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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명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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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월 6일 19시 43분 등록
날씨가 험하지요? 이 곳은 아까 '폭풍의 언덕'처럼 눈보라가 휘몰아치더니, 조금 뜸하네요. 이런 날씨에는 사랑이야기가 어울릴 것 같아 기억을 뒤져봐도 별 건 없네요.
그래도 비슷한 것 하나 골라봤습니다.
날씨 험한 주말을 위한 소품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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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사람들에 비하면, 내 인생이 우여곡절이 많았던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나 자신은 내 인생이 밋밋한 중간색처럼 느껴진다.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인 것 같다. 젊은 날에 연애가 안되었던 이유는 여자의 삶으로 진입하기 싫었기 때문이다. 무언지 모르게 말랑말랑하고 나긋나긋한 연애상태에 빠지는 것이 생래적으로 맞지 않았다. 연애-결혼-중산층의 삶으로 이어지는 정규코스를 거부했다고 할까.



농촌에 대한 첫사랑을 제외하면, 내 인생의 에피소드는 40대에 찾아왔다. 그나마 내 삶을 황폐한 수준에서 벗어나게 해주었으니 고마운 일이다. 그러나 내 눈은 너무 분석적이라, 사랑이라는 자기최면에 오래 머물게 내버려두지 않는다. 사랑의 기본은 환상이기 때문이다. 그의 이기심, 그의 탐욕, 그의 허풍, 그의 태만, 그의 소시민의식...이 훤히 보일 때조차 처음마음을 간직하게 되지는 않았다. 그것이 40대에 맞이한 두 번의 사건이 열애가 못되고 에피소드에 머물게 된 이유이다.



어느날 썰렁하기 그지없는 20대를 추억하다가, 써클선배의 어깨짓 하나를 떠올렸다. 과천 영보수녀원으로 엠티를 갔을 때였다. 굳이 내 옆으로 비집고 들어와 앉던 장면이 어제처럼 떠올랐다. 그리고 이십 오년이 흘렀다. 우연찮게 연락이 되어 종로에서 서 너명이 모였다. 밥먹고 호프집까지 즐거웠다. 돌아와서 일기장에 다음과 같이 끄적거렸다. 그게 전부이다.



이십 오년

단조롭고 밋밋한 내 청춘의 갈피에
그래도 남달랐지 싶은
선배의 몸짓 하나가 있다.
경동교회나 과천 영보수녀원에서
아무 말 하지 않았어도
가끔 꺼내보는
어깨짓 하나가 있다.
이십 오년만에 마주한 그는
그래도 쟤 예쁘게 컸다는 소리를 하여
예쁘지 않게 늙는 중인 나를 웃기더니,
이런저런 얘기 끝에
그 때는 아무런 생각을 할 수 없었노라고
방 하나에 식구들이 바글바글했노라고
그 얘기만 한다.
회를 살 수 있는 나이가 되어서야
한 번 안아보자며 슬쩍 당기더니
이마에 입술을 댄다.
사람많은 종각 지하철역에서였다.
이래저래 그의 속내는
또다시 이십 오년 후에나
들을 수 있을 터였다.
IP *.81.16.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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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한자식
2007.01.09 20:23:45 *.102.143.14
하~왠지모르게 가슴이 짠해지네요...
이십오년이지난후에야
이마에 입술을 댈 수 있었던 그 사연이,
담담하게 그려짐이 더더욱 짠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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