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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명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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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9월 29일 16시 42분 등록
아침에 경빈씨가 공들여 쓴, 시집 두 권에 관한 리뷰를 읽었어요. 시를 모른다, 어떻게 읽어야 할 지 모르겠다 하면서 멋진 시 한 편을 썼더군요. 덩달아 나도 이 햇살 고운 아침에 쓸 것이 생겨서 고마워요. 나는 불과 5년 전 쯤 처음 시를 읽기 시작했지요. 그러니 경빈씨는 얼마나 일찍 시를 접한 거예요! 이쯤에서 우리네 고등학교 교실도 떠오르지요. 적지않은 시를 접하지만 마음으로 만나는 일은 없이, 모조리 분석과 해부와 암기였지요. 누가 씁슬한 글을 쓴 것이 생각나네요. 모처럼 시를 읽어보자고 시 한 편을 제시하면, 아이들이 소리친다는 거예요.
“돈호법!”, “생명파!”
이런 식이지요. 무엇보다 감수성이 예민한 그 시기에 ‘느낀다’는 기능을 잠시 저당잡히고 나면, 언제가 되어야 다시 느낄 수 있게 될지요.

어쨌든 나는 내가 처음으로 시를 만난 시점을 정확하게 기억한답니다. 그즈음, 뭔가 자꾸 내 안에서 나오고 싶어 꿈틀댄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짧은 메모 같은 것을 끄적거리다가 제대로 시를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동네서점에서 무작위로 몇 권의 책을 골랐지만, 당최 뭐가 뭔지 의미전달이 잘 되지를 않았지요. 그러다가 임영조 시인의 ‘지도에 없는 섬 하나를 안다’를 읽었는데, 비로소 시인이 말하는 것을 알아들을 수 있었어요. 육십 줄에 들어선 시인의 예술과 사랑에 대한 열정을 주로 노래했는데, 이 시집을 읽으면서 겨우 알았지요. 은유와 상징으로 난해한 시가 좋은 시가 아니라는 것, 내가 좋아할 수 있는 시가 얼마든지 있으리라는 것.
임영조의 싯귀 두 구절을 소개해 볼게요.


“내 어눌한 음치로 혼신을 다해
필생의 한 곡만 불다 가게 하시라
해와 달이 화답하는 만만파파 피리소리
그 소리에 나도 놀라 무릎을 치며
이승떠도 전혀 섭섭지 않게”


“화냥년 개짐풀듯 참꽃이 핀다.
꽃술에 붉은 반점, 요염한
따먹어도 먹어도 허기지는 꽃
너와 내가 한 시절 몸을 섞다 간다면
그 자리엔 무슨 꽃이 불타오를까
꽃방망이 줄게 이리온!”


그후로 약 2년 정도 시 덕분에 위로를 많이 받았지요. 내가 납득할 수 있는 시 한 편을 만나면 그렇게 좋을 수가 없고, 시 비슷한 것을 한 편 완성한 날에는 날아갈듯이 기뻤지요. 요즘은 책 보는 재미에 빠져 시에 조금 뜸하지만, 시가 우리의 좋은 친구라는 사실은 잘 알고 있지요. 음악이나 산책과 마찬가지로 늘 함께 하면서, 대화를 나누고 기쁨과 위안을 받을 수 있는 좋은 친구지요!

경빈씨도 말했듯, 메모나 일기를 시로 써 보는 것도 좋아요. 매일 걸어다니다가 불현듯 춤이 추고 싶을 때가 있듯이, 매일 설명하고 납득시키는 어조를 사용하다가 문득 노래가 하고 싶어지듯이, 시는 노래이고 춤일 뿐이지요. 우리네 일상의 구석구석에 시 아닌 것이 없답니다. 조금은 무료한 가을의 어느 오후, 베란다를 내다보고 서 있는 주부의 시선이 여기 있어요.


뜨거움이 잠시 다녀감

붉은 그물망 속에 빼곡하게 들어찬 양파들의
둥근 어깨가 외롭다
서로 등 기대고 싶은...

