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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명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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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12월 27일 09시 49분 등록


연구원 송년모임은 흥겨웠다. 내가 놀던 ‘읍내’하고는 다른 방식이라 응어리가 풀릴 정도는 아니지만, 여러 젊은이들과 특히 정재엽의 끼로 해서 마치 ‘오빠부대’처럼 소리를 질러댔다. 그 기세가 꺾이지말고 계속 이어져야 하는데!


‘우리 읍내’에선 이렇게 논다. 1차는 한 시간 반을 넘으면 안 좋다. 깨면서 마시면 흥이 모아지기가 어렵다. 단숨에 취기가 올라 의기투합하여, 노래방까지 밀어붙여야 한다. 도도한 취흥과 멤버쉽이 어우러지면, 가무에 물이 오른다. 나는 막춤으로 무아지경에 도달한 적이 있다. 음악과 하나가 되어 움직이고 있는 내가 보였다. 이것이 유체이탈? 상식과 한계에 길들여진 이 땅의 기성세대에게, 노래방이 해방구가 될 수 있는 순간이다. 3차는 호프집으로 간다. 7080의 라이브가 흐르는 곳이면 더욱 좋다. 해방구의 경험을 공유했으므로, 대화가 조금 깊어진다. 해장국으로는 못난이 수제비를 선호한다. 슬슬 출출해지지 시작한 뱃속에 딱이다.


24일에 여행갈 계획인데, 미영씨가 재워주겠다고 해서 얼결에 일행에게 인사도 못하고 움직였다. 좀 더 어울리고 싶었는데, 사실 섞어 마셔서 그랬나 머리가 살짝 아파서 걱정이 되었다. ‘우리 동네’도 아니고, 아직 편하게 취할만한 사이는 아닌 것이다. 인사도 안하고 2차도 안 쏘고 온 데 대해서, 또 하룻밤 편히 묵게 해 준 미영씨에게 마음을 전한다.


여행지에서 아주 좋은 곳을 발견했다. 점점 공간에 대한 관심이 더해져서, 앞으로 마음먹고 ‘나의 공간’을 찾아다닐 생각인데 멋진 테이프를 끊은 셈이다. 독특한 생활방식이 어우러진 시공간, 내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는 곳을 찾아보고 싶다. 그러다가 정 마음이 가는 곳이 있으면 눌러살 생각이다. ‘여생의 집’을 찾아가는 여정이다. 소정씨, 빨리 안 쓰면 내가 추월할지도 몰라요.


강원도 홍천의 ‘모둘자리’ 관광농원. 마치 산사처럼 고즈넉하였다. 계곡을 싸안듯 자리잡은데다가, 연못도 3개나 있어, 산과 물을 함께 누릴 수 있는 곳이다. 얼음장 밑으로 맑은 물이 흐르고 있었다. 계곡이든 연못이든, 근래에 그렇게 맑은 물을 본 적이 없다.
숙소와 찻집, 식당과 찜질방이 자리잡고 있고, 눈썰매와 송어낚시도 특이한 것은 아니다. 그런데 분위기가 상업적이지 않고, 마치 절이나 명상센터가 되다만 곳 같다.


찜질방을 지키는 할아버지는 구수한 동네할아버지였다. 주름살이 굵게 패인 편안한 모습. 식당을 주재하는 아주머니는, 손님의 입장이 되어 편안한 음식을 골라주었다. 우리가 비지찌개를 맛있게 먹자, 비지를 싸주기까지 했다. 수줍은 성격인듯 사람을 똑바로 쳐다보지는 않으나, 듬직해보이는 젊은이는 내 청춘을 관통한 농활을 생각나게 했다.


게다가 노을이, 이 놈은 덩치가 송아지만한 개인데 얼마나 순한지 묶어놓지도 않았다. 눈과 귀가 추욱 쳐져서 느릿느릿 슬로우비디오를 연출하던 놈이, 갑자기 의연한 걸음을 되찾는 순간이 있다. 다름아닌 농원주인을 호위할 때이다. 주인이 나타나기만 하면, 동작이 2배속도로 경쾌해진다.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주인의 앞길을 헤치고 나간다. 개가 가족이 될 수 있음을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이 농원의 압권은, 산 속에 있는 별채이다. 아침에 주인이 방송을 통해, 산책갈 손님을 모았다. 그러나 나온 사람은 나와 우리 아이들, 그리고 초등학생 두 명 뿐이었다. 우리는 노을이를 앞세우고 산책을 했다. 20여분 기분좋게 가파른 야산을 오르자, 갑자기 시야가 트이며, 아늑하게 분지처럼 내려앉은 공간이 나왔다. 이름하여 대장골, 빙 둘러싼 산들이 저마다 앞발을 모아 호위해주는 골짜기였다. 농원주인은 이 곳에 네 채의 귀틀집을 지어놓았다.


