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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월 6일 19시 58분 등록
본문자격증 시험에 세 번째 도전한 친구가 있었다. 그러니까 3년 걸렸다. 내 보기에 능히 가능할 것으로 보이나, 아니 그 정도는 해줘야 할 것으로 보였지만 그녀 자신은 늘 자신 없어 했고 안타까움에 그녀를 자극하기 위해 모진 소리를 했다. 마음이 아팠지만 그래서 안본다면 어쩔 수 없는 노릇이라 생각하고 몰아쳤다. 20여년 만에 만나 동병상련이라고 반갑다며 위안을 얻고자 하는 친구에게 겨우 한다는 소리가 '너 그 시험에 합격 못하면 나 너 안볼 거야, 우리 시시하게 살지 말자'였다. 등짝을 두들겨 대며 꼭 해내라고 윽박지르듯 소리를 질러댔다. 그녀는 기어들어 목소리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는 대답을 억지로 하고 갔다.

돌아오는 길목에 나는 생각했다. 왜 이리 속이 상하는가. 그것은 그녀만의 문제가 아닌 바로 내 문제일 수 있다는 것에 더 신경이 쓰였을 것이다. 그리고 화가났다. 그녀의 말대로 동병상련이었으니까. 그런데 나는 유유상종이란 말까지 확대해 떠올리며 화가 치미는 듯한 생각이 들었다. 내가 저 친구를 위로한답시고 맞장구를 쳐대며 한데 어울려서 포기하고 멈춰야 하는가를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하고 숨이 막혔다. 사실 종류야 다르지만 시험에 임박한 처지야 똑
같고 나이들다보니 잡념이 많아선지 생활을 걸머쥔 채 해야하니 여의치 않는 정도가 아니라 죽을 맛이기는 하지만 그런 배경을 떠나 그녀의 그 자신없는 모습이란 보는 이마저 두통이 일 정도였다. 게다가 안 되는 이유를 정당화하고 짓눌린 어깨하며 어느새 삶이 그녀에 씌운 올가미에서 헤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음이 그저 갑갑할 수밖에.

내 얼굴이 의심스러워졌다. 내 모습은 어떨까? 바로 저 모습이 내 모습이겠지?
그리고 나는 세워두었던 약간의 계획을 수정하기에 이르렀다. 시험이 끝나고 나서 해야 할 일들과 만나고 싶었던 사람들의 목록을 다 지워버렸다. 부질없는 짓이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피천득의 수필 <인연>이 떠올랐다. " 아사꼬와 나는 세 번 만났다. ...세 번째는 아니 만났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헤어졌다가 다시 만나거나 오랜만에 보게 될 경우에는 잘나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힘 없는 친구, 너무나 힘들어 하는 친구를 보고 있으려니 내 머리
까지 지끈 거리며 아픈 통증을 느꼈다. 그러면서 나 자신을 생각해 보았다.

친구와 내 입장을 바꾸어 다른 사람이 나를 볼 때 내가 바로 그 친구의 모습일 거라는 것에 짜증이 일었다. 그녀가 이제와 20년 전에 땄어야 했을 자격증을 따
는 모습이 측은한 게 아니었다. 그녀가 지금 잘 살고 못사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도 아니었다. 그녀에게서 찾아볼 수 없는 자신감, 무기력, 도저히 어쩔 수 없어하고 헤어나려는 의욕도 없는 것 같은 깊은 그 무력감에 내가 다 힘이 빠지는 것 같았다. 그랬다. '나구나, 네가 나구나, 네가 내 얼굴을 보여주기 위해 여기 이렇게 와서 내 앞에서 나를 이야기 하고 있구나.'

돌아와 그녀를 곰곰히 생각했다. 무엇이 그녀를 그렇게 무기력하게 만들었나?
두 분 어르신이 다 교직에 계셨으며 나름대로 누구 못지않게 당당한 20대의 그 찬란했던 빛을 어디에다 다 버리고 쪼글쪼글 쭈글쭈글 펴지지 않는 주름살에 삶의 고단함이 덕지덕지 깊숙이 패인 채, 그는 그 얼굴 나는 내 얼굴을 서로 깨닫지 못하고 살다가 서로의 얼굴을 확인하고서 그제서야 어느새 늙어감을 한탄하는가. 있어 보이라는 것이 아니다. 누가 밥 못 먹고 살까봐 걱정하는 것도 아니다. 왜 우리의 얼굴이 이 모양이어야 하는가 말이다. 그 발랄함과 열정과 패기를 도대체 어디에 다 빼앗기고 말았단 말인가? 이 절절한 아름다움이 흘러 넘쳐야 할 꽃다운 40대에...

오늘 그녀에게서 전화가 왔다. "믿기지 않아, 나 합격했어. 보고 또 보고 또 봤어 여러 번 확인 했어"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내 모습 내 얼굴을 보는 것처럼 그녀의 얼굴이 환하게 내 앞에서 아른거렸다. 그녀가 겅중겅중 뛰면서 소리치면서 기쁨에 감격하고 안도의 숨을 몰아쉬는 장면이 떠올랐다. 이뻐지는 것 같았다. 젊어지는 것 같았고 당당해 지는 것 같았다. 우리가 노력하는 이유는 바로 이것이다.

젊음을 되돌리려는 것이 아니라 잘난 척 뽐내려는 것이 아니라 빛나는 열정과 찬란한 가능성을 포기하지 않는 꿈과 건강한 시련을 언제까지라도 달게 받고 싶은 것이다. 더군다나 이 아름다운 절정의 40대에...

장하다 친구야 정말 장하다. "모르겠다. 이걸로 내가 뭘 할 수 있을지... 그래도 일단 안심이 되" 그녀의 담담한 목소리에 벌써부터 밝은 기운이 감돈다. (그거야, 바로 그거야. 네가 얼마나 좋은데 가서 얼마나 많은 보수를 받을 거라 기대하지 않아. 바로 그 자신감, 네 스스로 해냈다는 그런 자신감이 우리에게 절실하게 필요했던 것이지. 너를 짓눌러온 그 무기력을 벗어던지고 너는 새롭게 재미있고 신나게 이전 보다 훨씬 더 힘차고 당당한 목소리로 삶을 이끌어 나가게 될 것이야, 그렇지? 비로소 삶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이렇게 스스로를 깨우치며 서로를 이해하며 그저 피식 웃는 웃음이란 것을 우리 나누게 되는 것일지도 몰라)

오늘밤에는 잠이 잘 올 것 같다. 네가 내 어깨의 짓눌림까지도 날려 보냈나보다.
IP *.70.72.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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