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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성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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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10월 1일 23시 57분 등록
감성 대 이성

만행을 가던 선사와 제자가 보름달이 뜬 길에서 나누는 대화다.

‘저것이 무엇이냐?’

‘보름달 인데요!’

‘이 놈 가리키는 것을 보지 않고 손가락을 보느냐?’‘저것이 무엇이냐?’

‘길이 밝아 다행입니다.’

‘이 놈아, 거울은 왜 닦느냐? ’‘저것이 무엇이냐?’

‘쉬었다 가시지요,’

‘깨달음을 자비를 위해 있느니라!’

과학적인 방법론을 배우는 것은 나로서는 힘겨운 일이다.
1 편의 review논문을 쓰기 위해서 최소한 7-80편정도의 선행 연구들은
읽어야 하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어려운 개념들로 뭉치고
뭉쳐서 굳어진 형식의 틀에 기계적으로 정리해나가는 그런 문장을 쓰는
일이 어려워서도 아니다.
다만 나는 거기에서 살아있는 생명력을 발견하지 못하기 때문에
답답한 것이다. 자신을 이해하고 타인을 이해하기 위해서 인간을
이해하려는 것이었는데 어떻게 하다보니 인간은 이해하는데 개인은
이해하지 못하는 불행한 일이 일어났다.

인간행동이 확률적 수치로 전환되고 예외나 실패는 오차나 오류 값으로
정의되어지는 내가 알고 이해하고자 했던 세상과는 영 거리가 먼 그런 것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래도 다행인 것이 요즈음에 와서 다층적인, 다차원적인 이라는 조금은
복잡한 법칙의 ‘통합적인’ 이라는 패러다임 아래 이리저리 그림조각
맞추기를 하고 있다.

다 늙은 나이에 공부를 하는 것은 사실을 알려고 그리고 그것들을 정교하게
분석하고 그럴듯하게 정리해서 흡족해하려고 그러는 것이 아니다.
끽해봐야 몇 백 권의 책, 몇 천 편의 논문을 읽어서 공리나 법칙을 암기하고
통계적 상관관계나 효과크기를 알아내려는 것이 아니다.

조금은 한심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사람을 올바로 사랑하는 법을 배우고
싶은 것이다.

그것이 서양 사람처럼 삶에서 죽음으로 이어지는 하나의 연속선상에서
이루어지든 아니면 동양적인 사고처럼 순환하는 윤회적 고리 속에서
이루어지든 무엇이, 어떻게, 왜 이루어지는가를 밝히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데...’ 라는 것 에 대한 해답을 얻는 것이
지금의 내게는 더 중요하고 절실한 이유이다.

가리키는 손가락을 보지 말라는 것은 이미 오래된 이야기다.

시자에게 달을 가리키는 노승의 마음은 몸만 시자와 같이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도 그와 함께 있고 싶은 것이다. 그게 보름달인줄 모르겠는가?
조금만 더 생각하면 그게 길을 밝혀 주는 것을 모르는가?
과학적인 방법론을 배워서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이 무엇이고 왜, 어떻게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를 아는 것도 과외공부에 석사 박사를 나와야 하겠지만
그런 공부를 하고 나서도 쉬어가며 이야기 나누고 싶은 노승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듯 세상 속에서 조직과 윤리적 관행과 효율성에 갇혀 있다면
무슨 소용일까 싶다.

누군가를 가르치며 살아가는 방식이 속이 썩어 문드러지고 열을 받아도
선생이고 코치고 부모이기 때문에 보다 더 합리적인 방법론적 교수법으로
가르쳐야 되는 것이 아니고 성인과 현자의 가르침과 오랜 사회적 윤리와
도덕이 그래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먹고 살기 위해서 경쟁하고 비교하고 견제하며 산다면 그것은 더욱 굴욕적
일 것이다.
대부분의 그러한 가르침들은 의미나 가치가 없거나 잘못되어 있고
거짓명분으로 위장된 야심이나 권력 또는 기대로 인해 눈이 멀어 있기
마련이다.

어린 아이가 길을 잃었다.
집을 나가고, 잡혀 돌아와서도 주위의 모든 권유와 배려를 거부하며
막무가내다... 부모들과 선생들은 화가 났지만 나는 그들에게 말했다.
당신들의 눈에 보이는 길은 지금 저 아이의 눈엔 보이지 않는다.
지금, 저 아이의 눈에는 떠나버린 남자친구에 대한 섭섭함이 우리가
가르치고 알게 하고 싶은 모든 것보다도 더 크다....

