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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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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월 11일 09시 46분 등록
느낌 속에 흐르는 시간

1.

꿈속에서 ‘너는 누구냐?’ 묻길래,
‘잘 모르겠습니다’ 라고 대답했다.

어찌보면 나는 이름이 없다.

나의 부모가 나를 낳아서 이름을 지어주셨는데
지금은 그 부모가 생명을 주고 이름지어준 나는 보이지 않고
그 이름에 의해서 만들어진 내가 있다.

흔히 자아(自我)라고 부르는 나는
이름의 의미를 알게 되면서 오늘 속의 나로 성장하고
하루의 일상 속에서 나를 이끄는 주체다.

어느 날부터 인가,
내 안의 그 이름 없는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나(自我)는
그 알 듯 말 듯한 내 안의 나를 잊어가며
역사와 내 주변의 세계 속에서 살다가 흩어져간
사람들의 흔적들로
오늘 속의 나를 만들어왔다.

‘엄마, 이 거...?’
‘아부지, 저게 뭐예요?’
이름을 가진 나는 그렇게 조금씩 자라면서

처음엔 나를 사랑한 부모에게
나를 업어 키운 친척 할머니.,
그리고 형제자매, 동네 또래 친구, 형들에게

묻고 묻고 또 물었으면서
오늘을 사는 나를 만들었다.

날마다 나는
세상이 신기하고 아름답게 보이던
내 안의 누군가는 잊어가고
대신에
사람의 말과 글자와 개념들을 배우고
기억 속에 담으면서
오늘을 사는 나는 만들었다.

조금 더 커서 ..

그 나(自我)는
사부님과 스승님들에게서...
그 세상 속의 길을 배우고 그 길 위를 걸으며
생각하고 행동한다.

어쩌면 지금의 내가 쓰는 글은
내가 만나고 보고 듣고 배운 한 시대를 살다간
사람들의 표정, 언어, 몸짓들,
그리고 그것들이 만들어낸 업적과 가치들을
내 안의 어딘가에 있는 듯한 누군가의
느낌을 보태어 새롭게 재구성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태어나서 세상 속에 살고 있는
이름 지어지지 않은 나에 의해서
또 하나의 나는 만들어지고
오늘을 만들며 어제를 쌓고
오늘을 부수며 내일을 찾고 있다.

그래서 '나는 이름이 있지만 이름이 없고,
나이기도 하고 내가 아니기도 하다.‘


2. 내 안에 이름 없는 나

나는 가끔씩
내 안의 이름 없는 나를 발견한다.
생각과 생각 사이의 애매한 공간 속에서
이어가는 이야기의 연결이 모호한 순간들 속에서
생각이 끊기며 멍하니 먼 산허리를 바라보면서
전철을 기다리며 어두컴컴한 굴 쪽을 바라보다가...

나는 가끔씩
침묵하고 있지만 항상 거기 있는
내 안의 누군가를 발견한다.

그렇게 나를 가끔씩 일깨우는 그 존재는
말과 생각으로는 아득하고 흐릿하고 모호하지만
생생한 느낌으로 내게 다가오곤 한다.

' no name !'

나의 시야와 나의 감각, 그리고 나의 생각들 사이에서
그냥 그대로 불쑥 나의 의식 속으로 찾아들고
흠칫하는 순간에 사라져버리는 그 존재를 느낄 때마다
그 구분 지을 수 없고 온전하게 알지 못해서
언젠가부터 그 존재를
나는 ‘노 네임’ 이라고 모호하게 이름 지었다.


3.

