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커뮤니티

살다

여러분이

  • 한명석
  • 조회 수 1581
  • 댓글 수 7
  • 추천 수 0
2006년 9월 30일 21시 40분 등록
꼬마아티스트에게 그림자아티스트가


감기 기운이 있나 2, 3일 늘어지던 몸이 오늘은 좀 낫군. 조금씩 살아나는 기운이 느껴져. 날씨는 변함없이 좋아. 대책없이 뜨거운 열기를 살짝 걷어낸, 투명한 햇살이 너무 좋군.
엊그제 통화할 때, 땅 속으로 기어들어가던 너의 목소리가 걸린다. 지나치게 대범한 이 엄마는 뭐가 되었든, 니 시간은 니가 꾸려나갈꺼구, 니 문제는 니가 해결할꺼라는 믿음 아래 미주알 고주알 참견할 생각은 없다만, 조금 마음이 안 되었던 건 사실이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북적대며 낮에 있었던 일도 이야기하고, 허물없이 남들 흉도 보고, 뭐 해 먹을까 고심 끝에 차려진 밥상에 둘러앉아 그렇게 하루가 가는건데, 외가에서 뜨악하니 차려준 밥 뚝딱 먹고 니 방으로 물러앉아 혼자 보낼 시간이 짠하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또 그렇구나. 세상에는 니 나이에 대학 문을 밟아보지도 못하고 생활전선에 뛰어들어야 하는 아이도 있는거구, 불의의 사고로 청천벽력같은 사태에 접한 사람도 부지기수일꺼야. 혼자 지내는 것도 아니고 외가에서 지내며, 저녁시간에 언뜻 스치는 외로움 같은 것에 의미를 너무 많이 두지는 말자. 오히려 대학 2학년 2학기, 군대 가기 직전의 이 금싸라기 같은 시간을 어떻게 올올이 살릴 것인가, 그 고민을 많이 하자 우리.


너는 혼자 놀 줄 아는 아이였지. 자동차에서 레고, 레고에서 로봇으로 이어지며 쏟아지는 너의 집중력이 좋았다 엄마는. 바다에서 네가 만든 모래성을 지나가던 사람들이 사진찍어 갈 때, 엄마가 얼마나 자랑스러웠는지. 네가 해변에 뒹굴어 다니는 스티로폼과 깃발을 배치해서 무언가 만들려고 낑낑댈 때, 설치미술이 따로 있느냐며 흡족하던 마음.


우리가 같이 스케치를 하면 네 그림이 훨씬 돋보였지. 내 그림이 둔하고 거친 데 비해, 너의 스케치는 섬세하고 느낌이 살아있었어. 나는 네 안에서 꿈틀거리는 표현을 본다.
“뭐 좀 하고 싶은 일이 있었으면 좋겠어” 지친 목소리로 니가 말한다. 안타깝지만 그 시절이 지나가 봐야 그렇게 좋은 시절이었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기에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 그러나 그것은 모든 가능성이 열려있기에 하는 투정이란다. 세상이 너를 향해 열려있는데, 무얼 먼저 집을지 몰라 하는 어린아이의 응석같은 것이다.


가까운 예로 니가 한 가정의 가장이 되어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처지라고 상상해 봐. 일년에 열흘 정도의 휴가가 전부일 뿐, 몇 십 년을 직장에 나가야 하는 직장인이라고 가정해 봐. 대학생활이 얼마나 축복받은 시절이겠니. 많은 장애인들은 또 어쩌구? 어제 묵은 <한겨레 21>을 들척이다가 쇼킹한 기사를 접했다. ‘장애인의 성욕은 유죄인가’하는 내용이었는데, 우리가 무심히 외면하기 쉬운 문제를 젊은 감독이 독립영화로 부각시켰구나. 마흔 일곱 살의 주인공 아저씨가 외친다.
“한 번도 못해봤어! 아아, 진짜 미치겠다! 진짜 미치겠다! ”
한 일본인 증증장애인은 두 개의 커다란 산소통을 24시간 달고 산다. 그런데 그가 생명보존 장치인 산소통을 떼어놓을 때가 있다고. 섹스할 때다. 왜 목숨을 걸듯이 하느냐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물론 숨쉬는 건 어렵지만 어린아이처럼 여자 가슴에 파묻히는 게 좋아요. 죽을지도 모르지만, 그때는 그때고, 성은 삶의 근원, 그만둘 수 없어요.”


