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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명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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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월 5일 07시 17분 등록
** 개인적인 글을 쓰느라 요즘 홈피에 참여가 저조하다보니, 너무 소원해지는 것 같습니다.
다른 연구원들도 모두 비슷한 상황인 것 같네요.
제 첫번 째 책의 첫번 째 챕터입니다.
관심사가 한정되어 있다보니, 평소에 하던 말과 많이 겹칩니다.
-일생을 잘 살려고 하지 말고 오늘 하루를 잘 살아라-
이 곳을 찾는 모든 분들,
좋은 하루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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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신혼 때 생활한 농촌마을에 장애인과 결혼한 사람이 있었다. 전문대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용모도 뛰어난 아가씨였다. 그녀는 자신이 강사로 있던 컴퓨터 학원 원장과 사랑에 빠졌다. 그 원장은 혼자 걷지도 못하는 중증 장애인이었다. 신체적인 장애와 상관없이 활동적인 사람이라, 컴퓨터에 능하고 다른 사회활동도 많이 하는 사람이었다.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한 여자가 딸 셋을 낳으며 힘겨운 결혼생활 끝에 한 말은, “좀 더 말려주지 그랬어요!” 였다.


나역시 부모가 반대하는 흔치않은 결혼을 했다. 20대를 농촌활동으로 보낸 내가, 진짜 농사꾼과 결혼을 한 것이다. 먹물 출신으로 농사를 짓는 사람이 아니라, 농촌에서 태어나 중학교를 중퇴한, 진짜 농사꾼이었다. 성격이 유약하신 부모님께서는 힘들이지 않고 져주셨다. 많이 속상해 하셨지만, 서운한 결혼이나마 하는 것이, 혼자 떠돌아 다니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하셨음에 틀림없다. 20년의 결혼생활 끝에 깨달은 것은, 역시 우리의 결혼에는 부조화의 씨앗이 숨어있었다는 것이다.


결국 상식적으로 사는 것이 유리하다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기성세대의 관점으로 젊은 사람의 결정을 주도해야 한다는 말은 더더욱 아니다. 인생은 오직 살아봄으로써만 배울 수 있다는 말을 하는 것이다.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게된다 할지라도 그것은 우리의 인생이었다. 오류로 판명될수밖에 없는 씨앗을 품고 있었구나, 하고 깨닫게 되는 것은 얼추 그 상황에서 빠져나온 다음이다.


내 인생이 거대한 오류였구나, 하고 깨닫는 것은 씁쓸하지만, 방법은 없었다. 나는 어떤 일이 닥치더라도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보고야 마는 유형인 것이다. 다행스러운 일은 내가 겪은 어떤 일도 모두 내 책임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일을 저지른 것도 나요, 그 일에서 헤어나와야 하는 것도 나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생의 어느 장면에서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것 같다.


돌이켜보면 우리의 중고시절은 거대한 낭비요, 거대한 입시공장에 불과했다. 자유와 자율을 반납해야만 버틸 수 있었던 수험생활이 끝나면, 이번에는 무한대로 주어진 자유 속에 우리는 내팽개쳐졌다. 모든 것을 각개격파로 부딪쳐가며 배울수밖에 없었다. 부모님은 성실하셨지만, 우리는 이미 부모님의 집을 떠나왔다. 가파르게 변하는 시대 속에서 대중화된 대학교육을 받은 우리에게 부모님은 이미 구세대였다.


선생님들도 역할모델이 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들은 편파적인 차별대우나, 수상쩍은 스킨십이나, 피곤한 생활인의 유형을 보여주는 반면교사에 불과했다. 그렇다고 해서 문학이나 사회에서 역할모델을 찾기도 어려웠다. 가장 감수성이 예민한 시기에 독서가 차단되는 이상한 나라, 학문도 실용성도 없는 대학, 성차별로 무장한 사회에서 우리는 허우적거렸다. 우리는 오직 살아봄으로써 배울수밖에 없었다. 아무도 우리에게 인생이 무엇인지 가르쳐주지 않았다.


나는 결혼이 무엇인지 모르는 채 결혼을 했으며, 엄마가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는 채로 엄마가 되었다. 결혼이 무엇인지 남녀가 무엇인지 어느 정도 알게 된 것은, 결혼생활에서 빠져나온 뒤였다. 엄마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을 때, 이미 아이들은 훌쩍 커 있었다.


사업은 또 어땠던가. 무리한 건축으로 시작한 사업에서 나는 고통을 배웠다. 몇 년간의 호황이 지난 후 5년 정도, 극심한 경제난에 시달려야 했다. 한 달에 네 번 결제일을 맞추다 보면 사람이 후줄근해지고 아무런 의욕도 생기지 않았다. 이 상황에서 발을 뺄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절망감은 두렵기만 했다. 그런데 삶은 참으로 아이러니한 것이다. 난생 처음 겪는 고통 속에서 나는 가장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일찍이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은 것들이었다.


