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재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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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환상보다 더 환상적인>
- 아핏차퐁 위라세타쿤 감독
혹시 중요한 회의장에서 잠시 동안 멍하게 전혀 딴 세계를 꿈 꾼 적이 있는가? 혹은, 집중을 해야 하는 시험 시간 중에 그 시험 내용과는 전혀 다른 뚱딴지 같은 생각을 한 적이 있는지. 태국의 아핏차퐁 위라세타쿤 감독은 전주 영화제 3인 3색 프로젝트인 이 작품을 통해 그러한 지극히 현실적인 공간 안에서 우리가 꿈꿀 수 있는 공간을 마법과도 같은 주술적인 언어로 불러낸다.
처음 영화는 산속에서 한 여성 가수와 백댄서들의 흥겨운 노래로 시작된다. 그들의 모습을 찍는 조명 기구들의 모습들도 보인다. 침묵만이 남아있는 어두운 산 속에서 흰옷의 가수와 백댄서라니. 그러나 그들을 찍는 장비만 보일 뿐, 그들을 찍는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이윽고, 등장한 스텝들. 그들은 조금 전 보았던 그 가수의 뮤직 비디오를 찍는 것이 아닌, 전혀 다른 영화를 찍는 듯 하다. 배우의 모습에서도, 그들을 찍는 스텝의 모습에서도 좀 전의 보았던 그 가수의 모습을 찾기는 힘들다. 이쯤 하면 관객들은 혼란스럽다. 아- 뮤직비디오와 영화가 동시에 촬영이 되는 산속의 모습을 보여주는 구나, 라고 생각하는 관객들에게 그는 좀 더 복잡한 주문을 외우기 시작한다. 즉, 진지하게 촬영하는 배우들의 모습 뒤로 소리가 새어나갈까 입을 막으며 웃는 스탭들의 모습들이 대비를 이루며, 배우들의 연기를 담은 화면과 매미의 울음소리, 그리고 숲속의 바람소리가 대위법을 이루어내면서 한 편의 실내악을 연주해낸다.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영화 ‘안’과 ‘밖’의 경계를, ‘숲 속’이라는 자연의 공간과 ‘영화’라는 매개체를 담는 인간의 공간을, 그리고 현장에서 늘 부딪히는 ‘현실’의 영역과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환상’의 공간, 그리고 전문 배우가 연기하는 ‘허구적 삶’과 자기 자신의 삶을 연기하는 개인들의 ‘실제 삶’ 간의 영역을 지워버린다. 세트장 속 스탭들의 움직임과 배우들이 연기하는 인물들간의 모습과, 춤추고 노래하는 가수와 댄서들의 모습이 무척이나 사실적으로 보이지만, 그 현실적인 환상의 울림은 그 어떤 상상보다 더 커다란 마법의 공간을 만들어낸다. 이 영화의 일상을 지루하지 않게 하는 것은 바로 그러한 가식 없는 평범한 일상이 불러오는 환상의 힘인 것 이다.
희뿌연 소독차가 연기를 뿜어내는 현실적인 방역의 범위 내에서도 우리는 환상을 꿈꾼다. 마치 내 몸에 붙어있는 모든 세균으로부터 해방될 것만 같은 상상을. 그러나 흰 연기가 걷히면, 이내 비린내 나는 방역의 냄새를 참아내야 한다. 자연과 일상, 바람과 흔들리는 나뭇잎으로의 일치. 모든 생명체가 다녀간 숲에 어둠이 밀려들고, 매미가 울기만 하는 한 여름 밤의 꿈. 이젠 그 어둠 사이로 소리 없이 노래 부르며 춤을 추는 요정들이 등장한다. 그들의 춤은 인위적인 공간 안에서의 춤보다 격렬하지도, 또 화려하지도 않지만, 그들이 주는 메시지는 날카롭고 그 울림은 더 과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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