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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명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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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9월 3일 18시 12분 등록


윤후명의 “꽃”에 거론된 한창기를 보았다. 이름만 알고 있는 잡지인이었다.
윤후명에 의하면, 한창기는 ‘우리 것’에 미친 사람이었다. 쪽을 가꾸기 위해 농장을 만들었을 정도. 지금은 조카가 그 업을 이어받고 있다. 인터넷 검색을 해 보았지만, 단편적인 요약을 찾을 수 있을 뿐이었다. 장석주의 인터뷰집에 속해 있으니, 언제고 찾아보아야겠다.



1. 한창기


출판·언론인. 1936 -1997
한국브리태니커회사의 대표이사를 역임했고, 월간 문화종합잡지〈뿌리깊은나무〉, 월간 여성문화잡지〈샘이깊은물〉의 발행·편집인이었다.


한창기는 광주고등학교를 거쳐 1957년에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에 진학했다. 그러나 자신의 진로가 법조계가 아님을 깨닫고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문화사업에 뛰어들어, 미국 시카고의 엔사이클로피디어브리태니커사에서 한국 땅에 영문판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Encyclopaedia Britannica〉을 보급하는 권리를 받아 큰 성공을 거두었다.


70년 한국브리태니커 회사의 사장, 85년 회사를 떠날 때까지 한국 직판업 제1세대의 전설적인 수장으로 추앙받았다.
1976년 3월에 〈뿌리깊은나무〉 창간호를 세상에 내놓았다. 이 잡지는 한글전용, 가로쓰기, 전문 미술집단의 지면배열 참여, 일관된 문화적 시각, 전통문화에 대한 애정어린 탐색 정신과 더불어, 입말과 글말, 지식인 언어와 민중 언어의 조화로운 합일과 국어의 얼개와 어휘에 두루 유념한 편집·교열 등으로 혁신적인 간행물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이 잡지는 한편으로 출판·언론인으로서 그의 지향을 선언한 물증이기도 했다. 그러나 〈뿌리깊은나무〉는 한글세대를 중심으로 폭넓은 독자층을 확보해가던 1980년 8월에 신군부 세력에 의해 공식적인 이유 없이 강제폐간되었다.


그 때부터 한창기는 출판활동에 진력해 1983년에 남한 땅 종합 인문지리지 〈한국의 발견〉 11권, <뿌리깊은 나무 민중 자서전> 20권, <브리태니커 판소리 전집> 등을 완간했다.


특히 1974년부터 '브리태니커 판소리 감상회'를 정기적으로 열어 100회가 되던 1978년에 끝냄으로써 판소리의 보존과 보급에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 1984년 11월 잡지 〈샘이깊은물〉을 창간.

한창기는 제국주의 일본의 잔재를 미처 털어내지 못하고 있던 한국 출판물의 내용과 형식에 진정한 근대성과 주체성을 부여한 최초의 출판 언론인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뿐만 아니라 출판활동을 통해 전통문화의 보존과 계승의 토대를 마련하는 데에 평생을 바쳤다.


출판을 통해 우리 문화의 뿌리를 발굴한 발자취가 선명했다. 이렇게 많은 일을 하느라, 풍류를 아는 댄디한 멋쟁이였다는 그는 비혼인 채 61세의 아까운 나이에 타계했다.



2. 워렌 버핏

뉴스에서 전 세계 2위의 거부, 워렌 버핏의 재혼 소식을 보았다. 그의 결혼 이력은 예사롭지 않았다.

부인 수전 버핏과 25년간의 결혼 생활 후 별거 시작, 별거 중에도 공식석상에 파트너로 나타나거나 여행을 같이 하는 등 좋은 관계를 유지. 2004년 수전이 타계한 지 2년 후에, 오랜 동거인 멩크스와 결혼식을 올린 것이다. 멩크스를 버핏에게 소개한 사람은 다름아닌 수전 버핏이었다.

수전이 사망한 후 버핏은 아내를 기리기 위해 수전 톰슨 버핏 재단을 설립했다. 한편 그는 지난 6월 재산 중 85%에 달하는 370억달러를 빌 & 멜린다 게이츠 재단 등에 기부했다.

워렌 버핏의 행보에는 인간에 대한 예우와 품격이 있었다. 가히 ‘오마하의 현인’다웠다.
마침 인터넷에 올라있는 그의 저택이 불과 5억원 정도의 소박한 집인 것을 본다. 그에게 투자와 분석은 하나의 ‘놀이’가 아니었을까. 자기의 재능에 집중하여 막강한 부를 얻었지만, 거액을 기부함으로써, 단지 부호에서 그치지 않고 유유자적 인생을 즐기다 가는 ‘현인’의 반열에 오른 워렌 버핏... 멋진 인생이다.


3. 박운서

호랑이같은 근성과 추진력으로 ‘타이거 박’이라는 별명을 가진 전직 관료, 사업가.
통상산업부 차관, 두산중공업 사장, 데이콤 회장 역임. 2004년 은퇴, 현재 68세.

부부동반으로 골프여행을 갔다가, 필리핀 오지의 열악한 환경에 경악, 깊은 묵상 끝에 정착을 결심.

"40년을 나와 가족을 위해 일했으니 남은 생은 이웃을 위해 살아도 좋다 싶었어요."

평균 수명 40세. 학교도, 경작할 땅도, 미래의 희망도 없다 보니 사람들은 게으르고 의욕이 없었다. '문명세계'와의 접촉이란 간혹 읍내 시장에 가 싸리 빗자루나 바나나를 파는 것이 전부. 생명줄인 소금과 등유를 사기 위해서였다. "아이들 맑은 눈망울을 보니 별 생각이 다 나데요. 다 같은 사람인데 너희는 왜 이렇게 살아야 하니…."


현장 조사 끝에 쌀농사를 짓기로 했다. 젊은 망얀족 부부들을 데려다 일꾼으로 키우고, 학교.고아원.병원 등을 설립하는 베이스 캠프로 삼기 위해서였다. 재단 이름으로 논 16㏊(5만 평), 그에 딸린 망고나무 밭 1㏊(3100평)를 샀다.
통신.도로.수도.전기. 사람 모여 사는 곳이라면 꼭 있어야 할 인프라를 모두 제 손으로 만들었다. 그 모든 일을 불과 6개월 만에 해냈다.

정부군과 지주의 경호원, 사회주의 무장세력과 원주민간에 심심치않게 무력다툼이 있는 곳에서, 그들 간에 협상을 이끌어내 원주민의 자립터전이 되게끔 했다니, 정말 대단한 사람이 아닐 수 없다.


이들의 공통점은, 자신의 분야에서 최선을 다 해 굵직한 업적을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자신과 가족의 울타리에 갇혀 있지 않고, 세상을 향해 활짝 열려 있었다. 세상은 아마 그들의 이름을 기록하겠지만, 명예가 그들의 목적은 아니었을 것이다. 자신의 마음이 가는 일에 전력투구한 것, 한 세월 제대로 놀다가는 것이 그들의 목적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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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간디
2006.09.07 16:20:31 *.200.97.235
좋은 사례네요. 제 카페에 고이 모셔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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