결혼이든 사업이든, 어떤 사소한 결정이든 시작하는 모습에 끝이 들어있다. 좋은 시작이 반이다. 맨 손으로 시작한 사업이었지만, 몇 년간의 호황 때 근검절약하며 제대로 꾸려냈으면 나는 얼마든지 성공할 수 있었다. 그런데 내게는 경제관념이 없었고, 기회를 알아볼 줄도 몰랐다. 그대신 나는 알게 되었다. 그것이 기회였구나 뼈저리게 느끼며 기회의 뒷모습을 바라본 덕분에 알게 되었다. 앞으로 내게 기회가 찾아오면 아주 민감하게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기회를 꽉 붙들고 기회의 파도를 높이 탈 수 있을 것 같다.


인생은 삶을 통해서 배울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고 나니 조금 마음이 편안해졌다. 게다가 체험을 통해 약간의 자신감이 생겼다. 나이는 상대적인 것이다. 우리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 군인아저씨들에게 위문편지를 쓰곤 했다. 지금 보니 군인들이 아저씨는 커녕 큰 애기에 불과하지 않은가.


서른을 맞이하는 여자들과 마흔을 통과하는 남자들이 극심한 성장통을 겪는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입가에 슬며시 미소가 피어오른다. 나는 그 오솔길을 걸어왔지. 결혼에 대한 강박관념만 떨쳐버리면 더이상 아름다울 수 없는 나이 서른에 왠 엄살이야, 마흔에 새로 도전해서 성공하면 인생이 즐겁지... 하는 생각을 여유롭게 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다 지나온 것이다. 전부 지나왔다는 것, 그 느낌을 안다는 일이 이렇게 기분좋은 것일줄 몰랐다.


따라서 나는 지금의 내가 제일 좋다. 가장 행복하다. 어지간한 일을 다 겪어보았다는 것이 나를 여유롭게 한다. 내가 정서적으로 독립되어 있다는 것이 자랑스럽다. 이제 첫 번 째 인생에서 얻은 약간의 깨달음을 가지고 두 번 째 인생을 구상해본다. 내 생각에는, 한 시절 살아낸 사람은 모두 아티스트이다. 마음 속에 그리움과 서러움, 외로움과 두려움, 근원적인 것에 대한 목마름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들을 무엇을 가지고 표현할 것인가, 그 재료만 찾으면된다.


마침 우리는 시간이 많아졌다. 마음이 가는 방법을 통해, 내가 살아낸 체험을 조용히 풀어내기만 하면 된다. 작가 박완서가 삼십 년 전에 마흔의 나이로 데뷔한 것이 두고두고 회자되어왔다. 그런데 삼십 년 전에 마흔이면 지금 쉰에 버금간다. 갈수록 시대가 젊어지고, 개성과 다양성을 수용하고 있다. 한 두 사람의 리더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보통 사람도 자기 목소리를 내는 시대이다. 무슨 일을 시작하기에 나이는 전혀 걸림돌이 될 수 없다. 더욱이 무엇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슨 일이 좋아서 한다는데, 나이가 무슨 상관이랴. 무엇이 되려하지 말고, 좋아하는 그 일을 하라.


나는 시니어전문 필자가 되기로 했다. 인생의 하프타임을 갖고 나 자신을 성찰해보니, 그런 결론이 나왔다. 내게 읽기와 쓰기는 무인도에 떨어진대도 포기할 수 없는 원초적인 행위였다. 내가 욕심을 갖고있는 유일한 분야이다. 타이밍은 좋다. 우리나라는 고령화 추세에서도 ‘빨리빨리’ 정신을 발휘하여, 전세계적으로 유례없이 빠른 속도로 고령화가 진행되고 있다. 평균수명의 연장에 따른 전사회적인 패러다임의 변화가 진행되고 있다. 시대는 달라지고 있는데, 오래된 연령차별주의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그러나 연령분포도 자체가 달라진다.


2018년이 되면 65세 인구가 전체 인구의 14%, 2026년에는 20%를 차지한다. 경제력과 사회경험을 갖춘 최초의 힘있는 고령인구이다. 사회자체가 재편되는 것이다. 지금 나이들기 시작한 우리가 어떻게 나이들어가는가에 따라서 우리 사회 전체의 모습이 달라질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시대이고, 우리가 문화이다.


나는 혼자서도 잘 놀지만, 가끔은 행간을 읽어줄 수 있는 사람이 그립다. 그래서 일단 내 생각을 세상에 펼쳐놓기로 했다. 전문필자가 아니므로 서툴고 성급할 것이다. 내가 자신있게 분석할 수 있는 인물이 나 자신밖에 없으므로, 나를 재료로 이야기를 펼치다 보니, 민망하기도 했다. 그러나 내식대로 나이들고자 하는 첫 번 째 발걸음이므로 멈출 수가 없다. 자, 이제부터 내 이야기를 시작한다. 들을 준비가 되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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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나경
2007.01.05 07:42:42 *.230.199.144
아, 그러셨구나... 저는 가끔 한선생님 글을 읽으면서 어쩌면 내가 느끼는 것들과 이렇게 닮은 이야기들을 풀어 놓으실까 궁금했었답니다. 저 역시 일과 결혼과 아이를 키우는 일..들에 대해 살아보고나서야 겨우 알게 되는 것 같습니다... 좋은 글 좋은 책 써 주십시오... 지난 한해 구본형 소장님의 사이트를 열어 보게 된 것,그리고 선생님의 글을 읽게 된 것이 제게는 가장 커다란 행운이었습니다. 새해 늘 건강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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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로
2007.01.05 10:23:09 *.152.82.31
예 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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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엽
2007.01.05 10:35:05 *.153.215.61

한선생님, 글 잘 읽었습니다.