내가 쓰고 싶은 이야기는 확대하고 조금은 과장되게 해석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인간의 행동을 이끌고 있는 어떤 주체에 관한 이야기다.
과학적인 방법론으로 따지자면 물질과 정신의 매개물에 관한 이야기이고 정신분석학적인 측면에서는 의식과 무의식의 주체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리고 오늘을 살고 있는 자아의 관점에서는 실제와 상상을 통합하는 하나의 총체적인 인간관으로 세계와 자신을 바라보는 생각에 관한 이야기이다.
자연의 물리적인 현상은 수없이 많고 복잡한 구성요소들에 의해서 자발적으로 조직되어지고 진행된다.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자연의 물리적인 세계에 대한 이해는 비례 선형적으로 진행하는 전통과학의 법칙이나 원리처럼 이루어지지 않고 물이 얼거나 끓는 것처럼 어떤 임의적인 한계에 따라 비선형적으로 진행되어지고 난해하고 불규칙적인 현상들이 혼돈이 아니라 보다 더 복잡한 그리고 더 심층적인 체계를 가진다는 연구(카오스, 복잡성과 같은)는 이미 충분히 있어왔다. 나는 그러한 개체와 환경과 과제(task)간에 역동적으로 상호보완하는 다이나믹한 시스템과 생태학적인 관점에서 검을 다루며 겨루던 상대와 환경과 세계를 바라보는 인간의 행동에 관한 나의 견해를 쓰고 싶은 것이다.

상당히 긴 시간동안 검을 들고 운동을 하면서 세계와 내가 분리된 관점에서 ‘무엇을’ ‘어떻게’ 라는 보다 신체적이고 기능적인 관점에서 생각을 하다가 상대적인 기술과 전략들, 그리고 순간적으로 선택하고 행동하는 전술적인 행동들로 발전하면서 나는 ‘왜?’ 라는 질문에 대답을 요구했고 그 때문에 생각들은 발전해서 본질이나 근원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해 왔다. 그리고 그러한 생각들이 단순히 사변적인 것에 그치지 않고 구체적인 행동과 연계하여 실체로서 나타나는 현상들 속에서 답을 찾으려고 했다. 그 결과로 하나의 전체론적인 사고를 갖게 되었다.
현상 속에서 물질과 정신, 의식과 무의식, 실제와 상상이 분리되지 않고 존재하는 그 상호보완적인 나의 어떤 상태와 세계와 나를 구분하고 그 구분에 따라 존재하는 조금은 더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로서 활동하는 신체를 지닌 자연물리적인 생물학적 개체로서 나의 경험과 배움들에 관한 이야기들을 쓰고 싶어 했다.

4
그 시작은 아주 단순한 질문이다.
만약에 보다 더 본질적인 나와 그 내가 살고 있는 세계를 만든 누군가가 있다면 -그것이 신이나, 우주나 대자연이라고 우리가 부르는 것처럼 인격화되어 있든 아니든- 그가 이렇게 내가 사람들로부터 듣고 또 과학적인 방법론을 통해서 알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복잡하고 많은 법칙들로 만들었을까? 라는 아주 단순하고 어리석을지도 모르는 질문을 하게 되면서이다.

나의 대답은 항상 ‘ 그렇지 않을 것이다.!’ 였다.

과학적인 방법론이 표본을 추출해서 모집단을 추정하고 객관적인 관찰을 통해 귀납된 사실들을 보편화하고 일반화하듯이 세계에 관한 연구되어진 원리나 법칙들을 통해서 연역적으로생각을 진행하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결론은 군집화(chunking)를 거듭했을 때 거기에는 단 하나의 원리가 존재할거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거대한 우주나 삶을 영위하는 세계가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이해해 왔던 간에 (신학적이든, 철학적이든, 과학적이든) 우리의 이해와는 상관없이 그것이 일관되게 존재해 왔다는 사실에 대해서 이해 한다면 그것을 통제하거나 조작하는 어떤 원리도 마찬가지로 일관되게 존재했을 것이며 유일할 것이라는 추론이 가능해진다. 복잡하고 어려운 방법으로 설명하지 않고 아주 단순하게 생각하더라도 기계란 내부적인 구조나 매카니즘이 어떠하든 사용자에게 단순할수록 정확하게 조작되어지고 통제되어진다.
그래서 나의 대답은 항상 ‘거기에는 단 하나의 “법칙”만이 있을 것이다.’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5.

