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빈
- 조회 수 2372
- 댓글 수 5
- 추천 수 0
9월 26일 수요일 - 밤줍기
연수원 출장 둘째 날입니다. 아침 5시에 일어나 '그리스인 조르바'를 40페이지 가량 봤습니다.
아침을 먹고 나니 같이 온 동료직원이 밤을 주우러 가자고 합니다. 연수원 주변에는 밤 나무가 몇 그루 있습니다. 왠지 재밌겠다 싶어서 따라 나섰습니다.
동료는 시골에서 나서 자란 터라 이런 일이 익숙한 모양입니다. 금새 밤나무 밑으로 달려가 여기저기 숨어있는 밤톨들을 줍기 시작했습니다. 도무지 제 눈에는 잘 안보이는데 말입니다. 10여분을 하다보니 이제야 눈에 좀 익어 저도 조금 주웠습니다.
줍는 도중에도 ‘후두둑’ 소리를 내며 연신 떨어집니다. 송이채로 떨어질 때도 있고 알맹이만 떨어질 때도 있습니다. 밤 가시는 꽤 억세기 때문에 자칫 잘못 덤비다가는 호되게 찔립니다. 벌어진 양쪽을 발로 잘 밟아서 알맹이를 빼내야 합니다. 잘 익은 밤송이는 모양이 아주 이쁩니다. 열십자 모양으로 벌어진 사이로 윤기있는 밤 알갱이가 두세 개 들어있습니다. 알갱이가 모두 토실토실하면 두개 정도 들어있고 세 개가 들어있는 경우에는 한 두 개 정도만 쓸만하고 나머지는 삐쩍 말랐습니다. 자리가 좋은 놈에게 양분을 모두 빼앗긴 모양입니다.
적당히 줍고 나서 큰 밤나무 옆에 앉았습니다. 멀리서 한 남정네가 밀집모자를 쓰고 작대기로 들깨를 후려치고 있었습니다. 바람이 선들 선들 불어오고 연방 밤 떨어지는 소리가 들립니다. 짧은 시간 동안이지만 미래의 한 모습을 본 것 같습니다. 이 여유로움 이 자연스러움이 좋았습니다.
조르바를 만난 건 행운입니다. 나는 오늘도 조르바에게서 많은 것을 배우고 있습니다. 그의 삶에 대한 태도가 나와는 아주 다릅니다. 오히려 희야가 비슷하겠군요. 매 순간에 몰두하는 모습, 생동감, 살아있다는 느낌, 솔직한 몸짓, 숨김없는 자연스러움… 오늘 이런 것들을 배웠습니다. 조르바를 다 읽고 나면 좋은 글을 한편 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모든 형이상학적인 근심인 언어에서 나 자신을 끌어내고 헛된 염려에서 내 마음을 해방시킬 것. 지금 이 순간부터 인간과 직접적이고도 확실한 접근을 가질 것”
조르바를 보고 느낀 주인공의 말입니다.
댓글
5 건
댓글 닫기
댓글 보기
VR Left
번호 | 제목 | 글쓴이 | 날짜 | 조회 수 |
---|---|---|---|---|
4109 | 노력하는 자체가 성공이다 | 빈잔 | 2024.11.14 | 715 |
4108 | 인생을 조각하다. | 빈잔 | 2024.10.26 | 722 |
4107 | 얻는것과 잃어가는 것. | 빈잔 | 2024.11.09 | 757 |
4106 | 눈을 감으면 편하다. [1] | 빈잔 | 2024.10.21 | 762 |
4105 | 돈 없이 오래 사는 것. 병가지고 오래 사는것. 외롭게 오래 사는 것. | 빈잔 | 2024.10.22 | 808 |
4104 | 길어진 우리의 삶. | 빈잔 | 2024.08.13 | 811 |
4103 | 늙음은 처음 경험하는거다. | 빈잔 | 2024.11.18 | 840 |
4102 | 상선벌악(賞善罰惡) | 빈잔 | 2024.10.21 | 847 |
4101 | 문화생활의 기본. [1] | 빈잔 | 2024.06.14 | 1002 |
4100 | 선배 노인. (선배 시민) | 빈잔 | 2024.07.17 | 1034 |
4099 | 꿈을 향해 간다. [2] | 빈잔 | 2024.06.25 | 1166 |
4098 | 신(新) 노년과 구(舊) 노년의 다름. | 빈잔 | 2023.03.30 | 1583 |
4097 | 가장 자유로운 시간. | 빈잔 | 2023.03.30 | 1590 |
4096 | 편안함의 유혹은 게으름. | 빈잔 | 2023.04.28 | 1629 |
4095 | 나이는 잘못이 없다. | 빈잔 | 2023.01.08 | 1637 |
4094 | 원하는 것(Wants) 과 필요한 것(Needs) | 빈잔 | 2023.04.19 | 1672 |
4093 | 내 삶을 지키기 위한 배움. | 빈잔 | 2022.12.27 | 1738 |
4092 | 변화는 불편하다. | 빈잔 | 2022.10.30 | 1739 |
4091 | 1 % [2] | 백산 | 2007.08.01 | 1759 |
4090 | 끝남과 시작의 길목에서 [2] | 최정임 | 2006.02.24 | 178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