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명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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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예회 수준의 촌극만 있던 우리 지역에서, 처음으로 연극다운 연극을 본 것이 영화 <왕의 남자>의 모태가 된 <이爾>였다. 爾는 ‘신하’라는 뜻이라고 한다.
연극의 흐름은 영화와 크게 다르지 않다. 광대패와 연일 여흥을 즐기는 연산의 앞에 어느날 반란군이 들이닥치고, 거기에 대고 연산이 소리친다.
“왜 멈추는거냐, 어서 계속하도록 해라. 죽으려니 놀고 싶구나”
나는 이 대사를 들으며 전율을 느꼈다. 내가 막연하게 지향하고 있던 문화와 예술이라는 영역이 이렇듯 처절하고 절박한 것이었던가, 하는 생각. 암만해도 ‘문화’, 하면 사업이나 종교에서처럼 치열한 느낌보다는 유유자적하게 ‘초월’의 영역이라는 선입견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조금 시간이 흘러, ‘놀이’는 단순히 문화예술 분야에 한정할 일은 아니고, 누군가 그 대가에 상관없이 무조건 마음이 가서 집중하고 즐길 수 있는 것은 모조리 ‘놀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무엇이든 일가를 이룬 사람은, 자신의 일을 놀이와 일치시킨 성과라는 생각도 들었다. 앞에서 거론한 세 사람의 “거인들”을 보라. ‘우리 것’에, ‘투자’에, ‘활동’에 필이 꽂히지 않고서야 평생을 그 분야에 그 강도로 헌신할 수 있었겠는가. 은퇴 후에 칠십을 바라보는 나이에 그만한 현장을 벌릴 수 있겠는가. 잭 웰치 역시 사업은 재미있어야 한다고 일갈했다. 구소장님이 늘 강조하시는대로,
“결론은 하나다. 멋진 인생을 살고 싶으면 하고 싶은 일을 하라. 그것으로 벌어먹고 살아야 한다.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 바로 살고 싶은 인생을 사는 것이다. ”
오래 전의 연극대사를 생각나게 한 것은 현 경의 친구인 목사 선순화의 유언이었다. 암으로 40대 중반의 나이에 타계한 그의 유언역시 “열심히 놀아라”였다.
그렇다면 이제 ‘무엇을 하고 놀 것인가’의 문제가 남는다. 일가를 이룬 사람들의 또 하나의 특징은 경험을 유실시키지 않고 계속 발전시켜 나갔다는 것이지만, 나는 10년 단위로 끊어진 그 경험들을 모두 단절시키고야 말았다. 그러면서 일말의 위안을 삼는다. 내가 살아온 시간, 에둘러 온 경험이 모두 녹아서 현재의 내 안에 있는 거라고. 내가 관심을 갖고 있는 몇 가지 영역을 살아가는 데 자산이 되어줄 꺼라고.
일단 나는 책과 글을 가지고 놀아보기로 했다. 시간이 많으니까 참 좋다. 웹서핑을 하는대로 낙수가 떨어진다. 뛰어난 재주야 없지만, 마음이 가는 일이니까 더 이상의 망설임은 없다. 무슨 일이 있어도 하루 8시간을 노동한다는 이윤기를 본받아, 꾸벅꾸벅 읽고 쓰고 할 참이다.
첫 번 째 책의 주제를 ‘시니어 시티즌’으로 바꾸어야 할 것같다. ‘조금 다르게 사는 사람들’이라는 애초의 주제와 우선순위를 바꾸어야 할 듯. 많이 돌아다니며 가서 살아보고, 인터뷰를 해야 하는 기획인데, 나의 지금 여건과 맞지 않기 때문이다.
휴전 이후 베이비붐 세대로 태어난 사람들, 대중적인 대학교육을 받아서 자의식이 강하고 자식에게 의존하지 않는 특징을 가진 신인류, 그들의 사회적 심리적 의미를 재조명하고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을 제안하는 기획인데, 분야자체가 새로운데다 지방에 거주하느라 자료를 찾을 길이 막막하다. 참고가 될만한 정보는 무엇이라도 좋으니, 귀뜸해 주시기 바란다.
저술가로서 자리잡기 위한 노력과 함께, ‘시니어 시티즌’의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을 실험적으로 개척해 나갈 생각이다. 얼마 전 콜라텍에서 숨진 노인들을 기사로 접하고 마음이 많이 아팠다. 이처럼 황폐하고 척박한 노인문화라니! 이 모든 기획은 전적으로 나 자신에 대한 탐구에서 나온다. 개인차원에서, 공동체적인 차원에서, 또 정책적인 차원에서 새로운 세대 ‘시니어 시티즌’의 삶에 도움이 될만한 어떤 시도라도 역시 귀뜸해 주시기 바란다.
죽음 앞에 맞닥뜨려서 “죽으려니 놀고 싶구나”라고 소리지르는 것은 얼마나 막막할까. 이제 더 이상 갖고 놀아볼 시간이 없다는 것. 내게 15분씩만 적선하라고 애원하지 않을 수 없다. 아직은 15분이 남아 있을 때, 죽기 전에 한 번 놀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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