어떠냐, 세상에 고맙지 않은 것이 없고, 세상에 의미없는 것이 없겠지? 나만 해도 모래시계를 얼추 써버리고 난 다음에야 철이 들기 시작했으니 할 말은 없다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더 니가 시간을 허비하지 않기를 바라는거지.


서두가 길었구나. 막 읽고 난 책을 너와 공유하고 싶었다. 줄리아 카메론이 쓴 <아티스트 웨이>라는 책이야. 뉴욕에서 ‘창조성 프로그램’을 이끄는 전방위 예술가야.
그녀는 모든 사람 안에 창조성이 있다고 말해. 그런데도 현실적인 조건이나 두려움 때문에 우리가 이 창조성을 발휘하지 못한다고 하는구나. 자신의 가치를 너무 낮게 평가해 자기가 예술적인 꿈을 갖고 있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하는 그림자 아티스트가 자기 안에 꿈틀거리는 꼬마아티스트를 잘 대접했을리는 없는거지.


그러나 어떤 평가를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 안에서 터져 나오는 것이라면 한 줄짜리 시라도 써야 하는 거라고 줄리아 카메론은 말하는구나. 저마다의 염원, 상처, 부끄러움을 드러냄으로써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해방시켜야 한다고 말하는구나. 예술은 새로운 무언가를 억지로 생각해내는 것이 아니라 자기 내면에 있는 것을 자연스럽게 적는 것이래. 그래서 자신을 표현하려는 사람은 누구나 우선 표현할 자신이 있어야 하는거지. 안톤 체홉이 말한대로
“예술가가 되고 싶으면 인생에 충실하라”


저자가 말하는 아티스트를 굳이 세속적인 의미의 예술가와 매치시킬 필요는 없을 것같아. 더군다나 성공을 지상 목표로 하는 예술가와는 달라. 우리 모두 우리 삶을 하나의 예술로 만들어야 할 책무가 있잖아. 제각기 자기 삶을 표현과 희열과 춤으로 채울 수 있는 아티스트... 아주 넓은 의미의 아티스트지.


무책임하고 잔인한 외부의 평가나 현실적인 조건, 권태나 무의미의 심연, 나 자신의 두려움에서 벗어나 온전하게 나 자신으로 살기 위해서는, 내가 진정으로 무엇을 원하는지 내부의 목소리에 귀기울이고, 내 안에서 꺼내달라고 칭얼거리는 어린아이를 어떻게 감싸주고 키워야 하는지 그 방법을 알려주는 책이야.


주된 방법은 두 가지야. 하나는 아침에 일어나자 마자 머리에 떠오르는 것을 써내려가는 모닝페이지야. 이것은 문학의 형태를 띠고 있지만 문학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어. 상식의 이름으로 나를 공격하는 센서를 피하고 , 미지의 세계에 남아있는 우리의 꿈을 불러내는 작업이야. 자기검열을 피하기 위해 8주 동안은 다시 읽어볼 필요가 없고, 물론 남에게 보여줘서도 안돼.
그저 뭐가 되었든 써내려 가는데, 놀라운 것은 이 안에서 모든 질문과 대답이 가능하다는거지.


