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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명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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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8월 22일 23시 32분 등록



노을을 보러 바다에 갔다. 노을은 꽝이었다. 은은하고 신비로운, 혹은 뜨겁고 환상적인 어떤 빛깔도 보여주지 않고, 해는 그냥 넘어가 버렸다. 그러나 해가 지고 어두워지기 까지의 바다는 아름다웠다. 그리고 이 바다에서 있었던 추억을 새록새록 생각나게 해 주었다.


어느새 내가 추억을 먹고 사는 나이가 되었구나 하는 생각과, 젊어서는 시간을 누리고 나이들면 공간을 누리고 산다더니 맞는 말이구나 하는 생각이 스쳐갔다.


우리 동네에서 40분만 달려가면, 안면도와 태안반도로 갈라지는 막다른 길이 나온다. 안면도로 좌회전하면, ‘바람아래’, ‘꽃지’, ‘백사장’이 있고, 태안 쪽으로 우회전하면, ‘몽산포’, ‘만리포’, ‘연포’같은 곳이 있다. 운전하기 싫어하는 나는 태안 방면에서 첫 번째로 부딪치게 되는 ‘청포대’를 단골로 삼은 셈이다.


조그만 바위섬에 앉아 난생 처음, 수면 위로 튀어 오르는 물고기를 본 곳도 여기였다. 아기 갈매기들이 수십 마리 내려앉아, 마치 수상스키라도 타듯 미끄러지며 걷는 장관을 본 것도 여기였다. 솔밭에 앉아, 달콤하게 취해 환상인지 득도인지 깨달음의 순간에 접한 적도 있다.



5월, 청포대

5월의 햇살아래 바다가 누워 있다.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게 정갈한 햇살에 반응하여 바다는 은밀하게 몸뒤척이고 있다. 아직은 선뜻한 솔밭 그늘에서 이 시대 발육좋은 아이들의 웃음소리 묻어온다. 내일은 저 아이들이이 족구를 즐기는 망중한이 되어 찾아올 것을 바다는 안다. 겨우 가마솥에서 옹솥가느라 저들이 겪었을 마음고생이 안쓰럽다. 적당한 취기에 실려 가느스름하게 눈떠보니 문득 모든 장면이 멈추는 적요...이승인지 저승인지 기이한 낯섬, 기이한 멈춤, 천년동안 계속되어 온 풍경...해안을 일별하며 조급할 것도 서러울 것도 없이 바다가 다시 한 번 몸을 뒤집는다.



학원에 유치부가 있던 몇 년 전, 이 곳에서 제법 크고 잘 생긴 털게 한 마리를 잡아 온 적이 있다. 아이들에게 보여주려는 욕심에서였고, 2-3일 정도 어린 원생들이 좋아라 하며 들여다 보고 놀았다. 그러나 하루가 다르게 힘이 빠지고 지쳐가며, 거품을 빼어 무는 그 놈을 바라보는 내 마음이 너무 불편했다. 이건 꽃게탕을 먹을 때의 심정하고는 다른 것이다. 아이들 주먹만한 그 게는 유독 집게가 크고 털이 부숭부숭해서 야썽을 드러내고 있었고 바로 그 점 때문에 내 손에 붙들려 온 것이었는데, 하루가 다르게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자연 속에서 건강하게 살던 놈을 잡아와서 하루하루 고문을 시키고 있는 형국이었다. 나는 기어이 그 게를 이 곳까지 와서 놓아주고야 말았다.


우리 아이들은 모래성을 잘 만들었다. 물기 촉촉한 모래를 한 줌 쥐어 주루룩 풀어놓는 방식인데, 계속해서 붙여 나가면 제법 봐 줄 만했다. 아이들이 모래성을 만들다 바다로 달려가면, 나는 그 모래성이 아까워 보초를 서곤 했다. 어느 날 그 모래성이 수많은 삼장법사로 보였다. 자연히 생각은 생각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청포대 엘레지

길의 끝 그리움의 끝
바다에서조차 나는 아웃사이더다
아이들은 바다로 가고
나는 아이들이 만든 모래성에서 보초를 선다
수많은 삼장법사가 땀훔치며
구도의 능선을 오르고 있는 형국,
나도 덩달아 언덕을 따라 오른다
시를 만나는 데 반생이 걸리다니
내가 돌아온 그 먼 길은
모두 徒勞였단 말인가
80년 6월항쟁이 터졌을 때
마산수출자유지역 콘베이어벨트 앞에 있었지
점심시간을 꼭 몇분씩 까먹는 조장이 얄미워
벌떡 일어나 벨트를 꺼버린 수상쩍은 여공하나
삼청교육대에 끌려가 10년짜리 상처입는 것
일도 아니었을텐데,
점심 먹을줄도 모르던 시어머니는 또 어땠던가
모판과 고추밭과 축사에서 흘린 내 땀은
아무것도 키우지 못하였다
내가 자청한 오류와 나를 피해간 운명,
어느새 다써버린 모래시계가 아파서
땀방울이 굵어지는데
돌연 아이들이 보이지 않는다
뒤돌아보니 내가 온 길도 지워졌다
천지에 까무룩이 안개가 깔리고
하늘은 목구멍 틀어쥐고 울음을 참고 있다


모래성을 쌓던 아이는 이제 사진을 찍는다. 그리고 나의 정서 역시 위 글을 쓸 때처럼 어둡지는 않다. 이제 이 세상 어떤 일에도 섣부른 비관이나 낙관을 하지 않을 정도의 연륜이 생긴 탓이다.


그러니 나이든다는 것도 좋은 일이다. 의연하고 꿋꿋하게 살아갈 수 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그 단조로움이 행복인 것을 안다. 단순한 일상에 번지는 작은 파문에 고마워할 줄도 안다. 내가 하고자 하는 일에 올인할 정도의 판단력과 실행력이 있다. 나는, 나이드는 것의 즐거움에 공간을 누리는 기쁨을 더하고자 한다. 청포대, 너를 나의 바다로 명명한다. 잘 있거라, 다시 오마. 그 때는 세상에서 제일 큰 캔버스에, 이 세상에서 제일 화려한 그림을 내게 보여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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