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명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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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온 지 오래되었다. 내 나이에 친정엄마는 손주를 보셨다. 가끔 내 나이가 믿기지 않아서 어리벙벙할 뿐, 뭐 굳이 나이를 내세울 생각은 없다. 다행히도 외부와 교류가 별로 없어 세상이 내 나이에 기대하는 통념에서 자유로운 편이다. 게다가 오랫동안 초등학생을 가르치는 학원을 했기 때문에 하는 짓이 초등학생 수준이다.
예를 들면 이런 것, 어느 코미디프로엔가 ‘누나’라는 꼭지가 있는데 재미있다고 했다가 고3 딸애에게 쭁코먹었다. 사실 제멋대로 생긴 ‘누나’가 왜소한 동료를 개패듯 하는 무식한 내용인데, 왜 그걸 재미있어 했을까. 휴유. 당시 내가 가르치던 초등학교 5학년 놈의 눈높이로 내려갔기 때문이었다. 요즘 애들이 매너없고 표피적인데 비해 그 놈은 귀한 늦동이로 늘어지기는 해도 반짝 하는 감수성이 신기한 아이였다. 들어주고 웃어준다는 것, 겨우 그것이 그토록 어렵고 그토록 고무적이란 말인가. 그 애가 ‘누나’를 재미있다고 했던 것이다.
말 때문에 사람 참 많이 버렸다. 말이 안 통하는데 도대체 왜 만나서 노닥거려야 한단 말인가. 아니 노닥거리는 것이 가능하기나 한가 말이다. 주로 신변과 상식에 갇혀 있는 ‘아줌마’형 대화를 인내할 수 없었지만, 권위나 표리부동 같은 낌새에도 내 마음은 닫혔다.
내게 손 내미는 동창에게 시간을 나누어주지 못했고, 의례적으로 좋게좋게 지내고자 하는 동료원장들과 어울리는 것도 한 두 번이었다.
지난 번 연구원 미팅 때, ‘나의 장례식에서 하는 연설’을 발표하다가 동창들 -나는 감히 친구라는 표현을 사용할 수가 없다-에게 사과하는 대목에서 눈물이 터졌다. 스스로도 놀랐다. 우리 나이는 이제 서로서로 애경사 챙겨줘야 하는 나이라던 주희, 성실하기 그지없던 효정이, 뉴질랜드로 이민가서 엽서를 세 장이나 보냈는데도 답장을 받지 못한 선중이에게 내가 그만한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단 말인가? 아니면 절절한 외로움? 초상집에 가서도 제 설움에 운다더니 입 밖에 내지 못한 나의 말, 당연히 너에게로 가 닿지 못한 나의 말이 서러워서? 어쨌든 내게 손 내민 사람들에게 시간을 할애하고 배려하기는 커녕 다른 언어를 인내하지도 못하고 살아왔다. 그러다보니 어? 말이 좀 되네 하는 상대에게도 어떻게 손 내밀어야 하는지 그 방법을 알지 못한다. 요컨대 나는 ‘더불어 산다는 것’을 모른다.
혼자놀기의 진수에 글쓰기가 있다. 교내 백일장에서 장원은 못하고 가작은 하던 시절, 내가 이 나이에 글쓰기에 매달리게 되는 예정이라도 있던 것일까. 입 밖에 내지 못한 그 많은 말들이 이제 튀어나오려고 정신없이 분주한 것일까. 순수문학을 할만한 오기나 지향점은 없고, 고미숙이 ‘나비와 전사’에서 말하듯, 문학도 아니고 문학아닌 것도 아닌 그 어디쯤에 내가 위로받을 곳이 있을까.
IP *.81.22.224
예를 들면 이런 것, 어느 코미디프로엔가 ‘누나’라는 꼭지가 있는데 재미있다고 했다가 고3 딸애에게 쭁코먹었다. 사실 제멋대로 생긴 ‘누나’가 왜소한 동료를 개패듯 하는 무식한 내용인데, 왜 그걸 재미있어 했을까. 휴유. 당시 내가 가르치던 초등학교 5학년 놈의 눈높이로 내려갔기 때문이었다. 요즘 애들이 매너없고 표피적인데 비해 그 놈은 귀한 늦동이로 늘어지기는 해도 반짝 하는 감수성이 신기한 아이였다. 들어주고 웃어준다는 것, 겨우 그것이 그토록 어렵고 그토록 고무적이란 말인가. 그 애가 ‘누나’를 재미있다고 했던 것이다.
말 때문에 사람 참 많이 버렸다. 말이 안 통하는데 도대체 왜 만나서 노닥거려야 한단 말인가. 아니 노닥거리는 것이 가능하기나 한가 말이다. 주로 신변과 상식에 갇혀 있는 ‘아줌마’형 대화를 인내할 수 없었지만, 권위나 표리부동 같은 낌새에도 내 마음은 닫혔다.
내게 손 내미는 동창에게 시간을 나누어주지 못했고, 의례적으로 좋게좋게 지내고자 하는 동료원장들과 어울리는 것도 한 두 번이었다.
지난 번 연구원 미팅 때, ‘나의 장례식에서 하는 연설’을 발표하다가 동창들 -나는 감히 친구라는 표현을 사용할 수가 없다-에게 사과하는 대목에서 눈물이 터졌다. 스스로도 놀랐다. 우리 나이는 이제 서로서로 애경사 챙겨줘야 하는 나이라던 주희, 성실하기 그지없던 효정이, 뉴질랜드로 이민가서 엽서를 세 장이나 보냈는데도 답장을 받지 못한 선중이에게 내가 그만한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단 말인가? 아니면 절절한 외로움? 초상집에 가서도 제 설움에 운다더니 입 밖에 내지 못한 나의 말, 당연히 너에게로 가 닿지 못한 나의 말이 서러워서? 어쨌든 내게 손 내민 사람들에게 시간을 할애하고 배려하기는 커녕 다른 언어를 인내하지도 못하고 살아왔다. 그러다보니 어? 말이 좀 되네 하는 상대에게도 어떻게 손 내밀어야 하는지 그 방법을 알지 못한다. 요컨대 나는 ‘더불어 산다는 것’을 모른다.
혼자놀기의 진수에 글쓰기가 있다. 교내 백일장에서 장원은 못하고 가작은 하던 시절, 내가 이 나이에 글쓰기에 매달리게 되는 예정이라도 있던 것일까. 입 밖에 내지 못한 그 많은 말들이 이제 튀어나오려고 정신없이 분주한 것일까. 순수문학을 할만한 오기나 지향점은 없고, 고미숙이 ‘나비와 전사’에서 말하듯, 문학도 아니고 문학아닌 것도 아닌 그 어디쯤에 내가 위로받을 곳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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