살아서 움직이는 인간은 두뇌의 활동과 신체의 활동을 통해서 행동(behavior)한다.

일상을 살아가는 행위이든, 정교하고 치밀하게 검을 다루는 운동기술적인 행동이든 거기에는 인과의 법칙들이 존재하고 관여 한다.그리고 그러한 법칙들을 초월해서 통찰이나 깨달음 같은 것들에 의해 행동의 의미와 가치를 창출하는 인과의 법칙을 초월한 또 다른 체제가 존재하고 영향을 미친다. 그것을 구성하는 다양하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정신적 신체적 요소와 구성방식들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은 항상 일관되게 통합되어져서 하나의 구체적인 반응 즉 행동(behavior)으로 나타나게 된다.

세계나 인간 행동을 바라보는 관점은 크게 두 가지로 양분된다. 부분들의 집합이라는 종합적인 관점을 지향하는 원자론적이거나 환원론적인 관점과 분리되지 않는 전체로서 의미가 있고 그 의미를 구성하는 부분들에 대한 관계나 질서를 규정하고 있는 현상학적이고 인간주의적(humanism)적인 관점이다.
나의 견해는 어떤 하나의 관점을 지향하지 않고 두 개의 관점을 통합하여 어떤 균형 있는 법칙이나 원리 아니면 설득력 있는 설명을 하고 싶은 것이다.

그런 세계에 대한 통합적인 관심은 이론적으로 정립하기 어렵고 과학적인 방법론의 입장에서 본다면 아직까지 불합리한 부분이 많다. 일반적으로 거대이론이라고 불리며 개똥철학으로 치부되기 쉽지만 최근에 와서 상당한 필요성이 제기됐다.

학문은 세분화를 거듭하면서 통합화라는 가장 모순된 개념을 강조하고 있다. 사화와 문화는 세계화하면 할수록 더욱 국지화되어야만 경쟁력을 가질 수 있는 모순적인 문제를 해결해야만 했고 DOS 운영체제가 발전해서 사용자에게 더 쉬운 Window 체제가 될 때 그 내부적인 process는 더욱 복잡해졌다.
건전하고 올바른 삶에 대한 가치를 정립하게 되면 그에 따른 실천을 위한 세밀하고 실행되어질 수 있는 구체적인 계획들이 필요한 것처럼 말이다.

어떤 것들이 영역별로 세분화되어 질수록 또는 보다 더 큰 단위로 통합되어 질수록 상대적이거나 대립적인 영역의 존재가 배제되어 질 수 없다는 것을 예시해 준 것일 것이다.
즉 통합적인 전체성에 의한 부분들의 관계와 질서가 그러한 부분들의 속성과 기능에 영향 받으며 일방적이지 않고 상호보완적이라는 것이다.

6.

지역에 따라 각기 다르게 발전하던 펜싱의 검법들이 세계화된 시합에서 승리하기 위해 독특성을 가지되 통합적인 규칙아래 적용되어지며 경쟁하는 검법에 대항하여 독자성이 강화되어 왔다. 승리를 위한 치밀하고 세분화되는 검법과 기술들의 매카니즘과 훈련방법들 그리고 그것들의 결과물로서의 인간행동은 하나의 통합적인 전체성을 지닌 개인이나 유파의 독특성에 의해 완성되어 진다는 것은 강조해도 잘못된 것이 아니며 바라보는 모든 관점에서 정당성을 갖는다.
겁법들은 전체성에 따라 기술들의 사용방식과 전개방식이라는 역할과 관계를 결정한다. 그것들은 통합된 조화로운 혹은 승리할 수 있는 검법으로 체계를 형성한다. 상대적으로 동시에 각각의 기술들은 속성에 따라 범주화되고 보다 더 치밀하게 구성요소들을 세분화하며 훈련과 시합을 통해서 강화된다.

