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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

여러분이

  • 김성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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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9월 4일 22시 52분 등록
5. 살아서 돌아와 보니...

그렇게 나는 사부님의 간곡한 당부를 외면했다.
나는 살아남기 위해서 마음속에 타고 있는
이유를 알 수 없는 마음 속의 불길을 태우고 또 태우고 있었다.

‘누구든 내 길에 걸리면 닥치는 대로 죽이겠다’

이길 수 만 있다면 팔이라도 잘라주고
천년동안 벌을 받더라도 이길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하겠다는
마치 살인이라도 할 것만 같은 생각으로 경쟁에서 살아서 돌아오면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외로움과 또 다른 불가능한 경쟁이었다.
그래도 나는 두려워하지 않으며 망설여지 않았다.

왜? 그것은 옳은 것이고 정당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일 개 코치인 내가 자신을 위해 살지만
세상 속에서 가족과 조국과 협회와 선수를 위해서
의미 있는 작은 삶이고 모두가 승인한 정당한 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꾸역꾸역 살아서 돌아오는 나는 많은 사람들에게 필요하지만
위험한 존재가 되어가고 있었다.
조국과 협회를 위해서 희생정신을 가지고 성실하게 운동하고 정직하게
행동한 대가로, 부당한 것들을 함께 나누며 ‘우리’라고 말하는 그들에게
나는 믿을 수 없는 위험한 놈이 됐다.
생존을 위한 전쟁 속에서 내가 목숨을 걸고 지킨 신의와 배려는
‘세상이 그러는데 어쩌겠습니까, 제가 힘 있습니까?’ 로
걸레조각처럼 팽개쳐졌다.
조국에 대한 사명감 아래 밤새워 연구하고 허리 부러져 가며
훈련한 노력은 훈련을 빠져 가며 술자리를 마련하거나
남몰래 찾아가는 한 차례의 인사만도 못한 것이었다.

내가 받은 대가는 피 말리는 시합이 끝나면
‘수고했어. 김코치!’ 하고 악수 한 번해주며
‘대단해’ 하며 어깨 툭 치고 가는 빈정대는 말투 정도밖에
가치가 없는 것이었다.
나는 그렇게 독불장군으로 낙인찍혀가고 있었다.

협회를 위해 내가 거두어들이는 성과는
몇몇이 부정을 축적하고 반발을 억누르는 확실한 명분이었다.
정치놀음과 더 많은 축적을 위해서 없어져버리는 돈,
빠듯한 경비 10시간씩 차를 몰고, 삼등 침대칸을 타고 시합을 다니며
몸부림치고 있을 때,
그들은 술을 마시며 ‘그 놈, 재주 좋아, 이 번에도 할 수 있을까?’였다.
그건 기적이야 라는 성적을 내고도 나는 지금까지 협회로부터
그 흔한 표창장 한 장도 받아 본적이 없다.

나는 돈에 관해서는 단 한 번도 언급을 하지 않았다.
그들이 나를 선택하는 것은 내가 펜싱을 잘 가르쳐서라기 보다
훈련과 운동 외에는 군말이 없고, 그래서 챙길 것이 더 많고,
선수들을 말썽 없이 잘 관리해주기 때문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광기를 부리며 기적같이 살아서 돌아온 내게 훈련기간이 끝났으니
다음 훈련기간이 시작될 때까지는 수당이 없단다.
먹고는 살아야 되지 않냐는 내말에 ‘자식이 성적 좀 냈다고 건방지다는 표정이다. 그것이 정직하게 예의를 갖추고 인내하며 산 내가 받는 대가였다.
‘선생님, 양다리를 걸치셔야 됩니다.
고개 숙이고 적당히 살면서 챙길 것 챙기고 모른척하고 살아야죠...
괜히 나서서 깝죽대다 찍히면 피곤하거든요..

그들이 내게 배운 것은 바르게 살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옳든 옳치 않든 세상에 어울려서 선배들 말대로
나처럼 거슬리며 피곤하게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한 때, 한 솥 밥을 먹으면서 죽도록 노력한 그들에게
나는 영양가 없는 선배여서 ...

선배들 챙기는 거 그동안 보고 있다가 이제
우리 차례가 됐는데 내가 들어오면 득이 안 되고 불편하니
절대로 다시 들어오게 해서는 안 된단다 ㅎㅎㅎ
노선배가 그런다. ‘ 그 밑에 붙어사는 요즈음 놈들은 더 해... ’

당연히 그렇겠죠, 자식은 부모를 닮는 법인데
선배들이 하는 걸 보고 자랐으니 그들은 분명 그보다 더하겠죠...

그렇게 더 슬프고 내가 침묵해 버리려고 했던 것은
열심히 가르쳤던 후배 같은 제자 선수들에게 걸었던
우리 모두가 조금은 더 나은 세상에서 함께 살 수 있을거라는
미래에 대한 기대가 한심하고 철없는 착각이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들 누구에게도 예는 갖추되 고개 숙이고 싶지 않다.
내게 한 쪽 눈을 감으라는 선배의 조언을 결코 받아들일수 없었다.
그것은 내가 살아온 지난 세월을 부정하라는 것이다.
그럴수 있는가? 나는 그럴 수 없다.
대신에 ... 배가 없으면 강바닥을 기어서라도 강을 건널 것이다.

