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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성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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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8월 21일 15시 48분 등록
싸움 ?! 2

사랑과 전쟁


‘ 누군가 그랬다. ’ 인생은 전쟁 아니면 사랑‘ 이라고 너희는 어느 쪽이냐? ’

‘ 전쟁입니다.’

‘ 그래,.. ... 전쟁을 하면 목숨이 가장 아깝지...
그러나 진실한 사랑을 하면 목숨도 건다.... 그렇지 않는가?
다시 묻겠다. 너희는 어느 쪽이냐? ‘

‘... ’

‘ 진실한 사랑이란 한 순간의 눈 마주침이나 누군가에게 선택 받는 것이 아니다. 매일의 삶 속의 성실한 훈련과 약속의 준수에 있다.‘

그래야만 승패에 구애받지 않고 신에게 감사할 수 있고 결과로부터 얻을 수 있는 것이 있다.‘
그래야만 자신과 사랑하는 것들을 존중할 수 있고 책임질 수 있으며 보호할 수 있고 잘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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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인간의 모든 역사는
‘사랑’과 ‘전쟁’ 그 두 개의 단어 속에 함축되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 두 단어는 인간의 삶과 세계에 대한 극단적인 두 얼굴이다. 그리고 그 둘은 항상 함께 있다. 어떤 형태의 사랑이든 어떤 형태의 전쟁이든 둘 중의 하나는 나머지 하나를 동반한다.
어떤 이는 자신의 민족을 사랑하기 때문에 전쟁을 하고 어떤 이들은 자신들의 신에 대한 사랑 때문에 전쟁을 한다. 어떤 이들은 사랑하는 자신의 가족을 위해서 전쟁을 하고 어떤 이들은 불행한 타인을 위해서 자신과 전쟁을 한다.

그런 사랑과 전쟁이 정당해진 것은 공평한 규칙 정당한 약속에 대한 준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조약돌 하나를 손에 쥐어 주든 손가락이 버거운 다이야 반지를 끼워 주든, 신과 주례 앞에서 맹서한 서약과 규칙이 삶 속에서 지켜지고 맞 짱을 뜨던 무데기로 칼부림을 하든 공개된 ‘생사장’에 자기의지로 서명을 하면 무대위로 들고 올라오는 모든 도구와 방법은 공평한 것이 된다

어쩌면 우리가 전쟁을 피하려 하고 사랑을 증오하는 이유는 그것 자체의 본질 때문이 아니라 공평한 규칙과 정당한 약속에 대한 합의와 동의가 없었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그래서 우리는 거짓된 사랑에 치를 떨고 억울한 죽음에 원한을 품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우리는 원치 않는 사랑 때문에 몸서리를 치고 억울한 몰매에 초인적인 광기가 발동하는지 모른다.

사랑과 전쟁 그 둘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것이 있다.
사랑의 반대말이 증오가 아니고 전쟁의 반대말이 평화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산중의 깨달은 자에겐 '무심'이고 세상속의 나같은 소인에게는 '무관심'이 되기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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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전쟁 그곳엔 항상 제 3 자가 있다.

우리는 그를 ‘심판’ 이라고 부른다. 그는 규칙과 약속의 수호자며 집행자다.
사랑과 전쟁은 인간의 본질적 충동이기에 항상 이성과 합리를 부수고 당사자를 맹목과 격정으로 치닫게 한다. 사랑과 전쟁의 격정과 맹목의 거센 풍랑 속에서는 규칙과 약속은 잊어버리거나 잃기 쉬운 빈약한 등대와 같다.
그래서 우리는 높고 강열한 변하지 않는 빛을 비추는 등대와 같은 심판자를 필요로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불 빛이 사라지거나 붕괴되어 위치를 잃어버린 등대는 의미가 없다. 규칙과 약속을 무시하거나 마음대로 바꾸어버리는 심판은 이미 심판이 아니다.
날씨의 변덕이나 풍랑의 높고 낮음을 이겨 낼 수 있어야 등대이듯이 심판은 어떠한 위협적 압력과 뒤엉킨 복잡함 속에서도 규칙과 약속의 원칙과 합의를 지킬 수 있는 능력과 신념을 가지고 있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도 그 등대를 의지하지 않을 것이며 단지 살고자 하는 본능과 육감으로 키를 잡듯 경기장위에서 배고픈 개싸움을 하고 회의장 안에서 더러운 패싸움을 하고 남의 땅에서 거짓 명분의 살인이 벌어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누구나가 심판자인지도 모른다.
경기를 주관하고 선수를 심판하는 것처럼 상사로서 업무를 주관하고 부하를 심판하고, 친구로서 우정을 지켜며 동료를 심판하고, 아버지로서 가족을 이끌며 자식을 심판하고 관중으로서 경기를 관람하며 경기내용을 심판한다.

원칙과 상식이 무너져가는 사회, 규칙과 약속이 지켜지지 않는 경쟁
공정한 심판을 기대할 수 있을까?
형식만 남은 원칙, 변칙적인 해석의 상식,
믿을 수 없는 편파적인 규칙, 생각없이 남발하는 약속,
껍질만 남은 제도나 법이 지켜질 수 있을까?
거기에 심판이 있기는 있는가?

누군가가 다음에 올 해방자는 ‘구원자’가 아니고 ‘심판자’라고 했듯이
어쩌면 우리를 구원해 줄 수 있는 것은 원칙과 상식, 규칙과 약속을 지키는 우리 자신이 아닐까 싶다. 너무도 당연한 하나마나 한 소린가?


무대위에서 상대 앞에서 절규하는 환호를 본 적이 있는가?
그런 인간의 행동 속에는 핏발서린 잔인함과 지극한 애정이 함께 묻어난다....

누군가는 기쁘고 누군가는 슬프다.

심판은 축하의 악수도 하고 위로의 악수도 한다.
심판은 그 둘을 동시에 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심판이 되면 무표정이 된다.

사람이 사랑과 전쟁으로 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 무심이나 무관심이듯이
심판이 절규와 환호로 부터 자유로워 지는 것은 무표정이며 무감동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하나는 내적이고 다른 하나는 외적이다.
그리고 '무심'이나 '무표정'은 깨달은 자의 해탈의 상징이지만
무관심이나 무감동은 세상속에서 무미건조한 삶을 사는 세인의 태도이다.

왜냐면 '무심'아나 '무표정'속엔 사랑과 전쟁이 있지만
'무관심'이나 '무감동'에는 그것이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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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한자식
2006.08.24 20:53:53 *.145.125.146
어렵네요...아직 제가 소화할 수 있는 건 아닌가 봅니다. ^^
아~한번 뵙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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