이 둘은 독립되어 있으면서도 일방적이지 않기 때문에 서로에게 영향을 미친다. 고전적으로 용(用)과 체(體), 기능주의나 구성주의 관점이며 가치를 배우는 것과 기능을 배우는 것은 다르고 독립적이지만 완전히 독립되어 질 수 없는 것과 같다.

어떻게 조작할 것인가와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는 다른 것처럼 별개의 것이지만 그것은 분리되어서 설명되어지면 모호하고 추상적인 것으로 변하기 쉽다.
그래서 두뇌활동과 신체활동, 사유와 실천, 혹은 가치와 기능이라는 별도의 체제아래 발달하는 양자를 통합하는 시도가 그 의미를 갖는다.

지난 10년 동안의 문헌고찰이나 학문적 근거에 따른 현장경험과 사유는 이러한 상호보완적인 양자간의 관계를 규명하고 모순되지 않는 통합적인 원리로서의 가설을 정립하는 것이었다.

모든 원리나 개념들이 시작되고 궁극적으로 귀속될 수 있는 하나의 패러다임을 설정하고 그 아래 분리되거나 독립적으로 느껴지는 하위개념들이 무엇이며 어떻게 형성되고 그리고 왜 그런가를 설명해 나가는 것이다.
나의 생각들은 넓게는 인간행동 그리고 좁게는 펜싱선수의 전술적인 행동의 인과관계를 알아보기 위해 다음과 같은 가설을 설정하였다.

일차 가설. 1. 하나이면서 동시에 전부다.
세계는 동일한 것이지만 동시에 개인에게 각각 다르다.

이차 가설. 1. 행동하는 개인은 반응한다.
생물학적 개체로서 개인은 자연물리적인 법칙아래
생리적 역학적인 기능으로 반응한다.
이차 가설. 2. 개인은 아는 만큼 지각한다.
세계에 대한 개인의 지각은 학습과 경험에 의존한다.
이차 가설. 3. 전체가 부분의 관계와 역할을 결정하고
부분의 속성과 기능이 전체를 조율한다.
지각과 행동은 상호보완된다. 행위를 구성하는 각 요소들의 평형상태가 있고 그러한 평형상태는 다수이며 변화되고 조작되어 질 수 있다.

인간행동에 관한한 이차 가설에서 벗어나는 설명되어지지 않는 예외는 없는 것 같다.


5.

우리는 인간이며 인간적이어야 한다.

독일최고의 무공훈장인 Iron cross (철십자 훈장)를 수여받기위해 온 병사에게
철혈재상으로 불리웠던 비스마르크는 물었다.
‘여기 돈 100 마르크와 철십자 훈장이 있다. 어느 것을 갖겠느냐?‘
‘참고로 돈으로 따지면 훈장은 5마르크에 해당한다.‘
병사가 경례를 붙이고 대답했다.
' 95마르크와 훈장을 주십시요!‘’

이 이야기는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에 대한 구분을 가지고 있는 비스마르크의 의도와 그것을 통합하여 적절한 대응을 하고 있는 병사의 대답이다.

세계나 인간에 대한 이해나 표현에 있어서 인문학과 자연과학은 서로 연속선상에서 마주보며 동일한 것에 대해 매우 다른 표현을 사용한다. 하나는 인간의 입장에서 또 하나는 인간적인 것을 배제한 입장에서 자연의 현상에 대해 접근하는 방식이다.
인문학적인 표현들은 사실들에 주관적인 관념을 부여하고 개인을 생명력 있게 하고 그래서 가치와 의미를 창출하지만 때로 지나치게 과장되고 추상적이고 관념적이어서 실제적이지 못하다. 반면에 엄밀하고 과학적인 가치중립을 지향하는 개념들은 무미건조하다. 자연의 물리적인 현상으로서 인간을 해석해야 한다면 그래야 되겠지만 실제의 삶에 있어서 우리는 결코 그럴 수 없다.

