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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9월 4일 13시 25분 등록
멋이란 무엇인가

좋은 글자를 탐하는 나에게 멋처럼 괜찮은 단어도 없다는 생각이다. 우선 단음절로 끝나는 이 단어를 이야기하거나 글자를 보는 것만으로도 많은 사람에게 즐거움을 준다. 누군가 오늘을 즐겁게 살기위해 한 단어를 달라고 한다면 나는 기꺼이 이 단어를 주고 싶다. 멋이 얼마나 멋있는 단어인가. 또한 이 한 글자만 가지고도 자신의 인생을 바꿀 수 있다면 믿겠는가. 자신에게 매일 나는 멋있는 인생을 살 것이라고 주지시킨다면 단언하건대 그 사람은 멋있는 삶을 구가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것이 좋은 단어가 주는 힘이다.

나는 매일 사전에서 좋은 글자를 발췌한다. 그것이 하루에 하나에 불과할지라도 좋은 단어와의 시작은 하루일과를 상쾌하게 할 뿐만 아니라 어렵고 힘든 일도 효과적으로 처리할 수 있어 좋다. 그리고 많은 글자를 만나지만 멋만한 단어가 그리 흔치 않다. 멋의 사전적 의미는 간단하다. 멋 : (태도나 차림새 등에서 풍기는) 세련된 기품. 격에 어울리게 운치로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이 단어가 주는 의미는 가히 메가톤급이다.

멋은 우리 일상생활 모두를 아우르는 광범위한 영역을 확보한 글자다. 이 글자를 안 쓸 수 있는 영역은 존재치 않기에 이 글자를 쓰지 못하는 곳이 있다면 그 영역은 살아있는 터전이 아니라 죽은 자의 무덤일 뿐이다. 멋없는 곳에 누가 손길과 눈길을 주겠는가.

외국의 사전 모두를 뒤질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멋을 나타낼 수 있는 외국어를 찾아볼 수 없다. 또, 멋은 우리말이지만 우리말로도 풀이하기가 만만치 않다. 그 말에는 일반적 의미가 아닌 특수한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중국의 풍류(風流)나 서양의 유머는 한국의 멋에 가까운 것일 수가 있다. 그러나 풍류 ·유머는 멋의 한 속성(屬性)으로서 멋의 한 단면이 될지언정 멋이라는 개념의 전부가 될 수 없음은 물론, 부분적으로도 완전히 부합된다고 할 수 없다. 멋은 그만큼 우리의 독자성을 가지고 있는 말이다.

가령 영어에서의 ‘humour’ ‘fun’ ‘satire’ ‘wit’ ‘pun’ 등과 같은 말은 한국말의 농(弄) ·우스개 ·익살 ·재치 ·재담 등으로 번역한다 해도 크게 거리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dandyism’ ‘foppery’ ‘taste’도 맵시 ·취미 ·맛으로 번역될 수 있다. 그러나 멋은 위에 든 어떤 단어로도 번역되지 않는다. 그것들은 멋의 한 속성으로서 부분적으로 유사개념이 될 수는 있을지언정 멋을 뜻하는 전체로서의 일반개념으로는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니 멋이 풍기는 코리아니티는 으뜸 중에 으뜸이라는 생각이다. 우리 선조는 어떻게 이렇게 멋진 글자를 만들었을까. 한글날이 점점 다가오면서 한편으로 더 흐뭇한 생각을 지을 수 없다. 의미의 심오함으로 인해 많은 현인(賢人)들이 이 글자를 가지고 풍류를 즐겼다.

어느 현자(賢者)는 멋에 대해 이렇듯 상큼한 글을 남겼다. ‘멋은 아(雅)도 아니고 속(俗)도 아니다. 고아(高雅)하다고 하기에는 통속적인 면이 있고, 그렇다고 범속하다고 하기에는 법열(法悅)이 있다. 그렇게 ‘아’와 ‘속’을 넘나들며 그 어느 쪽에도 떨어지지 않는다. 고정되어 변하지 않는 것도 아니요, 또 그렇다고 고정되지 않는 것도 아니니, 멋의 정체는 한국 사람으로서도 바르게 파악하기 어려운 측면을 지닌다.’

멋은 맛에서 출발된 말이라고 한다. 두 말에는 음상(音相)의 대립이 있을 뿐 동의어라는 견해에 대해, 맛이 감각적 뜻을 지니고 멋은 감성적 뜻을 지닌다고 하는 주장도 있지만, 멋이 맛에서 출발된 말임을 인정하는 점에서는 공통된다. 그러나 맛은 다만 맛 그대로일 뿐이다. 다시 말하면, 멋은 어느 것이나 맛을 동반하지만, 맛은 어느 것이나 다 멋이 되지는 않는다. 흔히 아름다움을 멋과 혼동한다. 멋은 분명히 한 모습이지만 모든 아름다움이 멋은 아니다. 또, 멋은 생활풍속에 대한 애정이나 익숙해진 감정과 혼동되어서도 안 된다. 그 존재 양태의 여하에 따라 멋이 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을 뿐, 그 자체를 멋이라고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멋은 그야말로 다른 단어와 차별되는 감칠맛이 물씬하다.

