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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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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월 22일 21시 53분 등록
'나'는 누구일까요?



나는 경상남도 의령군 부림면 지리산 자락의 여배리에서 태어났다. 50여 년 전 나의 고향은 말 그대로 벽촌이었다. 먹고살기가 어려웠던 친척들은 부산으로 김해로 뿔뿔이 흩어져 떠나갔고, 우리 가족도 내가 네 살 때 고향을 등지고 대구로 이사했다. 나는 어머니가 마흔이 넘어서 낳은 늦둥이다. 어머니는 밤낮으로 농사일을 해야 했으므로 주로 큰누이가 나를 업어서 길렀다고 한다. 어머니 젖이 안 나오니 젖은 얻어먹어보지도 못했고, 달래주는 엄마도 없으니 하루종일 울면서 업어달라고 졸랐다고 한다. 지금도 누이들은 내가 엄마 젖도 못 얻어먹고 그후로도 가난 때문에 제대로 먹지도 못해 키가 자라지 못했다고 혀를 찬다.



나는 어머니가 부엌 아궁이에 나뭇가지를 넣으면서 부지깽이로 이름 석 자 쓰는 법을 가르쳐준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채, 한 살 적은 나이에 초등학교에 들어갔다. 가족 중 누구도 내 학교생활에 관심을 가질 여유가 없었지만, 나는 그래도 열심히 학교에 다녔다. 내게 학창시절은 그리 즐거운 기억이 아니다. 가난 때문이었다. 기워 신은 양말이며 발가락이 나오는 구멍 뚫린 운동화, 점심시간마다 친구들 앞에 내놓고 싶지 않았던 보리밥도시락이 한창 감수성 예민한 시절 내게 큰 상처가 되었다. 때문에 내가 어른이 되면 이런 가난의 불편함을 절대로 자식들에게 대물림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뭐든지 열심히 하고 또 남한테 져서는 안 된다는 집념이 생겼고, 그게 유달리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나의 승부욕을 형성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미술이나 과학 같은 과목에 재주가 있었고, 앞으로 과학자가 될 것이라는 꿈에 한 치의 의문도 품지 않았다. 그림을 그리거나 조각을 하거나, 고등학교 때까지 미술점수는 항상 90점을 넘었다. 내가 유년시절을 보낸 대구의 유성들과 수성못은 그런 나에게 자연에 대한 이해를 넓혀주었다. 중학교 3학년이 되면서, 그나마 좀 폈던 가세가 다시 기울었다. 어머니가 이집 저집 다니며 빨래나 집안일을 해주고 돈을 받아왔지만 혼자서 모든 가족을 부양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내가 도시락을 못 싸가는 날이 생기면서부터 우리 가족은 모두 각자 먹고살 길을 찾아 뿔뿔이 흩어졌다.



아버지는 내게 공부는 그 정도 했으면 됐으니 공업고등학교로 진학해 하루빨리 혼자 밥벌어 먹고살라고 하셨다. 나는 그것이 '내 운명'이려니 했고 그렇게 못할 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당시 우리 옆집에는 독신으로 직장생활을 하는 큰누이뻘 되는 분이 한 분 계셨는데, 내가 공부를 곧잘 한다는 얘기를 듣고는 공고에 가는 것을 한사코 말렸다. 자기가 도와주겠으니 큰누이가 있는 서울로 가서 공부를 해보는 것이 어떻겠냐는 것이었다. 어차피 아무런 대안도 없었던 부모님은 그렇게 하라고 허락했다. 나는 그 누나가 시키는 대로, 전교 10등을 오락하락하던 내 성적에 맞춰 경기고등학교에 지원해 보기로 했다.



대구누나는 부랴부랴 경기고등학교에서 사용하는 교과서를 한 보따리 사다주었다. 고등학교 입시를 겨우 두 달여 앞둔 때였는데, 전혀 생각지도 않던 일이어서 마음은 더욱 바빴다. 경기고등학교에서 가르치는 교과서는 그동안 내가 배워온 교과서와는 상당히 달랐다. 하지만 나는 밤낮으로 열심히 공부해서 그 교과서들을 모두 독파해 버렸다. 그렇게 공고에 갈 뻔했던 '내 운명'은 서울로, 그것도 한국 최고의 명문고등학교로 유학을 떠나는 운명으로 극적으로 반전되었다.



고3을 눈앞에 둔 고2 2학기, 나는 시간을 아끼기 위해 '오뚝이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오뚝이공부란 앉은뱅이책상에 앉아서 공부하다가 그 자리에 그대로 드러누워 자고, 다시 오뚝이처럼 발딱 일어나서 공부하는 방식이었다. 그 덕분에 반갑지 않은 평생의 친구도 하나 생겼으니, 바로 사타구니의 습진이다. 같은 자세로 하도 오래 앉아 있었더니 아주 지독한 습진에 걸려, 이후 40여 년을 가려움증으로 고생했다.