서울에서 두 시간 조금 넘게 달려왔을 뿐인데, 눈 앞에 펼쳐진 원시의 자연에 나는 빨려들어갔다. 눈이 하얗게 쌓여서 더욱 그랬을 것이다. 산 속에 분화구처럼 자리잡은 곳이라, 어느 화전민도 이 곳을 거처로 삼았을 것이다. 나무를 베고 진흙을 이겨 집을 짓고, 잡목숲에 불을 질러 밭을 일구고, 산짐승을 잡기위해 덫을 놓았을 것이다.


이 곳에서 지극히 원시적인 삶을 살아도 좋겠다 싶었다. 고구마와 감자, 채소를 심어 먹거리를 자급자족하고, 자연의 흐름에 따라 하루를 맡긴다. 해가 지면 하루 일과를 끝낼 수밖에 없다. 장작이 타오르는 불꽃을 바라보며, 시상을 다듬는다. 화로에 재를 담아 들여놓고 앉아 글을 쓴다. 1년에 책 한 권 정도로 세상과 소통한다. 내 책을 보고, 한 두달씩 와서 머물다 가는 사람들이 생긴다. 그러다가 몇 사람이 아예 이 곳 사람이 된다. 우리는 자신만의 방과, 함께 하는 공간의 묘미를 잘 다스리는 훌륭한 이웃이다. 노을이같이 커다란 개도 한 두 마리 있으면 좋겠지.


주된 거처가 어디이든지, 두 번 째의 base가 있어도 좋겠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이 곳은 ‘생활의 공간’이 아니라 ‘향유의 공간’이다. 내맘대로 하루를 배치하는 자유와 일탈의 공간이다. 내가 나에게 제공하는, 최대의 문화적 사치이다. 하루종일 장작불 앞에 턱을 괴고앉아, 아무 일도 하지 않을수도 있다. 나의 내면 깊숙한 곳에서 하고 싶었던 일 하나 저질러도 된다. 천천히 자연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여생의 집’ 혹은 ‘두 개의 base'라는 오래된 꿈의 목록에 ‘대장골 귀틀집’을 제 1호로 등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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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빈
2006.12.27 13:33:18 *.217.147.199
좋은데 다녀오셨네요^^
저의 새로운 공간이 슬슬 몸에 익기시작하면 저도 base를 하나 찾으러 가 볼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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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탄
2006.12.27 16:12:37 *.224.251.104
경빈씨는 '서울을 떠나 살 수 있을까' 하지만, 천성이 부지런하고 만들기, 고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전원생활에도 아주 잘 어울려요.
아이들에게 연이나 썰매를 만들어주는 아빠~~ 이다음에 경빈씨 아이들은 참 좋을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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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니
2006.12.27 16:55:48 *.253.76.208
언젠가 되도록 멀지 않은 어느 시점에 만나뵙고 싶어요. 7080세대라 그런가 전 정말 공감하거든요. 아직 이념이 조금 부족하지만. 그래도 홍천의 그 곳에 꼭 가보고 싶네요. 언제 3차까지 함께 할 수 있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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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정
2006.12.27 17:54:47 *.244.218.8
저의 공간은 아직 제 안에 있답니다. 지난 모임에서 한 선생님과 귀자씨 이야기에서 힌트를 얻었어요. 제 안의 공간을 먼저 파야할 것 같아요. 안이 엉켜 있는데 밖에서 풀려고해서 헛발질만 해대지 않았나 싶어요. 안으로 침잠하는 게 싫어서 일부러 나돌아다녔는데..나의 공간에 대해 먼저 써봐야 밖의 공간이 풀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ㅋㅋㅋ 다녀오신 곳은 정말 멋지군요!!! 꼭 가보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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