또한 미적 탐구에 열성인 어느 현자(賢者)는 멋에 세 가지의 미가 함유되어 있다 한다.

① 형태미 : 멋이 나타낸 상태에 대한 관점이다. 그 첫째가 비정제성(非整齊性)이다. 이는 미술 ·음악 ·문학 등에서의 멋의 형태는 그 존재양태가 산술적이고 일률 ·정규 ·정상적인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 둘째가 다양성이다. 다양성은 단조로움에서 벗어나는 변화에의 의욕이다. 이 멋의 다양성은 ‘흥청거림’이라는 말로도 표현된다. 그 흥청거림 때문에 통일을 깨뜨리고 균제(均齊)를 벗어난다는 뜻이다. 셋째가 율동성(律動性)이다. 멋이란 본디 생동태(生動態)의 미로서, 만들어진 다음에 보는 것이라기보다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보는 미라는 뜻이다. 여기에는 움직이는 가운데 잠깐 그치는, 즉 단절(斷絶)의 멋도 포함된다. 빠르던 가락이 문득 그치면서 잠깐 쉴 때, 그 침묵의 순간 또한 멋을 주기 때문이다. 넷째로 들 수 있는 것이 곡선성(曲線性)이다. 곡선미가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이 한국의 춤이다. 소리꾼들의 ‘엮고’ ‘휘이고’ ‘흥청거림’ 또한 곡선성의 표현이다.

② 표현미 : 표현미로서의 멋은 멋이 나타나게 하는 구성력이나 표현방법의 문제이다. 멋의 표현적 특질로서 기초가 되는 것은 초규격성(超規格性)이다. 격(格)에 들어갔다가 다시 나오는 비규격성이다. 그 같은 멋 표현의 첫째로 들 수 있는 것이 원숙성(圓熟性)이다. 멋을 체득하고 그것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먼저 원숙한 기법이 있어야 한다. 이미 있는 기법을 터득했을 때 비로소 자신의 멋을 지닐 수 있게 되는 법이다.멋 표현의 둘째는 왜형성(歪形的)이다. 정규형식에서 벗어나 약간의 왜곡이 형성될 때 생기는 멋이다. 멋 표현의 셋째는 완롱성(玩弄性)이다. 그것은 원숙에서 오는 잉여성(剩餘性)과 왜형에서 오는 해학성이 그 바탕이 된다. 다시 말하면, 여유와 유희의 기분에서 우러나는 표현원리이다. 구성진 소리들이 그렇고, 어깨와 손끝의 미묘한 율동을 보이는 춤이 그러하다. 문학에 나타나는 익살이나 재담 ·해학들 또한 그것이다.

③ 정신미 : 정신미의 첫째 특질은 무실용성(無實用性)이다. 순수한 미적 충동이란 본디 실용적인 것은 아니다. 다만, 실용성이나 공리성(功利性)과는 관계없는 미적 충동이 생활과 결부되면서 생활예술이 발생했다는 것뿐이다. 둘째로 들 수 있는 것이 화동성(和同性)이다. 멋에는 대립과 갈등이 없다. 조화와 질서와 흥취의 세계이다. 이 화동성은 고고성(孤高性)과 통속성의 양면을 동시에 지닌다. 속중(俗衆)과 더불어 즐길 수도 있되 그 오욕됨에는 물들지 않고 높고 깊은 경지에 노닐면서도 고절(孤絶)에 빠져들지는 않는다. 멋 정신의 셋째는 중절성(中節性)이다. 멋은 비실용성이므로 사치성이 있다고 하겠으나, 직접적인 사치의 상태는 아니다. 사치만으로 될 때 멋은 깨어진다. 높은 교양과 고매한 사상이 뒷받침되어야 하고, 수련과 절제가 따라야 한다. 멋의 감정은 방종과 탐닉이 아니고 지적인 절제에 의하여 영도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균형과 조화를 잡는 중절(中節)에 정신적인 멋이 있다. 멋 정신의 넷째는 낙천성이다. 멋의 참다운 마음자리는 낙천성이다. 이 낙천성은 조화와 절도(節度), 성실과 유락(愉樂)을 바탕으로 하여 유유자적하는 경지를 말한다. 멋의 유락은 외부에서 찾지 않고 자신의 내부에서 찾는 것이며, 변화의 상태가 아닌 한적한 상태에서 찾는 낙도(樂道)의 경지이다. 그것은 선비정신이 찾던 마음자리이기도 하다.

