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재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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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1일은 늘 새롭다.
한 해가 새로 시작된다는 점에서 새롭기도 하거니와 새해 첫 날 아직 잉크가 덜 익은 신문의 첫 장을 펼칠 때 더욱 그러하다. 새해 첫날을 알리는 동시에 각 신문사들은 '신춘문예'의 당선작들을 발표하기 때문이다. 한 해 동안 열심히 준비한 미래의 작가들의 향연을 대번에 알 수 있다.
지난 몇 번 올린 글들을 통해 아실 분들은 다 아시겠지만, 나 또한 그런 기쁨을 맞이하고 싶어 공모전 준비를 했던 것도 사실이다. 문제는 그것이 내 맘 같지 않았다는 데에 있었다는 점이다. 사실, 나의 불발 소식은 미리 알고 있어서 김빠져버린 샴페인을 들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으나, 문제는 당선작에 있었다.
나는 공공연하게 내 친구들에게 이번 당선작이 수준에 미치지 못하면 부셔버릴꺼야, 라며 나의 불발소식을 달래곤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처음 본 당선작은 정말 수준 이하로 보였다. 주제 또한 이제껏 몇 차례에 걸쳐서 비평의 대상이 되었던 감독에 대한 비평이었다. 더 기가 막혔던 것은 당선자에 대한 개인적인 프로필이었다.
당선자는 이미 1999년에 모 메이저 신문사에서 주최한 신춘문예 문학평론부분에 당선이 된 사람이었고, 현재는 모 지방대학 국어국문과 교수로 재직 중이었다. 거기까지는 그렇다 치자. 며칠 전에 산 책 - 그 책은 한 해의 문제적인 영화들을 20여 편을 선정하고 그 책에 대한 영화 전문인들이 알기 쉽게 쓴 책이었다. -, 2006 올해의 영화, 라는 제목을 단 책의 첫 번째 영화인 ‘왕의 남자’의 비평을 쓴 자와 동일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의 탄생에 신문사들은 너도나도 취재를 했다. 대학 교수로서, 문학평론으로 이미 기 신춘문예를 통과한 사람으로서, 현재는 연극 평론가로서로 활동하고 있는 김 아무개의 탄생-. 그의 활동이 주목된다. 등등. 그러한 그의 외부적인 프로필에 묘한 자존심이 상했다. 그렇게 따지면 나도 뭐 이야기 할거 많다, 고 자책하면서-.
사실 내가 더 배신감을 느꼈던 것은 그 신춘문예의 심사위원으로 있었던 사람이 바로 나의 은사라는 사실이었다. 그러면서 나는 평소에 그 선생님이 나의 글에 대해서 일언반구도 없었다는 사실에 주목하게 된 것이었다. ‘그래, 처음부터 그 사람은 나를 싫어했어.’ 혹은 ‘그 사람이 심사위원인 이상, 나는 절대 등단할 수 없어’ 라는 생각에 나를 위로하기까지 했던 것이었다. 그러면서 그가 썼던 글을 쓱- 한번 읽어보고선 그의 글을 폄하하기 시작했다. ‘분명히 개인적인 친분으로 등단했을 꺼야’ 라는 생각이 수도없이 스쳤다.
그리고 며칠이 지난 후, 우연한 기회에 당시 프린트했던 그의 등단작품을 다시한번 읽을 기회를 만들었다. 하나하나 차근차근 읽어보니 이번엔 사정이 달라졌다. 먼저 그의 글은 읽기가 아주 ‘쉽다’는 특징이 있었다. 그리고 그의 소재는 어떻게 보면 워낙에 많은 사람들이 다루기에 차별화 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는 위험에도 불구하고, 그의 시선은 그 문제적 ‘감독’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바로 그러한 감독을 보는 ‘관객’에 있었다는 점이 특기할 만 했다.
나의 글은 어떠했을까를 생각해 보았다. 나의 글이 혹시 내 자신의 지식을 과시하는 주인입장이 되어 평론 대상이 되는 영화를 노예처럼 부린 것은 아니었을까. 이렇게 위압적이며 수직적으로 특정지식에 의지해 영화를 내려다보며, 훑은 것은 아니었을까. 똑똑해 보이려고만 해서 오히려 그 글을 읽은 사람은 분석된 영화를 정작 보고싶지 않게 만든 것은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번 2기 연구원 모임에서 발표했듯이, 나의 꿈은 한국인이 느끼는 한국의 영화에 대한 비평을 기꺼이 ‘영어’로 써서 문화적 DNA인 ‘코리아니티’를 전 세계 사람들에게 전파할 수 있는 책을 쓰는 것이다. 그러기에 ‘로마인 이야기’의 작가 시오노 나나미도 강조했듯이, 외국어로 쓰기에 앞서 ‘모국어’로 순화된 글쓰기의 내공을 기르고자 이런 ‘무모한’ 도전을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결국, 좋은 평론이란 언제나 작품과 수평적으로 대화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열심히 노력은 했지만, 나의 글 속에 혹시 열정과 공감은 사라지고 대신 표현자와 맞먹으려고 한 ‘자아도취’에 빠졌던 것은 아닌지 반성해 본다.
정재엽만이 낼 수 있는, 비록 덜 세련됬다 하더라도, 깊이 있는 목소리를 찾는 것이 올해 1월1일이 나에게 준 교훈이다.
