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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명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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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월 12일 23시 07분 등록

도서관에서 안정효의 ‘글쓰기 만보’를 훑어보았다. 두꺼운 부피에 질려, 탐색하듯 댓 장 넘겨보았을 뿐인데 예사롭지가 않다. 우선 무지무지하게 실용적이다. 습작으로 쓴 글에서 ‘있었다’와 ‘수’와 ‘것’이라는 말을 모두 지워라, 그 세 단어가 문장을 늘어지게 하는 주범이다. 그 다음에 모든 접속사를 지워보라. 글의 흐름에 별로 지장없다. 접속사를 남발하지 말라. 꼭 써야할 자리라면 글자 수가 적은 접속사를 써라.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그럼에도’로 쓰는 식이다.


요즘 사람들이 ‘-것 같다’는 말을 많이 쓰는 데 대한 지적도 있다. 만약 시저가 “온 것같아, 본 것 같아, 이긴 것 같아”라고 말했다면, 어찌되겠느냐고 한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할 말을 다 했으면 글을 끝내라’
글을 잘 쓰겠다고 미사여구를 늘어놓는 것이 글을 더욱 처지게 한다. 글은 요령으로 쓰는 것이 아니다, 요령은 뚝심을 이길 수 없다. 안정효는 하루에 A4 한 장 분량의 글을 쓴다고 했다. 그대신 매일 쓴다.
‘글쓰기 만보’의 목차를 보니, 소설 위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 서운했다. 그래도 읽는 데까지 읽기로 하고, 안정효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았다. 다작을 하는 작가라는 인상을 갖고 있을 뿐, 그의 작품을 한 번도 읽은 적이 없었다. yes24의 인터뷰 기사가 마음을 파고든다.


일생을 한 분야에 매진하여 성공한 방법이 오롯이 펼쳐있었다. 그는 20대에 영어로 소설을쓰겠다고 마음먹었다. 그 때부터 영어 소설을 꼼꼼히 읽었다. 마음에 드는 작품은 번역을 해서 작품의 구조와 문체를 철저하게 분석했다.


“20대 때, 나는 연애도 안했어. 방학에도 학교 도서관에 틀어박혀 영어 소설을 읽고, 번역하고, 습작 원고를 썼지. 그때 하도 열심히 책을 읽어서 그런지 이제는 무슨 책을 봐도 재미가 없어.”


마흔 일곱에 미국에 가서 영어로 쓴 ‘하얀 전쟁’이 히트했다. 20년 넘게 준비한 셈이다. 안정효는 말한다.
“글 쓰려고 하는 사람들이 참 많지만 다들 성공할 때까지 버티질 않는 것 같아. 원고는 10장도 안 쓰고 사인 연습을 하는 형국이지”


안정효의 장인정신은 자료수집에서 더욱 빛난다. 언젠가 쓰고 싶은 소설이 생기면 자료부터 수집한다. 죽기 전에 예수 그리스도와 부처에 대한 소설을 쓰고 싶어 20대 중반부터 그에 관한 자료를 모으기 시작했다. 낚시터에서 만난 사람들과 나눴던 이야기 중에 소설 속에서 써먹을 만한 것도 모조리 종이에 받아쓴다.


요즘 영화대사를 사전으로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다. 하루에 영화를 3-4편씩 보면서 좋은 대사를 수집하고 있다. 지금까지 3000편의 영화에서 대사를 뽑아 플로피디스크 10장 분량을 모아두었다니, 이렇게 말할 자격이 있다.


“내 자랑은 아니지만, 내가 지금까지 해온 것은 누구도 쫓아올 수 없다고 생각해. 20대부터 지금까지 매일매일 해온 것이니까. 일단 해온 양만 봐도 쉽게 따라올 수 있는 것이 아니지.”