내가 추구하는 것은 인간성을 잃지 않으면서 진실에 사실을 추가할 때 나의 노력과 의미는 존재하고 보람된다는 생각이다. 가치가 지극히 개인적이고 주관적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상대적이며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면 과학기술(science technology)의 급격한 발달에 상대적인 균형을 갖추지 못하는 인간적인 가치와 의미는 나를 부정적인 방향으로 이끌어가기 쉽기 때문이다.
세계에 대한 이해가 인간적이지 못하다면 그것이 결국은 내가 세계를 이해하려는 목적에 반할 것이라는 것이고 내가 살고 있는 세계는 갈수록 비 인간화되지 않겠는가?

최고, 탁월함, 풍요 같은 개념들은 평범, 보편성, 그리고 빈곤과 함께 지극히 상대적이고 추상적인 개념이다.
총체적으로 나를 구성하고 있는 삶의 요소들의 균형이 갖추어지고 보다 넓은 의미로서 우리속의 나의 존재가 적절하게 상호작용할 때 부각되고 있는 사실들은 가치롭게 된다.
어찌보면 나는 사실을 알고 싶은 것이 아니라 내가 알고 있는 것, 알고 싶은 것이 사실이기를 기대하고 가정하며 살아가기 때문에 그 표현에 있어서 내가 어떤 균형을 가질 때 그래서 보다 사실에 기반한 주관적이고 독자적인 가치와 행동을 통해서 보다 인간적이고 긍정적으로 내가 속한 세계와 소통할 수 있을 것이다.


6.
‘어떻게 했는데..?’
‘그냥,.. 아무 생각없이 했는데요..’

유능한 선수들은 조직적인 체계나 훈련 없이도 탁월한 기량을 발휘할 수 있다.
누군가가 농구골대에 공을 잘 집어넣고 있다면 그에게는 원리나 설명이나 단계적인 접근이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냥 하고 싶은 대로 놔두면 된다.
만일, 목표가 복잡한 직업상의 일이나 고도의 운동수행(performance)을 요구하는 경기일지라 하더라도 그가 주어진 시간 내에 작업을 수행할 수 있고 목표에 도달할 수 있다면 리더나 지도자는 관여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것들을 구성하고 있는 체계(system)나 그 작동원리(mechanism)을 정립하려는 것은 탁월한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탁월함에 이르고 싶은 사람들을 위해서이며 그러한 사람들을 가르치는 사람들을 위해서이다.

나의 개인적인 견해로 우리가 쉽게 눈으로 식별할 수 있는 신체의 움직임의 차원에서 펜싱의 기초적인 기술이나 개념들과 경기를 위한 전략이나 전술들은 정리해보면 그렇게 많지도 않으며 복잡한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것들을 배우고 훈련하는 것은 현재나 할 수 있는 일을 위한 것이 아니고 미래지향적이며 불가능한 것들을 가능하게 하기 위한 접근과 소통의 단계를 발견하기 위해서이다.
그것은 자연스럽게 존재하는 현재 상태의 균형을 깨고 상대적으로 비교되고 의식적으로 추구되어지는 목표와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것이다.


7.
‘왜 그렇게 하느냐?’
‘선생님이 이렇게 하라고 그랬는데요?’
‘너는 그렇게 하고 싶니?’
‘어떤 때는 잘되는데, 어떤 때는 잘 안돼요! 잘 모르겠어요!’
‘시합에서는 어떻게 하는데?’
‘아무생각이 없죠...’
‘그럼 연습 때도 그렇게 하면 되잖아?’

실제로 우리를 지배하는 것은 의식이 아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무의식이라고 부르는 자기감각적 주체에 의해서 행동한다.