IP *.153.215.61
한 해가 새로 시작된다는 점에서 새롭기도 하거니와 새해 첫 날 아직 잉크가 덜 익은 신문의 첫 장을 펼칠 때 더욱 그러하다. 새해 첫날을 알리는 동시에 각 신문사들은 '신춘문예'의 당선작들을 발표하기 때문이다. 한 해 동안 열심히 준비한 미래의 작가들의 향연을 대번에 알 수 있다.
지난 몇 번 올린 글들을 통해 아실 분들은 다 아시겠지만, 나 또한 그런 기쁨을 맞이하고 싶어 공모전 준비를 했던 것도 사실이다. 문제는 그것이 내 맘 같지 않았다는 데에 있었다는 점이다. 사실, 나의 불발 소식은 미리 알고 있어서 김빠져버린 샴페인을 들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으나, 문제는 당선작에 있었다.
나는 공공연하게 내 친구들에게 이번 당선작이 수준에 미치지 못하면 부셔버릴꺼야, 라며 나의 불발소식을 달래곤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처음 본 당선작은 정말 수준 이하로 보였다. 주제 또한 이제껏 몇 차례에 걸쳐서 비평의 대상이 되었던 감독에 대한 비평이었다. 더 기가 막혔던 것은 당선자에 대한 개인적인 프로필이었다.
당선자는 이미 1999년에 모 메이저 신문사에서 주최한 신춘문예 문학평론부분에 당선이 된 사람이었고, 현재는 모 지방대학 국어국문과 교수로 재직 중이었다. 거기까지는 그렇다 치자. 며칠 전에 산 책 - 그 책은 한 해의 문제적인 영화들을 20여 편을 선정하고 그 책에 대한 영화 전문인들이 알기 쉽게 쓴 책이었다. -, 2006 올해의 영화, 라는 제목을 단 책의 첫 번째 영화인 ‘왕의 남자’의 비평을 쓴 자와 동일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의 탄생에 신문사들은 너도나도 취재를 했다. 대학 교수로서, 문학평론으로 이미 기 신춘문예를 통과한 사람으로서, 현재는 연극 평론가로서로 활동하고 있는 김 아무개의 탄생-. 그의 활동이 주목된다. 등등. 그러한 그의 외부적인 프로필에 묘한 자존심이 상했다. 그렇게 따지면 나도 뭐 이야기 할거 많다, 고 자책하면서-.
사실 내가 더 배신감을 느꼈던 것은 그 신춘문예의 심사위원으로 있었던 사람이 바로 나의 은사라는 사실이었다. 그러면서 나는 평소에 그 선생님이 나의 글에 대해서 일언반구도 없었다는 사실에 주목하게 된 것이었다. ‘그래, 처음부터 그 사람은 나를 싫어했어.’ 혹은 ‘그 사람이 심사위원인 이상, 나는 절대 등단할 수 없어’ 라는 생각에 나를 위로하기까지 했던 것이었다. 그러면서 그가 썼던 글을 쓱- 한번 읽어보고선 그의 글을 폄하하기 시작했다. ‘분명히 개인적인 친분으로 등단했을 꺼야’ 라는 생각이 수도없이 스쳤다.
그리고 며칠이 지난 후, 우연한 기회에 당시 프린트했던 그의 등단작품을 다시한번 읽을 기회를 만들었다. 하나하나 차근차근 읽어보니 이번엔 사정이 달라졌다. 먼저 그의 글은 읽기가 아주 ‘쉽다’는 특징이 있었다. 그리고 그의 소재는 어떻게 보면 워낙에 많은 사람들이 다루기에 차별화 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는 위험에도 불구하고, 그의 시선은 그 문제적 ‘감독’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바로 그러한 감독을 보는 ‘관객’에 있었다는 점이 특기할 만 했다.
나의 글은 어떠했을까를 생각해 보았다. 나의 글이 혹시 내 자신의 지식을 과시하는 주인입장이 되어 평론 대상이 되는 영화를 노예처럼 부린 것은 아니었을까. 이렇게 위압적이며 수직적으로 특정지식에 의지해 영화를 내려다보며, 훑은 것은 아니었을까. 똑똑해 보이려고만 해서 오히려 그 글을 읽은 사람은 분석된 영화를 정작 보고싶지 않게 만든 것은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번 2기 연구원 모임에서 발표했듯이, 나의 꿈은 한국인이 느끼는 한국의 영화에 대한 비평을 기꺼이 ‘영어’로 써서 문화적 DNA인 ‘코리아니티’를 전 세계 사람들에게 전파할 수 있는 책을 쓰는 것이다. 그러기에 ‘로마인 이야기’의 작가 시오노 나나미도 강조했듯이, 외국어로 쓰기에 앞서 ‘모국어’로 순화된 글쓰기의 내공을 기르고자 이런 ‘무모한’ 도전을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결국, 좋은 평론이란 언제나 작품과 수평적으로 대화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열심히 노력은 했지만, 나의 글 속에 혹시 열정과 공감은 사라지고 대신 표현자와 맞먹으려고 한 ‘자아도취’에 빠졌던 것은 아닌지 반성해 본다.
정재엽만이 낼 수 있는, 비록 덜 세련됬다 하더라도, 깊이 있는 목소리를 찾는 것이 올해 1월1일이 나에게 준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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