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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

여러분이

2006년 10월 15일 21시 41분 등록

실화랍니다.
스코틀랜드 던디 부근의 한 양로원에서 한 노인이 죽었는데 그 유품이 바로 이 시 한장 이라는 군요. 간호사들이 많이 물었다고 합니다.

세월은 잔인하네요.
한 꽃다운 소녀를 노파로 만들고, 이내 바보로 만들어 버리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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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들 눈에는 누가 보이나요,
간호원 아가씨들...
제가 어떤 모습으로 보이는지를 묻고 있답니다.
당신들은 저를 보면서 대체 무슨 생각을 하나요.

저는 그다지 현명하지도 않고...
성질머리도 괴팍하고
눈초리마저도 흐리멍덩한 할망구일 테지요.

먹을 때 칠칠치 못하게 음식을 흘리기나 하고
당신들이 큰소리로 나에게
"한번 노력이라도 해봐욧!!"
소리 질러도 아무런 대꾸도 못하는 노인네...

당신들의 보살핌에
감사 할 줄도 모르는 것 같고
늘 양말 한 짝과 신발 한 짝을
잃어버리기만 하는 답답한 노인네...

그게 바로 당신들이 생각하는 '나' 인가요.
그게 당신들 눈에 비쳐지는 '나' 인가요.
그렇다면 눈을 떠보세요.

그리고 제발...
나를 한번만 제대로 바라봐주세요.

이렇게 여기 가만히 앉아서
분부대로 고분고분
음식을 씹어 넘기는 제가
과연 누구인가를 말해줄게요.

저는 열 살짜리 어린 소녀랍니다.
사랑스런 엄마와 아빠... 그리고
오빠, 언니, 동생들도 있지요.

저는 스무 살의 꽃다운 신부랍니다.
영원한 사랑을 맹세하면서
콩닥콩닥 가슴이 뛰고 있는
아름다운 신부랍니다.

그러던 제가 어느새 스물다섯이 되어
아이를 품에 안고
포근한 안식처와 보살핌을 주는
엄마가 되어있답니다.

어느새 서른이 되고 보니
아이들은 훌쩍 커버리고...
제 품에만 안겨있지 않답니다.

마흔 살이 되니
아이들이 다 자라 집을 떠났어요.
하지만 남편이 곁에 있어
아이들의 그리움으로 눈물로만 지새우지는 않는답니다.

쉰 살이 되자 다시금
제 무릎 위에 아가들이 앉아있네요.
사랑스런 손주들과 나...
행복한 할머니입니다.

암울한 날이 다가오고 있어요.
남편이 죽었거든요.
홀로 살아갈 미래가
두려움에 저를 떨게 하고 있네요.

제 아이들은 자신들의 아이들을 키우느라
정신들이 없답니다. 젊은 시절 내 자식들에
퍼부었던 그 사랑을 뚜렷이 난 기억하지요.

어느새 노파가 되어버렸네요.
세월은 참으로 잔인하네요.
노인을 바보로 만드니까요.

몸은 쇠약해가고...

우아했던 기품과 정열은 저를 떠나버렸어요.
한때 힘차게 박동하던 내 심장 자리에
이젠 돌덩이가 자리 잡았네요.

하지만 아세요?
제 늙어버린 몸뚱이 안에 아직도
16세 처녀가 살고 있음을...

그리고 이따금씩은
쪼그라든 제 심장이 쿵쿵대기도 한다는 것을...

젊은 날들의 기쁨을 기억해요.
젊은 날들의 아픔도 기억해요.
그리고... 이젠
사랑도 삶도 다시 즐겨보고 싶어요.

지난 세월을 되돌아보니...
너무나도 짧았고...
너무나도 빨리 가 버렸네요.
내가 꿈꾸며 맹세했던 영원한 것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무서운 진리를
이젠 받아들여야 할 때가 온 것 같아요.

모두들 눈을 크게 떠보세요.
그리고 날 바라봐주세요.
제가 괴팍한 할망구라뇨...
제발...
제대로 한번만 바라보아주어요.
'나' 의 참모습을 말예요...
IP *.116.34.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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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당팔
2006.10.16 08:51:19 *.224.196.242
남의 일이 아니다.
내 나이 벌써 화투 한모다.
화투 한모는 48장이다.
아직 코주부를 생각하면 좀 여유를 느끼지만
너무 갈 길이 바쁘다.
어쩌다가 벌써 이렇게 나이를 먹었나?
오.헨리의 '마지막 잎새'처럼 살 수는 없나?
지금 달려있는 나뭇잎도 금방 떨어질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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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석
2006.10.16 10:27:34 *.81.25.218
안녕하세요? 늘 열심히 살아오신 달국님 같은 분은 오히려 '가을'의 느낌이 예사롭지 않으신가 봐요.

저처럼 껄렁껄렁하게 살아온 사람은 '가을'에 깨달은 한 두 가지가 소중해서, 지금이 '봄'인 줄 안다니까요 ^_^

2기 연구원이 다들 너무 젊어서, 비슷한 세대가 그리워지는 오전입니다. 달국님 책도 보고 싶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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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로
2006.10.16 11:00:43 *.145.231.237
이마 이 글은 불혹을 넘긴 이들만이 댓글을 달 수 있나보다.
위의 두 분도 훌쩍 넘겼으니 ...
제가 토요일 재밌는 책 하나 발견했걸랑요.
안정효의 글쓰기 만보라고 꽤나 두꺼운 글고 글자 포인트도 디게 작아서 읽기도 좀 불편하네요.
글쓰기에 관심있는 분들은 한번쯤 읽어볼만 해요.
올 가을엔 이 책과 지내 보려구요.
더 늙기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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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호박
2006.10.16 17:20:23 *.208.6.214
“삶은 두루마리 화장지와 같아서 끝으로 갈수록 더욱 빨리 사라진다.”
라는 말이 있지요. 사철 푸를 수만 없는 순리를 수용한다면, 늙음의
안타까움과 회한이 그나마 조락(凋落)하는 아름다움으로 충만해지지
않을까요? 익은 호박의 황금색과 오묘한 색으로 채색되어 떨어지는
단풍처럼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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含章거인
2006.10.30 23:05:01 *.103.178.222
그렇습니다. 누구나 세월과 함께 점점 바보가 되고, 희미해져갑니다.
그러니 욕심을 부릴 것도 없고, 화를 낼 것도 없지요.
그냥 그대로 주어진 삶이 고맙고, 벗들이 있음을 항상 기쁘하고, 조그만 배려에도 감사할 줄 아는, 아이같은 어른으로 살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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