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커뮤니티

살다

여러분이

  • 도명수
  • 조회 수 1615
  • 댓글 수 1
  • 추천 수 0
2006년 12월 6일 17시 31분 등록
예술의 문외한 에비타를 가다-28

어느 날 친구로부터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금년 망년회는 지난해와 달리 뮤지컬을 관람하는 것이 어떠냐는 것이었다. 아니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고 말하니까 그는 우리의 모임이 남자들만의 모임이 아니라 부부동반모임인 만큼 이번에는 그녀들을 위한 자리가 되었으면 한다는 것이 친구생각의 골자였다. 처음 있는 일이라 망설였지만 이내 아내를 생각해 그러라고 응답했다. 그는 모임 때마다 여자 편에서 모든 행사를 준비하는 자상함을 보여주곤 했다. 정말 여성들에게 사랑받을 친구다.

어느 덧 중년의 나이에 접어든 우리들의 모임도 이제는 남자우선이 아니다. 여성이 선호하는 놀거리, 먹거리에 맞추어 모임을 갖는 경향이 뚜렷해졌다. 남성이 나이 들면서 주도권에 밀리고 있음을 여실히 방증하고 있다. 어쨌든 친구가 선택한 뮤지컬을 보기 위해 약속장소인 역삼동 LG아트센타에 도착한 것은 ‘06. 12. 2 저녁7시였다.

뮤지컬 제목은 에비타(Evita)였다. 에비타는 전 세계인의 기억에 남는 아르헨티나의 퍼스트레디가 아닌가. 이것은 마돈나가 주연이 되어 영화화되었고, 수많은 연극인을 통해 뮤지컬로도 나왔다. 또한 이를 빛나게 하는 노래 Don't cry for Me Argentina도 있지 않는가.

이 노래는 내 기억에도 생생하다. 대학시절 이 노래를 암기하느라 밤을 지새웠고, 망년회 연회장에서 부른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 어떻게 이런 노래를 외웠냐고. 나는 평소 노래를 좋아했다. 당시 뽕짝서부터 팝송까지 좋다고 하는 노래는 모두 부르곤 했다. 그 때 인기 있던 이 노래가 예외가 될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처럼 노래방의 모니터가 없던 시절 한 곡조 부르라고 하면 짧은 머리에 이 모두를 암기해야만 했기에 밤을 지새울 수밖에.

인상에 깊이 각인된 노래와 함께 관람한 뮤지컬 에비타는 처음 접했음에도 생소한 감이 들지 않았다. 다만 시대적 배경이나 우리와 다른 세계 사람을 대상으로 했다는 점이 다소 거리감을 주기도 했다. 허나 너무나 유명한 세계적 뮤지컬이었기에 국내 연극인의 공연이었음에도 호소력 있게 다가왔다.

에비타가 누구인가. 좀 더 그녀에 대해 깊이 이야기 하자면 이렇다. 바로 1940년대 아르헨티나 후안 페론 대통령의 부인이다. 그런데 이 여자가 그토록 세계의 관심을 갖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첫째, 대부분의 영부인과는 달리 출신성분이 미천(微賤)했다는 점이다. 그녀는 사생아로 태어나 무작정 상경하여 거리를 방황하고, 먹고살기 위해 창녀라는 직업을 선택한다. 수많은 남자들의 품을 전전하다가 드디어 후안 페론을 만나게 된다. 세상에 흔적을 남기려면 많은 사람을 만나야 한다.

둘째, 자신이 원한 남자에 대한 애정이 상상을 초월한다. 페론을 만난 것이 1943년으로 당시 그의 나이가 48세였고, 그녀는 24살이었다. 물경 하프의 나이였다. 그런 그를 지독히도 사랑했다. 정적들에게 몰려 감옥살이할 때도 그를 풀기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한다. 페론을 향한 헌신적인 사랑과 신뢰가 그로 하여금 결혼에 이르게 한다. 그녀는 드디어 페론의 정부(情婦)에서 공식적인 부인으로 자리 잡게 된다. 바로 페론의 두 번째 부인이 되는 것이다. 그녀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페론을 최고의 자리에 올라가게 만든다. 1946년 페론은 드디어 아르헨티나의 대통령에 당선되는 것이다. 겨우 그녀와 3년간의 생활 끝에 이룬 엄청난 결과였다. 이런 여자와 만난 사람은 행운아임에 틀림없다.

셋째, 있는 자와 없는 자에 대한 차별이 분명했다. 일반적으로 있는 자에 대해서는 굽실거리고 없는 자에 대해서는 비굴할 정도로 고압적인 것이 인간의 심성임에도 에비타는 반대로 행동했다. 얼마나 멋진 일인가. 부자들에게 빼앗은 돈을 가난한 자에게 나누워 줌으로써 대중적 인기를 한 몸에 받는다. 이것이 그 유명한 포퓰리즘을 탄생하게 하는 배경이 된다. 아마 이 말은 에비타를 끌어내리기 위한 용어임에 분명하다. 있는 자와 행동하지 못한 자들의 앙칼짐으로 들리기 때문이다. 그녀는 이점에서 차별화된 인간이었음이 틀림없다.

넷째, 그녀의 삶은 진정 짧았다. 아니 겨우 34세의 나이에 세상을 등졌음에도 어찌하여 이토록 전 세계인들의 입과 입을 통해 회자되는가. 그의 죽음이 너무나 극적이었기 때문이다. 영부인으로 겨우 6년이었음에도 그녀는 60년의 세월을 살은 듯싶다. 민중의 가슴에 커다란 서러움을 남겼기 때문이다. 장례식이 무려 1개월간 지속되었다 한다. 일국의 대통령이 죽어도 이토록 길게 하지 못했을 것이건만 그녀의 죽음에 대한 전 국민의 슬픔이 얼마나 컸으면 그리하겠는가. ‘굳고 짧게 살자’는 에비타에게 통했다.

마지막으로 그녀의 삶은 정말 열정적이었다. 모든 사람이 좋아하는 이유의 핵심요체가 이것이다. 자신의 삶에 흔적을 남기려면 바로 열정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 그녀의 가녀린 체구에서 나온 대중적 연설은 모든 국민을 사로잡았다. 그녀의 말은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그것은 열정이 실린 말들의 향연이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이 진실의 화신처럼 국민의 가슴을 파들어 간 것이다. 이 열정은 그 이후 아르헨티나의 모든 곳에 침투되어 있다. 사생아로, 창녀로 전전하며 퍼스트레이디에 앉은 에비타는 그래서 ‘거룩한 악녀이자 천한 성녀’라는 보기 드문 레테르를 달게 된다. 내가 보기에는 예쁘기만 하던데 악녀라니.

1978년 처음 뮤지컬로 공연된 에비타는 지금까지 생명력을 이어가고 있다. 참가한 연극인들 또한 열정적이었다. 에비타를 열연한 연극인 김 선영의 삶도 에비타와 유사하단다. 그래서 그녀도 모든 열창과 몸부림으로 에비타를 표현했는지 모른다.

연극의 문외한이자, 뮤지컬의 외지인인 그리고 문화의 이방인인 나에게 온 몸으로 보여준 뮤지컬 에비타는 그들의 삶의 내용을 떠나 열정이라는 뜨거움으로 나의 가슴을 덥혔다.

우리 2기 연구원 모두가 선생님을 모시고 뮤지컬이나 보는 날이 있었으면 어떨까?
IP *.57.36.34

프로필 이미지
귀한자식
2006.12.07 09:58:02 *.102.144.44
좋아요!!
저도 에비타 보고 싶었는데....
덧글 입력박스
유동형 덧글모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