글이 가지고 있는 가장 커다란 힘중의 하나는 아마도 진실의 힘일 것입니다. 자신만이 가지고 있는 이야기가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가장 커다란 힘이 되기도 하겠지요. 그러나 진실이라는 것도 그저 한번 스쳐지나가는 '가쉽'거리가 아닌, 삶의 밑에서부터 건져올린 깊은 체험일때 감동으로 승화 될 것입니다.

좋은 독자가 되겠습니다. 체험의 깊은 곳까지 저의 짧은 경험으로 완벽하게 이해한다는 것이 힘이 들더라도, 늘 옆에서 지지해 주는 그러한 독자가 되겠습니다. 올 한해, 심연으로부터 건져낸 세월의 깊이를 아는 빛나는 진주가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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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
2007.01.05 12:23:27 *.191.110.12
한선생님 글에서 힘이 느껴짐을 이제는 이해할 수있을 것 같아요.
만드시려는 책 체험에서 묻어나는 글이 훌륭한 인생의 안내서 참고서가 될 수있을 거라 확신합니다.
한명석님 독자가 되고싶습니다.

저에게 있어서 이글을 보고 느낀점은
좀더 삶의 본질적인 문제에 접근하게되면 모두가 덕보려는 얻어려는 마음때문에 힘들었다는 생각을 하게됩니다.
학생이되고(내의지보다는 어른들의 의지였지만), 취직을하고, 결혼하고, 아빠가 되고,...계속해서 뭔가 바라는 마음에서 불행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이것을 역으로 돌리는 삶과 행운의기회로 볼수있는 모순이 있는 순간 삶을 통해서 배우는 여유로운 삶을 살게되었습니다. 아직 그여유있는 삶은 멀었지만 한선생님 글을 보면 좀더 가까이 와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됩니다.

첫번째 깨달음을 통한 두번째 삶은 누에와 나비의 삶만큼이나 자유로울 것이라 생각합니다.

나비처럼 자유로운 아름다운책을 상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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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석
2007.01.05 16:29:48 *.81.12.43
나경님, 기질이 비슷하다는 걸 저도 느끼고 있답니다. 자로님 말씀처럼 3기 연구원에 응해 보시지요?

자로님, 언제나 '한결같다'는 것은 정말 커다란 덕목인 것 같아요.

재엽님, 힘을 주는 댓글 고마워요. 재엽님에게서도, 보통 '잘 큰' 사람 이상의 진실이 느껴져요.

기원님, '나비'~~ 좋으네요. 덕담 감사합니다.

그외에 제 글을 읽어주신 모든 분들의 마음에 평화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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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kia
2007.01.06 02:48:48 *.237.240.149
9월부터 맺은 인연으로 불교경전공부를 시작했는데 그리고 지금 "천사불여일행"하려고 새벽예불가려다요 ^^ 경전도 좋지만 ^^님의 글에 빠져 발길을 멈춥니다. 올 한 해 님의 글로 빛나소서 합장_()_()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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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동
2007.01.06 09:51:01 *.142.145.9
겪어보고 희노애락을 경험하며 그 안에서 깨닫는 것. 그것이면 충분한 삶이 아닐까 주제 넘은 말을 해봅니다.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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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제 어당팔
2007.01.06 13:01:41 *.224.77.251
함명석님의 글에서 진한 홍차 한잔하는 것 같이 깊고 향기로운 멋이 납니다. 좋은 책이 될 것 같은 무서운(?)예감이 듭니다. 저도 들을 준비와 좋은 독자가 될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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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병곤
2007.01.06 18:53:09 *.39.179.239
스스로 배우는 자만이 배울 수 있다는 말이 생각났습니다.
커뮤니케이션이 화자보다 청취자에 의해 성립이 되듯이 배움도 가르쳐주는 사람보다는 배우는 사람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배움은 고통 속에서 더 잘 배우게 됩니다.

똑같은 실수를 여러 번 반복하는 것은 잘 배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군대에서 배우는 게 많지만 그걸 배우기 위해서는 쓸 데 없는 걸 많이 해야 합니다.
누님께서는 누구보다 배우고자 하는 욕망이 강했기에 그런 경험을 통해 많이 배우셨을 것이고, 그 경험을 연구원 활동을 통해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 것으로 이해합니다.

글에서 포쓰가 느껴집니다.
좋은 그릇으로 담아낸다면 훌륭한 책이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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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한자식
2007.01.06 19:07:07 *.218.202.224
ㅋㅋ 베리베리 굳~
한선생님 글은..갈수록 느낌이 좋아져요.
저도 들을 준비 완료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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