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명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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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경의 책에 대한 리뷰를 쓰면서 새삼 느낀 바가 있다. 원래 내가 글을 풀어나가고 싶은 방향이 있었다. 그런데 자꾸만 외부의 시선을 의식해서, 될 수 있으면 내가 덜 드러나고, 될 수 있으면 무난한 쪽으로 글의 방향이 틀어지는 거다. 이렇게 되면 재미가 없다. 글을 쓰면서 느끼는 자기만족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통제에서 오는 스트레스가 생길 염려가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이런 것이다. 여성신학자 현 경과 나는 동갑이다. 같은 시기에 대학을 다녔기 때문에 시대적인 분위기나, 거기에서 느끼는 회한같은 것을 절실하게 이해할 수 있다.
게다가 현 경과 나의 기질은 거의 흡사하다. 세계를 무대로 하는 스케일이나, 세계적인 대학의 교수라는 지위 때문에 기질 간에 우열이 있다고 보지는 않는다. 단지 나는 기본적인 스타일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현실과 상식의 이름으로 우리를 옥죄는 모든 허위의식을 거부한다든지,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의미를 알기 위해 생의 끝까지 가 보고자 하는 벼랑중독자인 점이 같다.
그래서 글을 이렇게 풀어나가고 싶었다.
“그랬다. 70년대 말 그 시절에는 여기저기에서 몸을 던져 노동조건의 열악함과 군부독재에 항거하는 젊은이들이 있었다. 심지어 동료학생들의 살신성인에 충격을 받은 나머지 서울대에 다니던 여학생 하나는 ‘치열하게 살 자신 없는 자, 부끄럽게 죽을 것’이라는 유서를 남기고 자살하기도 했으니, 실로 가슴아픈 시대가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나는 전폭적으로 운동권에 몸을 담지는 않았다. 조금씩 함께 할 기회가 없지는 않았으나 젊은이 특유의 과격함이나 소영웅주의를 불신했다고나 할까. 그대신 나는 느끼고 있었다. 숨을 죽이고 유인물이나 대자보, 집회에 목숨을 거는 것보다, 저 광할한 대자연을 향유하지 못하고 억압되어 있는 농민의 삶이 나를 부르는 것을. 결국 현 경이 숨막힐듯한 70년대를 피해 미국유학을 갔을 때, 나는 강원도로 농사를 지으러 갔다. ”
그런 식으로 이후의 경험을 대비시키면서, “가지 않은 길”에 대한 회한과 동질성과 이질성을 부각시키고 싶었다. 그런데 지나치게 나를 노출시키는 것이 불편했다. 그래서 어정쩡한 글이 되고 말았다.
현 경의 글쓰기를 보라. 책의 내용이 논란이 많을 것 같다고 각계의 인사 60명에게 초고를 읽히고 의견을 수렴하는 과정이 나온다. “니가 연예인이냐, 너무 거칠다, 한국사회는 ‘다름’에 대해 잔인하다”는 많은 우려를 현 경은 일축한다. 단지 자신이 쓰고 싶다는 이유 하나 만으로.
그래서 현 경의 책은 살아있는 성장보고서가 되었다. 자유롭게 살고자 하는 많은 여성들에게 하나의 모델이자, 이론이자, 상징이 되었다. 나 역시 그런 글쓰기를 지지한다.
이성보다 터질듯한 생명력을, 구색을 맞추기보다 땅 끝까지 솔직한 것을, 그렇게 써야만 응어리가 터져 과거와 온전하게 결별할 수 있고, 다시 새롭게 출발할 수도 있다.
매체와 독자에 따라 글의 성격이나, 자기노출의 정도를 조절해야 한다고 말한다면, 할 말이 없다. 무난하긴 할 것이다. 집필양이 많은 전업작가라면 더욱 많은 가면을 가져야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래도 나는 생래적으로 솔직하고 담백한 사람인 것 같다.
언제 어느 자리에서고 어느 글에서고, 세련된 위장보다는 기꺼이 거친 진실을 택할 것이다.
마침 연구원 9월 미팅에서 구소장님께서, “나의 장례식에 온 사람들에게 하는 마지막 연설”을 준비하라고 하신다. 이런 주제는 나의 연배에 딱 적합하다. 아직 젊은 사람들에게는 이르고, 그만큼 절실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또한 이 의식이야말로, 머리카락 한 올까지 솔직하지 않고는 실효를 거두기 어려운 아이템이 아니든가. 눈물이 펑펑 쏟아질 정도로, 어긋난 인연과 실패, ‘가지않은 길’과 ‘하고싶은 말’을 토해내지 못한다면 의미있는 작업이 되지 못할 것이다.
내가 어느 정도로 ‘하고싶은 말’과 ‘보여지는 글’의 수위를 조정할 지, 아직은 정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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