적인 통제가 가능해진다. 인지과정이 요구하는 반응시간에 관계없이 지각과 선택적인 행동의 동시 수행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경기의 상황과 상대와 자신의 조건에 대한 통찰력 있는 지적이해와 동시에 진행될 수 있는 의지적이지만 무의식적인 실천적 행동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보아, 더욱 더 인간적인 노력에 의해서 의식적 자아를 초월해 존재하고 있는 운명적인 행동을 개선할 수 있다고 믿을 수 있다.

현대에 와서 깨달음을 얻기 위한 방법으로 산속에 들어간다면 어리석고 미련한 짓이지만 깨달음의 정신인 천년 전의 사상을 이해하려하는 것은 지혜로운 것이다.
다른 한 편, 정보의 저장 용량과 처리속도에 따른 실천적 행동의 보조인 과학적인 방법들에 지나치게 의존하여 조화롭지 못한 편중된 지적이해는 수레 앞에 말을 놓는 또 다른 형태의 어리석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적절함이라는 모호한 개념을 구체적으로 해부하려는 연구보다는 그 적절함을 느낄 수 있는 구체적인 성실함에 관한 과학적인 방법론의 인문학적 해석에 대해 더 많은 관심과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인다. 어쩌면 그것이 중용이 말하는 지성의 참된 이해일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인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과학적이 아닌 인간적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아주 평범한 논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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