왜, 나는 잘 훈련되어 있다.

결코 지치지 않으며, 멈추지 않으며 포기하지 않기 때문이다.


6. 더불어 살려고 했더니....

‘어쩔수 없이‘ 칼을 뽑아서는 안 된다는 사부님의 당부 때문에
나는 정말로 멀고 먼 길을 가야만 했다.

내가 이 금빛 물가에서 신과 스승과 부모에게 경배할 수 있기 까지...

규칙과 약속을 잊어버린 남의 것으로 배 채운 사람들에게
닭갈비(계륵(鷄肋))같은 나의 존재를 잊기 위해서 ....

내 안에서 타고 있는 불길...
그 불길이 타고 탈수록 칼날을 세우며 전의(戰意)를 다짐하던
나를 정화시킬 수 있기까지...

‘남자는 스스로 일어서서 강자가 되고 자기 자신과 남을 위해
무언가 할 수 있어야 한다‘ 는 .
내 자식에게 물려주고 싶은 단 한마디를 책임질 수 있기 위해서...

이제 전쟁터를 향해 불사의 정신으로 돌진하던 말안장 위에서 내려와
지나온 삶과 노력의 경험 속에서 얻은 상흔들과 지혜를
내 자식들과 함께 나누며 조용히 살기 위해서...

내가 넘었던 그 높고 높은 산들만큼이나
내 안의 골짜기는 깊고 깊었고
골짜기를 다시 헤매야만 했다.

그래서 또 다시 밤을 새워 원서를 읽고
귀에서 진물이 나도록 이어폰을 꽂고 중국어를 배우고
10시간 동안 렛슨을 받고도 두-세시간 잠을 자며
박사과정 공부를 하고 연구의 전문성을 키웠다.
어떠한 억울함과 어려움 속에서도
선수를 내 자식의 생명만큼 소중하게 생각하고
약속을 지켰다.

그래서 나는 술 마시고 어울리며 세상을 한탄하는
대신에 공부를 하고
투서하고 모략하고 더러운 똥 피하듯 비켜다니다가
마주치면 어쩔 수 없이 고개 숙이며 돌아서서 침을 뱉는
대신에 마당을 청소하고 개 똥을 치우며
새로운 세계 사람들과 새날을 준비했었다.

나머지 삼십년을 연민과 회한을 곱씹으며
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내 자식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아버지이고 싶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물가에 작은 연구소를 만들고
자라나는 젊은 세대들에게 내가 걸었던 멀고 먼 길을
질러가 더 멀리 갈 수 있도록 도우며 그들과 희망을 나누고 싶었다.

그것이 함께 더불어 사는 삶이 아닌가?


그러나 나는 노선배가 내게 전해주는 그 한마디를 듣고
그렇게 살 수 없다는 것을 알 게 되었다.

‘ 왜 그렇게 김성렬이를 미워하시요, 도대체 이유가 뭐요... ’

‘그 이유가 말이지, 네가 기분이 나쁘단다,’

내가 있다는 그 자체가 기분이 나쁘답니다. 허허...


그래!

그렇다면 아마겟돈에 올라야지...
나는 당신한테 모든 기회를 주었는데 당신은 날 죽이지 못했으니,
이제 내가 칼을 뽑겠다.
IP *.75.166.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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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살이
2006.09.05 10:00:47 *.192.80.9
이현세의 만화, 아마게돈 너무 흥미진진하게 보았던 기억이 납니다.
최후의 전쟁쯤될까요... 그런데 마지막에 보면 아마게돈은 결국 일장춘몽에 지나지 않습니다.(물론 모든 것이 꿈은 아니라는 암시로 잠에서 깬 주인공의 침대 위에는 광선총이 놓여져 있긴 하죠)
평화를 소극적으로 볼 때, 전쟁과 전쟁의 사이쯤으로 파악하더군요.
김성렬님께서는 결국 아마게돈(므깃도의 언덕)에 오르고자 결심하신 것 같은데, 그렇다면, 그것은 분명 최후의 전쟁이되어야 할 텐데...
이 그후로 쭉 평화... 말이죠...
과연 그것이 가능할까요?
하루의 삶 속에도 전쟁과 평화가 수없이 반복되는데...

이 모든 것이
한 여름 밤의 꿈일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보셨으면 합니다.

------------------ endless Armagedd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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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렬
2006.09.05 16:44:16 *.75.166.117
^^ 아마겟돈은 신들의 전쟁터죠... 아마,,,

나는 내 안의 그들과의 전쟁을 마침니다.

그들에 대한 심판은 이 땅위에서
그런 일을 직업으로 가진 사람들의 몫이지요...

분명한 한 것은 법과 제도와 윤리의
집행자가 형식과 명분과 관계에 얽혀
진실을 밝히지 못하면

보호받지 못한 자는
그것들의 반대 편에 서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자신 일상 속에 있는 삶의 집행자이며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의 집행자입니다.

자신의 일과 자신의 삶의 공정함이
타인의 자신에 대한 공정함을 신뢰할 수 있는
믿음의 기본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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