참으로 멋에 대한 놀랍고도 해박한 풀이이다. 멋이 멋진 글자가 아니고서야 어떻게 이렇듯 다의적 의미로 이야기 될 수 있겠는가. 꽃보다 짙게 풍기는 농후한 향기를 가진 글자가 아닐 수 없다.

미적 측면을 떠나서 내가 가장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진정 우리 내 삶의 멋은 무엇인가이다. 어떻게 하면 멋을 품으면서 아니 멋 향기를 날리면서 살 수 있을까. 삶에서 멋이 가지는 의미 말이다. 여러 사람들이 이야기 했지만 무엇보다도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라 본다. 남의 지시나 남의 간섭에서 벗어나 자기만의 재능을 발휘하고 스스로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을 할 때 삶의 멋이 풍기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찾은 변화경영연구소의 구 본형선생님은 멋을 아시는 분임에 틀림없다. 그 분은 자신이 좋아서 하는 일을 하고 계시지 않는가. 그것도 지극히 즐거운 마음으로 아름다워지려는 사람에게 도움을 주면서 하니 그 멋에서 풍기는 향이 더욱 짙은 것이 아닌가.

멋의 또 다른 중요성은 자신이 느끼는 멋보다는 타인이 느끼는 멋이 더욱 빛난다는 사실이다. 내 자신이 아무리 멋을 알고 멋을 품고 멋을 머금고 멋을 부리고 멋을 탐닉한다해도 남이 보지 못하고 남이 인식하지 못하는 멋은 멋의 대부분을 잃게 된다. 그래서 멋에는 다음과 같이 세 가지를 구비할 경우에 베어나옴을 일깨워주고 있다.

① 능력을 구비해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능력은 힘이나 권위, 또는 재력을 뜻하는 말이 아니다. 어떤 분야든 자기 일을 훌륭하게 수행할 수 있는 실력이다. 멋은 삶의 여유가 없이는 일구어 낼 수가 없기 때문이다. 멋의 본 질이 ‘미적 가치’에 있고, 아름다움이란 ‘조화’에서 이루어지는 데, 그러기 위해서는 넉넉한 마음 의 여유가 필요하다.

② 남을 위하는 마음가짐이 중요하다. 멋은 ‘내’가 아닌 ‘남’을 위하는 마음가짐에서 가장 많이 드러난다. 잘못된 멋이기는 하지만 우리 가 몸치장을 하는 것도 사실은 자신의 즐거움에 앞서 남에게 잘 보여지려고 하는 욕망에서 비롯된다. 여기서 말하는 ‘이타(利他)’, 즉 남을 위하는 마음은 남에게 잘 보여지려는 마음이 아니라, ‘베푸는 마음’이다. 베푸는 마음 역시 ‘여유’를 필요로 한다. 아득바득 사는 사람에게는 이런 여유를 찾을 수가 없다. 베푸는 여유를 갖는 사람에게서는 평화롭고 아름다운 멋이 자연스럽게 우러나게 된다.

③ 조화로운 삶의 태도가 필요하다. 이 대목은 ‘멋’을 보다 종합적으로 보는 안목을 말하고 있다. 어느 한 부분에 뛰어난 사람은 전문가적인 모습은 보일지 몰라도, ‘멋있는 삶’은 아니다. 낭만, 해학, 예술, 문학 등을 통해 자신의 삶을 조화롭게 다듬는 자세가 필요하다. 말하자면 인생에 있어 ‘여백’을 가져라는 말이다. 늘 쫓기는 사람에게는 초조하고 긴장된 모습만 나타난다. 그런 사람이 재미있는 일이 있어 웃는다고 해서, 그 게 멋으로 나타나지는 않는다. 자신의 삶에서 긴장을 완화할 수 있는 이런 여백을 갖는 마음 자세 가 필요하다

멋은 정말 좋은 글자이다. 멋을 가지고 멋과 더불어 자신의 삶을 바꿔본다면 그보다 가치 있는 일이 또 다시 있을 수 있을까. 이미 멋을 힘껏 풍기는 구 선생님과 변화경영연구소 그리고 연구원 모든 분들도 멋들어진 삶을 가꾸는 데 멋을 함빡 부려보기를 권하고 틀림없이 멋있는 삶이 자신의 곁에 머무리라 믿는다.

왜냐하면 멋은 힘들에 얻어지는 게 아니라,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사느냐에 따라 만들어지는, 쉽게 실천할 수 있는 덕목의 하나이기 때문이며 그분들은 이미 이를 실행해 옮기고 있음을 나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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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간디
2006.09.07 16:06:05 *.200.97.235
사실 제게 멋은 그렇게 바람직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멋쟁이하면 날라리가 떠올라으니까요? 아마도 어릴 때에는 공부를 하기 싫어하는 아이들을 이해하지 못한 적도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지금은 저도 멋을 좋아합니다. 겉멋과 속멋이 어울리는 아름다운 멋쟁이, 저는 아마 비유적으로 멋쟁이가 되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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