나는 경기고등학교 3년을 통틀어 전교 6등의 성적으로 졸업했다. 대학 입학시험에서는 법대 수석보다도 높은 점수를 받아 공과대학 시험을 치른 경기고 친구들을 모두 물리쳤으나,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중앙고 출신 송문섭군에게 2점 차이로 수석을 뺏겼다. 당시로서는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로 안타깝고 분했다. 그러나 지금은 달리 생각한다. 만약 그때 내가 수석을 했다면 오늘날의 나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도전할 상대가 없다고 착각하고 자만하여 더 이상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오늘날까지 무슨 일이든 최선을 다해 달리는 나의 삶의 태도는 이때 규범화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전자공학과에 진학하고 반도체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순수한 학문적 적성과 흥미에 의한 것이었다. 1970년대 초반 당시 이과에서 가장 인기가 있던 학과는 물리학과와 전자공학과였다. 내가 진학할 학과를 두고 고민하자 담임선생님은 전자공학과에 가보라고 하셨다. 솔직히 나는 전자공학이 뭘 하는 학문인지도 잘 모르는 채 서울대 전자공학과에 지원했다. 교양과정부 1학년 때는 거의 매일 아르바이트하는 시간 외에는 물리와 수학을 공부하면서 보냈다. 물리와 고등수학은 정말 흥미로웠고 역시 내 적성에 딱 맞는 학문이었다. 숙제는 물리 원서의 홀수번 연습문제를 푸는 것이었지만, 나는 짝수까지도 다 풀어보았다. 그것으로도 만족이 안 되어 버클리대학이나 캘리포니아공과대학에서 나온 물리서적들을 구해 따로 공부했다.



내가 본격적으로 반도체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대학교 2학년 때였다. 알고 보니 전자공학 전공 중에서도 물리·수학과 가장 관련이 많은 분야가 바로 반도체였다. 나는 자연스럽게 반도체를 공부해 보기로 결심했다. 반도체는 수학과 물리를 좋아하는 나의 적성에도 맞는 분야였지만, 매우 어려운 학문이고 고도의 전문기술이었기 때문에 더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수학과 물리에 도통하고 이를 응용해야 함은 물론 다차원의 공간지각 능력도 있어야 하기 때문에 가장 어려운 분야로, 다른 공대생들은 거의 기피하는 분위기였다.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라는 반도체의 특징이 나의 도전정신을 자극했고, 산을 하나하나 넘으며 새로운 것을 알아낼 때마다 느끼는 보람과 쾌감이 나를 유혹했다. 어려서부터 미술과 조각, 디자인 등에 유달리 관심과 소질이 많았던 것도 반도체의 설계와 이해에 큰 도움이 되었다.



1976년, 애타게 바라던 미국 유학이 좌절됐다. 사실 입학허가를 받은 곳은 10여 군데나 되었다. 하지만 장학금을 주겠다는 학교가 하나도 없었다. 집안형편상 장학금을 받지 않으면 유학이란 한낱 꿈에 지나지 않았다. 장학금수혜 대기자명단에 오른 학교도 대여섯 군데 있었지만, 끝내 장학금이 오지 않아 결국 '유학 재수'를 하게 됐다. 미국 명문대학에 유학가 있는 친구들 얼굴이 떠오를 때면 안타깝고 억울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었다. 그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그때까지 가난 때문에 받았던 상처와는 또다른 아픔이 가슴을 쳤다. 그러던 어느 날, 대학원에서 알게 된 김도현 형이 '소개팅'을 한번 해보라고 권했다. 형은 샘터사에서 편집기자로 일하는 '김씨 아가씨'인데, 둘이 잘 어울릴 것 같으니 한번 만나보라고 했다. 그녀와 사귀면서 나는 많은 위안을 받고 마음의 평정도 되찾았다. 누군가가 나만큼, 아니 나보다 더 나를 걱정하고 나를 위해 기도한다는 사실은, 실망과 좌절의 늪을 헤쳐나올 큰 힘을 안겨주었다.



그렇게 인연을 만들어가던 76년 그해, 처음으로 국비유학제도가 생겼다. 그것은 형용하기 어려울 정도로 기쁜 희망이자 기회였다. '인생지사 새옹지마'라 했던가! 당당하게 국비유학생 1호로 선발된 나는 벅찬 가슴으로 내 삶의 새로운 장을 열게 되었다. 불행이 혼자 찾아오지 않듯 행운 또한 그런 것인지, 이듬해에는 미국의 여러 대학에서 장학금도 받게 되어 장학금을 두 가지나 받고 여유있는 마음으로 유학길에 오를 수 있었다. 1977년 7월 10일 나는 '김씨 아가씨'를 아내로 맞았고, 8월 10일에는 아내의 손을 잡고 유학길에 올랐다. 매사추세츠 주립대학 전자공학 박사과정에서는 반도체와 관련된 물리, 수학, 플라즈마, 양자역학 등을 공부했다. 나는 전자공학과 반도체 관련 기본과목의 기초가 꽤 탄탄했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학교생활에 적응해 나갈 수 있었다.



