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명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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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에서 안정효의 ‘글쓰기 만보’를 훑어보았다. 두꺼운 부피에 질려, 탐색하듯 댓 장 넘겨보았을 뿐인데 예사롭지가 않다. 우선 무지무지하게 실용적이다. 습작으로 쓴 글에서 ‘있었다’와 ‘수’와 ‘것’이라는 말을 모두 지워라, 그 세 단어가 문장을 늘어지게 하는 주범이다. 그 다음에 모든 접속사를 지워보라. 글의 흐름에 별로 지장없다. 접속사를 남발하지 말라. 꼭 써야할 자리라면 글자 수가 적은 접속사를 써라.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그럼에도’로 쓰는 식이다.
요즘 사람들이 ‘-것 같다’는 말을 많이 쓰는 데 대한 지적도 있다. 만약 시저가 “온 것같아, 본 것 같아, 이긴 것 같아”라고 말했다면, 어찌되겠느냐고 한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할 말을 다 했으면 글을 끝내라’
글을 잘 쓰겠다고 미사여구를 늘어놓는 것이 글을 더욱 처지게 한다. 글은 요령으로 쓰는 것이 아니다, 요령은 뚝심을 이길 수 없다. 안정효는 하루에 A4 한 장 분량의 글을 쓴다고 했다. 그대신 매일 쓴다.
‘글쓰기 만보’의 목차를 보니, 소설 위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 서운했다. 그래도 읽는 데까지 읽기로 하고, 안정효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았다. 다작을 하는 작가라는 인상을 갖고 있을 뿐, 그의 작품을 한 번도 읽은 적이 없었다. yes24의 인터뷰 기사가 마음을 파고든다.
일생을 한 분야에 매진하여 성공한 방법이 오롯이 펼쳐있었다. 그는 20대에 영어로 소설을쓰겠다고 마음먹었다. 그 때부터 영어 소설을 꼼꼼히 읽었다. 마음에 드는 작품은 번역을 해서 작품의 구조와 문체를 철저하게 분석했다.
“20대 때, 나는 연애도 안했어. 방학에도 학교 도서관에 틀어박혀 영어 소설을 읽고, 번역하고, 습작 원고를 썼지. 그때 하도 열심히 책을 읽어서 그런지 이제는 무슨 책을 봐도 재미가 없어.”
마흔 일곱에 미국에 가서 영어로 쓴 ‘하얀 전쟁’이 히트했다. 20년 넘게 준비한 셈이다. 안정효는 말한다.
“글 쓰려고 하는 사람들이 참 많지만 다들 성공할 때까지 버티질 않는 것 같아. 원고는 10장도 안 쓰고 사인 연습을 하는 형국이지”
안정효의 장인정신은 자료수집에서 더욱 빛난다. 언젠가 쓰고 싶은 소설이 생기면 자료부터 수집한다. 죽기 전에 예수 그리스도와 부처에 대한 소설을 쓰고 싶어 20대 중반부터 그에 관한 자료를 모으기 시작했다. 낚시터에서 만난 사람들과 나눴던 이야기 중에 소설 속에서 써먹을 만한 것도 모조리 종이에 받아쓴다.
요즘 영화대사를 사전으로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다. 하루에 영화를 3-4편씩 보면서 좋은 대사를 수집하고 있다. 지금까지 3000편의 영화에서 대사를 뽑아 플로피디스크 10장 분량을 모아두었다니, 이렇게 말할 자격이 있다.
“내 자랑은 아니지만, 내가 지금까지 해온 것은 누구도 쫓아올 수 없다고 생각해. 20대부터 지금까지 매일매일 해온 것이니까. 일단 해온 양만 봐도 쉽게 따라올 수 있는 것이 아니지.”
몇십년 동안 방대하게 축적한 자료와 아이디어로 무장한 전사의 모습이 거기에 있었다. 그런 사람은 전쟁터에서 이길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는 150편의 번역서와 많은 소설을 남겼다. 쓰고 싶은 글만 쓰려고 20년 전에 기자생활을 관두고 전업작가가 되었다. 요즘도 오후 2시까지는 작업을 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글을 쓴다. 주말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강화도 낚시터에 간다. 천둥번개가 쳐도 간다. 가서 사람들도 만나고 아이디어를 정리한다.
처음 습작을 쓰던 시절부터 지금까지 안정효는 문학과 생활 모두 엄격하게 관리해왔다. 그래서 수많은 작가들이 첫 번째 작품만 내고 소리 없이 사라지는 현실에서, 60대 중반이 넘은 지금까지 꾸준히 창작과 번역을 할 수 있었다. 자연히 그의 목소리에 힘이 실린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들을 하고 싶은 시간에 하는 프리랜서가 그 정도 자기 관리를 못하면 나가 죽어야지”
한 분야에 뜻을 두고 마침내 일가를 이루는 방법이 여기에 있다. 사회가 복잡해지고, 수명이 연장됨에 따라 직업을 복수로 갖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했었다. 가히 multi-lives의 시대라는 데 공감한다. 그러나 일생동안 한우물을 파는 프로페셔널의 뚝심이 믿음직하다. 절대로 배반당할 수 없는 방법이 아닌가. 그의 끈기와 인내, 마침내 도달한 입지가 부러워 죽겠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다. 맙소사! 출발이 늦은 사람은 어떻게 하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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