몇십년 동안 방대하게 축적한 자료와 아이디어로 무장한 전사의 모습이 거기에 있었다. 그런 사람은 전쟁터에서 이길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는 150편의 번역서와 많은 소설을 남겼다. 쓰고 싶은 글만 쓰려고 20년 전에 기자생활을 관두고 전업작가가 되었다. 요즘도 오후 2시까지는 작업을 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글을 쓴다. 주말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강화도 낚시터에 간다. 천둥번개가 쳐도 간다. 가서 사람들도 만나고 아이디어를 정리한다.


처음 습작을 쓰던 시절부터 지금까지 안정효는 문학과 생활 모두 엄격하게 관리해왔다. 그래서 수많은 작가들이 첫 번째 작품만 내고 소리 없이 사라지는 현실에서, 60대 중반이 넘은 지금까지 꾸준히 창작과 번역을 할 수 있었다. 자연히 그의 목소리에 힘이 실린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들을 하고 싶은 시간에 하는 프리랜서가 그 정도 자기 관리를 못하면 나가 죽어야지”


한 분야에 뜻을 두고 마침내 일가를 이루는 방법이 여기에 있다. 사회가 복잡해지고, 수명이 연장됨에 따라 직업을 복수로 갖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했었다. 가히 multi-lives의 시대라는 데 공감한다. 그러나 일생동안 한우물을 파는 프로페셔널의 뚝심이 믿음직하다. 절대로 배반당할 수 없는 방법이 아닌가. 그의 끈기와 인내, 마침내 도달한 입지가 부러워 죽겠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다. 맙소사! 출발이 늦은 사람은 어떻게 하란 말인가!



IP *.81.17.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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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로
2007.01.13 13:28:05 *.145.231.168
더 오래 살면 되지요.

글쓰기 만보,
참 읽기 힘들던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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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현
2007.01.13 17:23:29 *.67.52.179
"출발이 늦은 사람은 어떻게 하란 말인가?"
- 제 자신에게 던지고 싶은 질문입니다.-
조정래 선생님, 안정효 선생님등 일가를 이루신 분들은 집념과 열정이 굉장하십니다.
조정래 선생님은 원고에 오자가 생기면 처음부터 다시 쓰신다고 하십니다. 엄격함, 자신에 대한 철저함 보통사람은 따르기가 어려워요.
매사에 흐리멍텅한 저는 늘 결심히 흐지부지 됩니다. 이 의지박약...
하여튼 저는 그래도 열심히 사랍니다. 평생 배우겠다는 신념 하나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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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박
2007.01.14 14:14:55 *.218.202.224
맞아요. 더 오래 사시면 되죠.
어린것이 너무 쉽게 말하죠? ㅎㅎ ^^;
공기 좋고 물 맑은 곳에 사시니 다른 사람보단 훨씬 오래사실텐데요.

예전에 브라이언 트레이시의 Tape에서 흥미있는 걸 들었는데요
"하루에 2시간씩 한 분야의 책을 3년만 읽으면 인정받기 시작하고,
5년간 읽으면 그 분야의 대가가 된다"는 내용이었어요.
극단적인 면이 없지 않지만 일리 있는 말 같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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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화
2007.01.15 08:37:15 *.72.153.164
안정효님의 책을 보고 놀랬었습니다. '헐리우드키드의 생애'를 봤을 때, 영화번역가 이거나 영화감독이라는 착각을 했을 정도였습니다. 준비를 많이하는 분이시구나.

저도 늦게 시작하는 사람 중에 하나인데... 어떻게 하면 돼죠?
어떤 만화에서는 현재는 잘 쓰지 못하더라도 즐겁게 그일을 매일 계속할만한 열정이면 좋은 작가가 되기에 충분한 재능이라고 하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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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석
2007.01.15 12:44:12 *.224.251.52
자로님, 명쾌한 해결책, 감사합니다.
2막인생을 기획하는 첫 순서로 정기검진부터 해야겠습니다.

지현님, 정화님, 절대로 늦은 연배가 아닌 것같은데요?
안정효가 영어로 소설을 쓴 것도 마흔 일곱이네요.

옹박, 맞아요. 공부밖에 할 것이 없다니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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