생물학적인 신체는 움직임에 따른 반응 시간이나 중력에 따른 체중과 무기의 무게들과 같은 뉴튼의 운동 법칙과 자연의 물리적인 법칙들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자연과학적인 지식의 이해는 그러한 신체의 발달과 활용에 있어서 이해를 통해서 효율성을 높여 줄 수 있다.
그러나 개인의 정신적인 영역은 좀 다르다. 신체를 움직임에 있어서 정신의 관여는 긴장, 불안, 공포와 같은 각성상태와 이완, 집중, 몰입과 같은 의식상태 그리고 환상, 예측, 초월과 같은 초자연적인 자각상태를 통해서 나타난다.
정신의 영역은 자기 감각적이며 깨달음, 자각, 통찰 같은 것들을 통해서 신체적인 자신의 상태를 순간적으로 다른 차원으로 바꾸어 놓기 때문에 우리가 알고 있는 자연과학적인 법칙들이 직접적으로 적용되어 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혼란을 느끼는 것은 사고 활동이 신체적인 것인가 정신적인 것인가에 관한 의문이다.
현대 의학의 발달에 힘입은 신경생리학과 같은 영역에서 사고 즉 감각, 지각의 영역에 대한 것들이란 신경학적 기전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생물학적 현상이라는 것은 이미 밝혀진 일반적인 사실이다. 사고나 질병으로 인한 두뇌의 손상에 의해서 의식의 기능이나 신체의 기능의 장애가 온다는 것 그리고 국부적인 자극을 통해서 감각이나 복합적인 신경망 활동에 의한 지각 활동이 일어난다는 것을 알게 됐지만 대뇌의 어떤 영역에 자극을 가했더니 사람이 갑자기 깨닫게 되더라는 실험결과나 발견은 없었다.
그러므로 사고 즉 의식이란 정신(精神)의 영역이 아니라 신체적인 인지활동의 영역 즉 신체의 기능으로서의 한 영역이다.

8.
‘상대가 공격해 들어오면 무엇을 해야 하지?’
‘저는 맞받아치는데요!’
‘어떻게 하지?’
‘이렇게요!’
‘왜 그렇게 하지?’
‘... , 그렇게 하는게 잘 되요.’

미국의 중등학교 체육교육의 지침은 학습발달 영역을 4가지로 구분하고 있다. Bloom(1956)이 행동(behavior)을 학습하기 위한 영역을 인지적 영역(cognitive domain), 정의적인 영역(Affective domain), 심동적인 영역(psychomotor domain)으로 구분하였으며 후에 Cobin(1976, 2002)에 의해 건강체력 또는 기초체력영역 (health related fitness domain)을 추가 하였다.
인지적인 영역은 움직임이나 행위의 발달을 위한 지식과 이해의 영역이다. 지식과 이해는 산술적 계산이나 복잡한 분석적 사고 활동에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움직임의 기능을 위해서도 필요한 것이다. 심동적인 영역은 신체를 움직이기 위해서는 근육과 관절이 내적인 신경체계와 연합되어 구체적이고 반복적으로 실행되어 질 때 발달하는 영역이다.
몸치라고 말하는 신체 활동 기능의 장애는 이런 심동적인 영역의 미발달을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기초체력으로 분류되어 왔던 건강과 관련되어 있는 영역은 근력, 지구력, 유연성과 같은 훈련과 학습 없이도 자연적으로 신체의 정상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요인들이며 인지나 심동적인 영역의 관여 없이 환경과 상황에 따라 자발적으로 발달하는 영역이다.

정의적인 영역은 정서(emotion)적인 측면에서 태도나 가치에 관한 영역이다.
어떤 자극에 대해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적인 의미의 평가를 일으키는 태도 반응을 말한다. 즐거움, 슬픔, 분노, 공포, 불안과 같은 보다 선천적인 일차적인 요인들이 경험과 학습을 통해서 이차적인 죄의식, 자존심, 수치심 같은 정서를 생성하는데 정의적인 영역으로서 개인은 외부적인 상황을 자신과 연관하여 어떻게 수용하고 반응하고 가치를 부여하고 대응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개성(character)으로 나타나는 영역이다. 일반적으로 정서는 타인에 의해서 가르쳐지는 것이 아니라 개인에 의해서 수용되어진다.