어쩌면 그것을 이해 해주는 것이 그 아이를 진짜 사랑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해해 준다는 것이 방임이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이 스스로의 마음의 문을 열게 하는 것일 수도 있다.

내가 써 놓은 글에 화를 내는 누군가에게는 내가 쓴 글의 의도나 마음을
논리정연하게 반박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그 글을 읽고 화를 내는
사람의 과거와 삶의 주변의 감성들을 떠올리며 진실한 마음으로 미안하다고
말하는 짧은 한 줄의 말이 그를 더 편하게 해줄 것이다.

한동안 .. 사람들이 사실과 진실을 이야기하는 데,
왜 서운해 하고 섭섭해 하는지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 당시야 나는 그들이 논쟁에 지고 부당한 생각을 해서라고 생각했었는데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서 알게 되었다.

인간이 아무리 노력해도 이성을 중심으로 살아갈 수 있는 존재가 아니고
더 본질적이고 더 생태적인 감성적인 존재라는 것을...
그래서 그가 사실을 밝히는 것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또 그렇게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이
사실이기를 기대하고 있다는 것과 이해는 되지만 마음 속에 일고 있는
더 근본적인 충동과 욕구들을 어찌할 수 없다는 것을 말이다.

어린 아이의 그런 약간 빗나간 열정이 세상을 다시 볼 수 있는 계기가 되고
다 큰 나의 실수 아닌 실수는 다른 사람의 또 다른 내면을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합리의 연속선상에 놓여 있는 모순을 이해하고
잘 할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더욱 어려워지는 삶에 대해
조금은 더 근본적으로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현대에 와서 과학적으로 아니면 이성적으로라도
정확성을 따라다니는 오차 값이 결코 장애가 아니라
창조라는 새로운 가능성을 열 수 있는 도약의 열쇠라는 것,
반복되는 회전력이 주기성을 띄게 되는 순간에
축적되는 가속도에 의해 임계 값을 넘으면 궤도를 이탈해가듯이
삶의 안정이라는 일터를 찾고 아침저녁 출퇴근의 궤도에 들어가는
순간에 이미 권태는 시작되고 변화의 갈망이 꿈틀대고 있다는 것이다.

치밀한 개념과 형식 속에서 인간의 속성을 이해하듯이
정갈한 문장과 세련된 전개 속에서
정화되고 승화된 인간의 감성을 느끼듯이,
거칠고 과격한 저항과 과도한 혼란속에서
상처받은 감성을 읽을 수는 없을까?

무의미한 일상의 반복과
대조적으로 이유 없이 바쁜 일상 속에서
지치고 피곤한 감성의 외침을 이해할 수는 없을까?
거창하고 복잡한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생각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납득이 갈만한 일이다.

역사 이래 인류가 축적해온 지식으로 무장한 이성이 2000 년이라면
인류가 500,000년 동안 무의식 속에 물려온 감성을
지배하고 통제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인 것 같다.

인간의 감성적 행동을 그렇게 정의나 합리의 칼을 들이 대어
비젼이나 행복이란 이유로 숨통을 조이는 것보다는
열정이나 창조적인 몸짓으로 이해하고 균형이나 관계를 조절하여
나아가도록 하는 것이 진정한 변화고 비젼이며
행복에 이르는 길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이성적으로 고민했던 그 모든 일들은 지나가지만
그 감성적인 느낌은 사라지지 않고 기억 속에 남아
우리의 삶에 관여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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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탄
2006.10.02 21:45:06 *.81.21.43
성렬님은 생각을 아주 많이 하는 분인가 봐요, 어려워서 다 이해할수는 없지만, 아래 내용에는 저도 동감입니다. ^^


내가 써 놓은 글에 화를 내는 누군가에게는 내가 쓴 글의 의도나 마음을 논리정연하게 반박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그 글을 읽고 화를 내는
사람의 과거와 삶의 주변의 감성들을 떠올리며 진실한 마음으로 미안하다고 말하는 짧은 한 줄의 말이 그를 더 편하게 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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好瀞
2006.10.02 23:29:19 *.142.242.188
알듯말듯 어렵네요.
저 역시 성렬님의 글 너머의 감성을 느껴보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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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렬
2006.10.03 00:16:00 *.75.166.117
읽어 주시고 댓글을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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