채반 위에 가지런히 널린 표고버섯들의
가는 발목이 슬프다
꼼짝없이 발목 잡힌...

펑퍼짐한 둔부를 천연덕스레 내놓은 청둥호박의
외설이 서글프다
지독한 섹스로도 풀리지 않는...

소쿠리 가득 담긴 못생긴 단감들의
수다가 쓸쓸하다
속이 허한 것들의...

어느날 오후에 우리 집 좁은 베란다에 내려와 유난히 추위를 타는 것들과 번갈아 놀아주다가 한순간 냉정하게 돌아서는 따가운 가을볕의 수작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훔쳐보았다네. 뒷모습이 아름다운 가을 햇빛이 무척 부러웠다네. -이인원-


일상성에 숨어있는 화자의 욕구가 잡힐듯하지요? 시인이 제 안에 갇혀 꼬이고 돌아가고 뒤틀리고 늘려놓은 언어에는 신경쓰지 말아요. 우리가 쓰는 입말로도 얼마든지 감동적으로 인생의 단면을 노래할 수 있지요.


토막말

정순아 보고자파서 죽겄다 씨펄,
씨펄 근처에 도장찍힌 발자국이 어지럽다
무슨 막말이 이렇게 대책도 없이 아름다운가
둘러보아도 아무도 없는 가을바다
저만치서 무식한 밀물이 번득이며 온다
바다는 춥고 토막말이 몸에 저리다 -정 양-


어때요, 우리도 덩달아 보고싶은 이름에 욕붙여서 한 번 불러보고 싶어지지 않나요? 시가 꼭 슬픔이나 가라앉은 정서를 노래한다고 볼 것은 없어요. 내게 감흥을 불러일으키느냐, 않느냐 그것이 중요하겠지요. 저절로 입가에 미소를 피어오르게 하는 이런 시도 있으니까요.


아, 오월

파란불이 켜졌다.
꽃무늬 실크 미니스커트에 선글라스 끼고
횡단보도 흑백건반 탕탕 퉁기며
오월이 종종걸음으로 건너오면

아, 천지사방 출렁이는
금빛 노래 초록 물결
누에들 뽕잎 먹는 소낙비 소리
또 다른 고향 강변에 잉어가 뛴다. -김영무-


딱딱한 책이 어울리지 않는 시공간이라면 슬쩍 시를 끼워넣어봐요. 내 추천이 유효할지는 모르겠지만, 짧고 쉬운 유머와 해학이 필요할 때는 반칠환을, 여성의 세련된 자의식을 엿보고 싶으면 김선우를, 마흔 넘은 남자의 자기연민이 필요하면 정철훈을, 시로 승화된 품격있는 무소유로는 이면우를 권하고 싶네요. 제 흥에 겨워 말이 길었네요. 어느새 오전이 훌쩍 지나갔어요. 오후에는 10월 필독서가 도착할테니, 그 또한 좋은 일이군요. 내 얼마 안 되는 詩作 중에서 제일 낫다는 평을 받은 것으로 하나 옮기며 이만 맺을게요. 여러분 모두 좋은 오후를!!


꽃 지고 난 후

노란 붓꽃은 잠시잠깐 피었다 지고
칼날 성성한 이파리가 여름내
씨방을 키우고 있다
꽃은 졌어도 아직 남은 해 길어
이파리 더욱 푸르고 날카로운데
꽃보다 더 무거운 슬픔으로
꽃보다 더한 열정을 식히느라
씨방은 날로 침울해져 간다
꽃시절 다 보내고
왜 이제와서 사랑인가
무거워진 씨방이 고개를 주억거린다


IP *.81.18.167

프로필 이미지
경빈
2006.09.30 08:30:18 *.217.147.199
좋다 좋다 좋다 좋아요!!
시도 좋고, 한선생님도 좋고, 사부님의 가르침도 좋고, 다 좋아요.
아! 좋다! 시가 있는 마을...
종종 시를 읽을께요. 9월에 시 읽기를 잘한거 같아요.^^

토요일에 일하러 불려나왔지만, 글 한편에 모든 게 훌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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