이러한 영역들은 구분되어지고 집중적으로 발달 할 수는 있지만 독립적이지 않다 보통은 통합적으로 내향적인가, 외향적인가, 이성적인가, 감성적인가 그리고 적극적인가 소극적인가라는 대립되는 연속선상에 놓여있는 성격성향으로 나타나게 된다.
통합적으로 어떤 균형상태를 가지고 있는 개성은 인지적인 영역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던 비네의 전통적인 지능검사가 가드너에 의해 전면적으로 영역을 확장하여 다중지능검사로 발전한 것은 좋은 예가 될 것이다.
검법체계에 있어서도 개인이나 유파가 공격적인가, 방어적인가, 공격을 유도하여 반격을 시도하는 적극적인 반격 타입인가는 내부적으로 구성되는 요인들의 전체적인 방향성이지 구성 요인들을 제거하거나 독립적인 것은 아니다.
성격이나 개성 또는 유파로 불리는 펜싱스타일은 선천적인 개인의 기질이 문화적이고 사회적인 후천적 환경 속에서 학습과 경험에 의해 구체적인 성향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9.
‘불생불멸(不生不滅) 무래무거(無來無去)
본래 낳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으며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는다.

논란의 여지가 많겠지만 나의 견해로는 정신의 영역은 개발되어지는 것도 변화되는 것도 그리고 소멸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우리 또는 내가 의식을 통해서 지각하거나 인식할 수 있는가 아닌가에만 차이가 있을 뿐이다.
정신의 영역을 깨달았던 현자들이 남긴 고서들의 문헌에서 동일하게 하나의 주장을 하고 있는데 그것은 사물과 사건들이 현상으로부터 분리되어지지 않는 전체성에 대한 자각이다.

내가 어떤 것들을 깨닫게 되면 그 결과로 내안에 있는 그것과 연관된 모든 것들이 새롭게 자리매김을 하고 전체적으로 재구성되는 것을 느낀다.
그것들은 인지적인 노력, 수없이 많은 반복훈련(심동적인 영역에서), 절실함 같은 집중적인 태도 들과 연관되어 있지만 그 자체의 결과가 아니다.
인지적으로는 ‘아하~!’ 그렇지... 하며 무릎을 탁치는 순간에
심동적으로는 ‘어!~’하거나 ‘햐~’하는 신기한 느낌으로
정의적으로는 ‘빙그레 미소짓거나 씨익 웃을 수 있는’ 그런 순간속에서
모든 것들은 순식간에 다른 것이 된다.

의식의 영역 밖에 있다가 일시적으로 순식간에 그리고 전면적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그런 깨달음은 무언가 더 크고 완전한 것에 대한 순간적인 통찰이다.
뭐라고 딱히 말하기는 어려워도 확연한 느낌, 그렇게 정신의 영역은 일시적으로 모습을 보이곤 한다. 그것들은 신체적인 노력의 하나인 사고들의 의미를 하나로 통합하여 구체적인 현재상태를 재구성하여 준다.
일시적으로 나타나 순식간에 모든 것을 정리하고 의식에게 자리를 내주고 모습을 감추어버리는 램프의 거인과 같은 것이다.
어쩌면 그래서 그 주체를 정신(精神)이라고 불렀을 것이다.
나는 그것을 노네임(noname)이라고 부른다.

IP *.75.166.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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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아
2007.01.11 10:07:54 *.166.80.24
"I know that I know nothing"
쏘크라테스의 근본적인 철학사조인 <무지(無知)의 지(知)의 자각(自覺)이다.> 나는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백산선생의 글을 읽는 순간 후레쉬맨 시절에 공부하던 철학개론중에서 얼핏 생각이 나서 써 보았습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철학적 명제는 주로 무(無)에서 출발합니다. 자기를 비우는 수행도 무에서 일어난 것이지요.

불가의 참선수행 방법중, 좌선의 자세를 취하고 자신의 마음을 머리위 1m 정도에 올리고 자신을 본다. 즉 자아 발견의 한 방책일 겁니다. 백산 선생께서 이런 심신분리의 화두에 답을 얻어 NO name이라는 크다란 철학적 자기명제를 얻으셨습니다.

