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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재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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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10월 10일 11시 52분 등록

영화 ‘귀향’은 그 제목이 암시하는 대로 어디론가 떠났으나 다시 고향으로 되돌아오는 이야기이다. 고향으로 돌아오는 사람은 그들의 마음에 치유되지 않은 상처를 지니고 있다. 작품에서 고향은 ‘아버지’와 ‘남편’이라는 존재로 대표화되는 가부장적 질서를 상징한다. 가부장적 질서는 세계를 성적으로 분화시키는 차원을 넘어 차별화 하는 위계적 공간으로 이끈다. 그러므로 주인공인 라이문다와 그의 어머니에게는 그 질서를 ‘아버지’와 ‘남편’의 죽음으로 무너뜨리면서도 기억 속의 흔적으로 남아 지속적인 상처로 작용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여성 정체성의 위기 상황을 낳으면서 주인공들을 실존적 방황에 빠뜨린다.

주인공 라이문다는 사춘기 이후 아버지와 어머니가 있는 라만차를 떠나 마드리드로 떠나고, 어느새 이모를 자신의 보호자로 인식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과거를 등에 진 그녀는 어느날 고향을 방문해 치매에 걸려 곧 죽음을 맞이하게 될 이모를 확인함과 동시에, 방화 사건으로 목숨을 잃은 부모의 묘지를 손질한다. 사실, 이모의 치매는 어머니의 죽음을 둘러싼 충격에서 비롯된 것이다. 아버지는 딸인 라이문다를 임신시켰으며, 그 동네의 유일한 히피였던 아구스티나의 어머니와도 불륜관계에 있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정작 문제는 그러한 과거의 고통이 아직까지도 라이문다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로 남아있다는 사실이다. 그러한 그녀의 위상의 진원지는 고향이었고, 또 그곳에 있던 아버지이기도 했다. 라이문다는 자신이 설 자리를 마련하지 못한 채 늘상 현실의 주변에 머물러있다. 아버지에게 강간을 당해 임신을 해 동생이자 딸인 파울라를 낳은 라이문다에게 귀향은 단순한 순환이 아니다. 그녀에게 고향은 근원의 부정과 더불어 재생의 징후를 제시하는 역설적 공간으로 돌아옴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녀에게 현실은 더욱더 가혹하기만 한다. 잠자리에서조차 자위를 하고, 사춘기 소녀인 딸 파울라를 음흉한 눈빛으로 쳐다보는 남편의 행위는 여성인 그녀가 다가갈 수 없는 금단의 영역인 것이다.

그러한 금단의 영역을 깨버린 것은 다름아닌 그녀의 동생이자 딸인 파울라이다. 그녀는 어느 날 자신이 친 아빠가 아니라며 술에 취해 강간하려고 하는 파코를 칼로 찔러 죽인다. 남성의 영역에서 한번 상처를 받은 라이문다에게 이런 사건은 이중의 충격으로 다가오지만, 그녀 자신이 마드리드를 떠난 것과 같은 수동적인 자세에서 벗어나 사체를 ‘주위의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옮기고 묻어버리는 적극적인 자세로 승화시킨다. 이는 그녀가 과거의 상처를 통해 지니고 있던 비밀을 엄마가 아닌 이모에게 털어 놓았던 자신의 과거를, 이제는 그녀의 딸이 가지게 된 비밀을 적극적으로 공유하게 된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라이문다가 남편의 시체를 처리하고 식당을 운영하는 도중, 그녀의 고통을 외면했다고 믿었던 엄마의 유령이 등장하면서 새로운 전화의 계기가 된다. 자기 합리화를 꾀할 수 밖에 없었던 시점에서 그녀는 과거의 기억들을 거리화시켜 정관함으로써 현재의 ‘나’를 둘러싸고 있는 흔적들을 재해석하는 것이다. 라이문다가 그녀 삶의 중심에 들어가지 못하는 현실은 비로소 고향으로 돌아와 가해자라고 생각했던 어머니와의 화해를 통해 정지하게 된다. 그것은 라이문다가 딸이 죽인 사체를 아무도 몰래 ‘완전 범죄’를 저지르는 비정한 어머니의 역할을 할 것 같은 왜곡된 여성 이미지의 해체를 의미하기도 한다. 그녀는 비로소 가해자인 아버지에게보다 그러한 사실을 방관했던 어머니에 대한 반항이 성차별적인 그릇된 문화의 산물이었음을 아구스티나의 어머니와의 불륜관계를 확인함으로써 깨닫게 된 것이다.