다른 하나는 내 안의 꼬마 아티스트와의 데이트야. 이상적인 조건이라면 내가 하고 싶은 일들, 작지만 확실한 사치를 하면서 내 안의 창조적인 의식에게 영양공급을 하는거야.
시골길 걷기, 일출이나 일몰 보러 혼자 해변에 가기, 드럼세트 사기... 나 자신을 보물처럼 소중히 여기는 것이 나를 강하게 만든다는 거지. ‘돈이 없는데..’같이 흔한 변명거리는 하지 말래. 그 아이가 원하는 것은 사치스러운 여행이 아니라 ‘관심’이니까.


놀랍게도 줄리아 카메론은 ‘동시성’에 대해 말하고 있군. 위의 두 가지 방법을 일단 시작한 사람은 미처 깨닫지 못할 정도의 속도로 변해가는데, 신이라는 아티스트는 다른 아티스트를 좋아하기 때문에, --- 우리가 변하면 우주는 그 변화를 더욱 심화 확장시킨다. ---


시작-행동은 그 자체에 마술과 은총, 힘을 갖고 있어서, 그 누구도 이런 식으로 일어나리라고 생각지 못했던 온갖 종류의 사건과 만남, 지원이 솟아오른다는거지. 그리고 이 모든 것은 바로 ‘시작한다’는 결단에서 비롯된다는거지.


그러니, 아들아. 이 맑고 투명한 가을날을 권태와 무의미로 가라앉히지 말았으면 좋겠구나. 젊음으로 가득찬 강의실과 캠퍼스가 꽃자리인 것을 깨달았으면 좋겠구나. 살아있다는 것이 고맙고 흥겨워서 웃으며 울었으면 좋겠구나.


2006. 9. 21 오전
점점 더 밝아지는 햇살을 보며 엄마가 쓴다.
IP *.81.17.3

프로필 이미지
꿈꿰 no6
2006.09.21 11:13:18 *.35.191.194
감사합니다. 마치 저한테 해주시는 말씀처럼 아주 달콤하게 받아먹었습니다. 제가 머리 속에 그리고 있던 부모의 모습이 바로 이런 모습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많은 아들들에게 감동을 주셨습니다.
프로필 이미지
야옹이
2006.09.21 14:28:56 *.56.151.106
이번 가을.. 놓치지 않겠습니다. 고맙습니다~!
프로필 이미지
도명수
2006.09.21 17:53:39 *.57.36.18
세월과 시간의 소중함을 아들에게 전했군요
충분히 아드님이 알았으리라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앞으로 새로운 세계가
명석님의 꿈을 채워줄 것입니다.

청명한 가을하늘만큼 밝은 미래가
펼쳐진 가슴에 가득 담기길 기대합니다.
프로필 이미지
원아이드잭
2006.09.22 00:02:19 *.140.145.80
저도 우리 청빈이가 님의 아들 또래가 되면 님과 같은
충고를 해줄 수 있을까요? 솔직히 아들은 님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머리로는 모두 이해하지 못할겁니다..

그럼에도 확실히 알 수 있는게 있을겁니다. 님께서 자신을
매우 사랑하고 있으며 가슴으로 이야기 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 말이 넘 가슴에 와 닿네요..^^ 그래서 저도 신은 사랑합니다..

'우리가 변하면 우주는 그 변화를 더욱 심화 확장시킨다'
프로필 이미지
경빈
2006.09.22 12:46:37 *.217.147.199
너무 좋은 글이네요.
아는 사람들에게 여기저기 보여주고 싶어요. 지금 막.
프로필 이미지
다뎀뵤
2006.09.23 06:16:04 *.228.97.60
^^
프로필 이미지
자로
2006.09.24 08:12:54 *.118.67.80
내 뱃속에서 나온 아이가 장성해 어른으로,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 듬직하게 들어서는 것을 보는 것 같군요.
누구나 새겨들어야 할 좋은 길찾기를 알았네요.
지금 막 깨어 뒹굴뒹굴 책을 보는 우리 아이들이 정말 예뻐 보여요.
애네들에게도 좋은 길이 있음을 알려주어야겠네요.
덧글 입력박스
유동형 덧글모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