간혹, 한번씩 글보면서 뵐 때마다 깜짝 놀라는일이 생깁니다. 뒷날 꿈벗중에 홈런을 칠 일도 있겠지만... 색갈이 너무 강해서 눈이 부십니다.
전에도 드렸지만 "白賁 无咎" <색이 없어야 허물이 없다.>는 주역의 글귀와도 지금의 깨달음이 상통하는 것 같습니다.

"自天佑之 吉 无不利"
<그대는 하늘이 내린 인물입니다. 어찌 안될일이 있갰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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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니
2007.01.11 10:08:13 *.70.72.121
입체감이 느껴져요. 사유와 행동, 정신과 현상의 자유와 무질서에서처럼 보인 것에서의 질서 정연함같은, 엉클어 졌을 때는 도저히 엄두낼 수 없는 것에서 차근히 퍼즐을 완성해가며 작품으로 혹은 형상으로 완성되어지는. 구도의 접근이면 각을 이루시는 그 시점이 반드시 오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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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
2007.01.11 13:17:00 *.191.110.12
백산님
이상과 현실의 조화
실제와이론의 조화로운 글을 읽었습니다.
읽을 수록 가슴뛰고 흥분되었지요.
마치 논문을 보는 기분이었습니다.
아마도 많은 연구도 있었겠지만 내면의 성찰을 통한 명상의 결과물이 이글을 쓸수있게 하지않았나 생각합니다.
이론적 지식이 아무리 집적되어도 나는 누인가? 인생을 어떻게 살것인가에 궁극의 답을 주지는 못하지요.
아마도 명상을 통한 깨달음만이 그에 대한 답을 줄 것이라 믿습니다.
좋은 깨달음이 있는 글 주심에 감사드려요.

나(我)에 대한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나는 누구일까? 아직도 헤매이고있습니다.
찾은듯하면 착각이었고...매번 반복하지만 무엇인가 접근된듯하지만 그또한 부질없는 것이지요.
결론은 무아(無我), 무상... 순간 허무하지만
어제 본 책에서 아주 좋은 결론을 얻었습니다.

그 자체로 온전함을 갖춘 존재이면서
전체의 일부분으로서 다른 구성요소들과의 관계에 의해 의미를 갖는 존재이다.

온전한 나와 너 그리고 그는 궁극에는 하나이지요?
이런 확신이 믿음이 되면 아마도
꿈과 삶그리고 죽음의기로에서 조차 마음이 하나되어 신념이 흔들리지 않을 것이고 그때 나를 찾는 진정한 나가 되어있겠지요.
나는 그래도 내가 누군지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고민덩어리 답글올리니 마음이 가볍고 동지만난 기분이 든든합니다.

깊이있고 동감하는 글 올려주심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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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렬
2007.01.11 23:07:06 *.75.166.78
초아 선생님!
항상 깊은 뜻 남겨 주시고 축복해주셔서 감사합니다.
未濟者의 자세로 나머지 삶을 성실하게 살겠습니다.

써니님 감사합니다.

기원님 격려에 감사드림니다

不行而知 가지않아도 알고
不見而明 보지 않아도 밝고
不爲而成 하지 않아도 이루어진다.
( 항상 맑은 물 같으시니 그저 가만히 들여다 보시기만 하시면
얼굴이 보이겠지요? 찾지마시고...)

먼나라를 떠돌아 다니던 시절에 주머니 속에
품고 다니던 글귀, 기원님께 드림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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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
2007.01.12 15:12:54 *.191.107.119
성렬님 귀중하고 소중한 글귀 가슴깊이 간직하겠습니다.
노트에도 쓰놓고 컴앞에 포스트잇까지....배려감사합니다.
불유구, 무주상보시, 무위행...... 맑은 마음일때만 가능하겠지요.
그 마음 자리도 없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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