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커뮤니티

살다

여러분이

  • 정재엽
  • 조회 수 2019
  • 댓글 수 0
  • 추천 수 0
2006년 10월 8일 17시 50분 등록
아직까지 우리나라에 '브라질' 영화에 대한 인식은 많이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기억을 더듬어 보면, 1998년 베를린 국제영화제에서 최우수 작품상과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월터 살레스 감독의 ‘중앙역’(1998)과 얼마전 개봉한 브라질 빈민가를 사실적으로 그린 페르난도 메이렐레스 감독의 ‘시티 오브 갓’(2002) 등이 소개된 정도일 것이다.

그러나 실은 영화사적으로 볼 때 '시네마 노보’(신 영화)라 불리우는 굵은 한 획을 그은 대표적인 나라가 바로 브라질 이다. 넬슨 페레이라 도스 산토스, 글라우버 로샤 등의 감독들은 60년대 군사정권의 통치와 검열에 맞서 싸우면서 브라질 고유의 민중문화를 강조한 ‘시네마 노보’를 창조했는데, 이 영화들은 정치적으로는 권위주의에 대항하면서 영화적으로는 픽션, 다큐멘터리에 상관없이 할리우드영화의 ‘웰메이드’를 거부하며 한계적인 상황에서 ‘열대주의’나 ‘카니발리즘’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인간의 원초적인 기쁨과 열망을 표현했다.

그러한 시네마 노보의 대표작인 '마꾸나이마'가 얼마전 한국에서 상영되었다. 브라질의 소설가이자 음악평론가인 마리오 데 안드라데의 동명 소설이 원작인 이 영화는 우리에게 낯선 땅인 브라질의 모습을 보여준다. 영화는 마꾸나이마가 태어나는 첫 장면부터 불편하게 만든다. 남자의 몸에서 (후에 마꾸나이마와 1인 2역이다) 선 채 흑인 중년으로 태어나는 장면이 바로 그것이다. 나래이션은 계속해서 그를 '영웅'이라 부르며, '중년의 흑인'인 '마꾸나이마'는 인공 젖꼭지를 물고있다. 그의 식구들 또한 그를 돌볼 리 없다. 아무런 세트없이 그저 정글에 놓여있는 천막집이 영화초반부 공간의 전부이다. 이야기의 전개나 장면은 그런데 일반적인 영화규범으로 보자면 지극히 비상식적이며 기존의 코메디를 생각한 관객들에게도 잔혹하리만큼의 어이없음을 선사한다.

그러던 어느날, 마꾸나이마는 그의 형수에게서 받은 마리화나를 피면서 일시적으로 백인 왕자로 돌변한다. 그 후 형수와 관계를 맺게 되고 어느 순간 형수로 분한 여주인공은 스크린에서 사라진다. 그리고 아무런 이유없이 주인공 모두는 도시로 향하는 중, 온천물에서 솟아오르는 물을 맞자 잘생긴 백인왕자로 변한다. 도시로 나온 마꾸나이마는 우연히 테러리스트 여자와 길거리에서 테러집단을 만나 도망가게 되다가 눈이 맞아 살게 되고 온갖 경험을 하게 된다. 후에 영웅을 알려주는 돌을 찾게 되면서 진정한 영웅으로 거듭났지만, 결국 물 속에서 유혹하는 물의 마녀에게 홀려 빠지고는 잡아먹히고 만다는 이야기이다.

이 영화는 도시로 보여지는 부르주아 사회의 위계와 계급, 그리고 테러리스트로 분한 여성과, 그 여성에게 일방적으로 잠자리를 강요받는 '영웅'의 모습들을 통해 성의 차별성을 과격하게 바꾸어버린다. 문화적 삶의 규칙과 제한으로부터 멀리 떨어져있는 것이다. 영화는 이러한 바뀜에 주는 '낯선 쾌감'을 안겨주는 동시에 세계체제에 편입된 저발전의 브라질이 '카니발'로 대변되는 '착취관계'에 놓여 있음을 폭로한다. 이렇게 영화적 검열을 피해 정글에서 정신없이 카니발을 벌리고 끊임없이 깔깔대는 대중의 모습과, 도시에서는 끝없이 테러의 공포에 떠는 민중들의 모습을 과감한 성애묘사로 교묘히 가린것은 검열을 피하려는 작가들의 노력으로 보여진다. 이는 80년대 검열 속에서도 소신있게 자신의 목소리를 남으려고 했던 우리나라의 감독들의 노력을 생각나게 한다.

이 영화는 아직까지도 뉴욕 어느 극장에서 주말만 되면 상영하는 '럭키호러 픽쳐쑈'를 연상시키는 듯한 배우들의 과감한 연기, 주제를 알 수 없는 스토리, 그리고 시 공간의 모호함등이 이제껏 남미를 그저 '축구'의 나라라고만 생각하는 우리 관객들에게 또 다른 영화적 선물을 제시할 것이다.

IP *.217.95.214

덧글 입력박스
유동형 덧글모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