이제 남은 것은 라이문다의 어머니가 저지른 행위에 대한 화해의 몸짓이다. 라이문다의 어머니는 불륜관계에 있던 아구스티나의 엄마와 그녀의 남편이 함께 잠자리에 있는 장면을 목격하고는 불질러 버린다. 이에 아구스티나는 같은 여성이 저지른 행위로 인해 피해자로 남은 것이다. 게다가 그녀는 암 말기 판정을 받기에 이른다. 그녀는 항암치료를 위해 마드리드 병원에 있을 때, 유령을 보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라이문다에게 그녀의 어머니의 소식을 알아봐달라는 부탁을 해 보지만, 오히려 정신병자 취급을 받을 따름이다. 여성이 여성 스스로에게 상처가 되는 모습, 그러나 그 이면에는 불륜과 복수, 그리고 삶과 죽음이라는 근본적인 명제 아래서 삶의 낙오자로 남을 수 밖에 없는 그녀의 현실이 있는 것 이다.

바로 여기서 화해와 용서의 움직임이 시작된다. 불륜 관계를 처음 알게 된 라이문다에게는 냉대를 받았지만, 실제 화재를 통해 복수했던 그녀의 어머니가 아구스티나에게 유령의 모습을 자청해 죽음의 문턱에 있는 그녀를 돌보아주려고 하는 것이다. 즉, 치매가 걸린 언니를 돌보았던 것이 단지 그녀가 숨어 살기 위한 단순한 행위였다면, 아구스티나에게 나타난 ‘유령’의 모습은 그녀가 저지른 복수에 대한 ‘속죄’의 행위로 그 의의가 전환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화해의 움직임은 극대화 된다. 결국 대(代)를 이어나가는 ‘화해’의 모습은 무너지는 자신을 버텨내기 위한 유일한 견딤의 방안이었던 것이다.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의 여주인공들은 전통과 현재로 이어지는 남성중심의 사회적 맥락에서 늘상 주체이기 보다는 종속적인 타자로 규정되는 위기의 현장에 서 있다. 그녀들이 몸담고 있는 현실을 정체성을 위협하는 공간이기에 그녀들은 늘상 위기상황으로 치닫게 된다. 그러나 그녀들은 자신들의 구원을 실현하기 어려운 까닭에 서로를 용서하고 화해하는 전략을 통해 견딤을 모색하면서 기다린다. 그러나 구조화된 사회구조가 한 개인과 여성들에게 긍정적인 미래를 쉽사리 보장해줄 까닭이 없다. 때문에 그것은 여성 스스로가 타자로 규정되어있는 자신들의 위기를 주체의 자리로 옮기는 각고의 노력 속에서만이 얻을 수 있는 결과물이다. 그러므로 이제 그녀들의 화해의 의도도 달라져야 한다. 그것은 단순한 현실 타파의 전략이 아닌, 응전의 더 나아가 도전의 전략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즉, 화해와 용서가 더 이상 자신들이 몸담고 있는 사회의 주의를 멤도는 주변인으로서의 의식을 견디기 위한 소극적인 것이 아닌, 미래를 창출하고자 하는 적극적인 행위로 전환되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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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지깽이
2006.10.21 06:10:40 *.116.34.142
I wonder why you have deleted good interpretation on some pieces of Frost ' works. Pls let it come back on the screen.
I 've got something good you tried to deli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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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엽
2006.10.21 13:38:54 *.153.213.217
I just moved it to the section of 'book review'. Please click 'The Road Not Taken', then you can see it. Thank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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