매사추세츠대학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박사 자격시험에 합격한 나는, 1979년 초 비슷한 반도체분야의 더튼 교수에게 연락해, 전학하고 싶다는 의사를 전달했다. 더튼 교수는 전과목 A를 받은 내 성적과 논문을 보고는, 입학허가는 물론 장학금도 검토해 본 후 연락을 주겠다고 했고, 남들보다 3개월 앞선 6월부터 스탠퍼드에서 공부하게 되었다. 그 이후로 나는 '무엇이든 간절히 소망하면 이루어진다'는 믿음을 갖게 되었다. 스탠퍼드대학으로 옮겨온 첫 학기 말에 박사진입자격시험(Qual)에 합격한 나는 승승장구 거칠 것이 없었다. '박사논문과 아이는 달이 차야 나온다'는 말이 무색하게, 나는 졸업을 5개월이나 남겨두고 예정일보다 훨씬 이른 1982년 12월 23일에 박사논문을 발표했고 무사히 심사를 통과했다. IBM의 공식초청으로 2천여 명의 과학자가 운집한 강당에서 공식발표회를 하기도 했다. 여기저기서 입사제안이 들어왔다.



내가 스탠퍼드대학교에서 박사학위 과정을 끝낸 것은 1983년 5월이었다. 당시에는 오일쇼크로 불경기가 계속되어 박사학위 보유자, 그것도 외국인 학생을 뽑는 곳은 거의 없었다. 그런 중에도 나는 다행히 상당히 높은 연봉을 받고 IBM에 입사하게 되었다. 자타가 공인하는 세계 최고이자 당시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던 IBM이라면 나의 꿈을 펼치기에 안성맞춤이라고 생각했다. 그중에서도 IBM의 두뇌인 왓슨연구소에서 일하게 된 것은 세계 최고의 반도체기술을 섭렵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왓슨연구소는 직원 2천 500명 가운데 박사학위 보유자가 800여 명이나 되는 엄청난 연구소였다. 나는 열심히 배우고 열심히 일했다. 그리고 각오를 새롭게 다졌다. 매달 한 건씩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고 특허출원을 해보자고. 당시 IBM 연구소에서는 4M D램 개발이 한창 진행중이었다. 엄청나게 투자를 해가며 새로운 메모리기술을 극비리에 개발하고 있었던 것이다. 운 좋게도 나는 이런 새로운 기술을 자연스럽게 접하게 되었다. 사실 내게는 나 자신과의 굳은 약속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세계 최고의 반도체기술을 제대로 섭렵했다고 판단되는 날 한국의 반도체산업을 일으키는 데 기여하겠다는 것이었다.



IBM에서는 사직서를 낸다고 그냥 내보내지 않는다. 반드시 퇴직인터뷰를 한다. 무슨 문제가 있어서 퇴사를 하는지, 혹시 극비문서 같은 것을 가지고 나가는 건 아닌지 물어보고, 나중에 IBM에 재입사할 수 있는 자격을 줄 것인지에 대해서도 결정하는 자리다. 나는 그곳의 관리담당(변호사 업무) 임원과 인터뷰를 했다. 그는 영주권까지 주고 연봉도 남들보다 훨씬 많이 받는데 왜 옮기려 하느냐고 물었다. 나는 무슨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라 반도체산업의 중심이 극동아시아로 옮겨가고 있고, 한국이 현재는 엄청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지만 상당한 성공가능성이 있다고 믿기에 뭔가 기여하고 싶어서 떠난다고 대답했다. 그는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다가 말했다. "좋은 생각이오. IBM이 컴퓨터시스템 분야에서 이미 강력한 경쟁자가 된 일본 회사로부터 메모리반도체를 공급받고 있는데 이것이 장차 문제가 될 소지가 있다고 봅니다. 비일본 회사로서 새로운 메모리 공급 회사가 등장하면 IBM에게도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됩니다." 그는 나에게 몇 달치의 월급을 보너스로 주면서 언제라도 IBM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조치해 주었다. 감사한 일이었다. 당시 IBM의 매출은 약 700억 달러로 우리나라 총수출과 맞먹었다. 공·사를 분명히 하는, 청교도적인 IBM의 엄격한 근무수칙은 나의 조직생활에 지금도 좋은 규범이 되고 있다.



1985년 10월 초, 나는 실리콘밸리 근처의 삼성반도체 미국 법인 연구소에 입사했다. 삼성에서 처음 맡은 직책은 4M D램 개발팀장이었다. 당시 삼성은 1M D램 개발에 한창 힘을 쏟고 있었다. 주로 중국 사람들을 스카우트해서 1M D램 연구를 진행하고 있었는데, 4M D램을 연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삼성은 그때 256K D램을 겨우 만들어 막 판매하기 시작했는데, 64M D램은 엄청난 적자를 내고 있었다. 어려운 시기였고 사람이 필요한 시기였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삼성이 4M D램 개발에 착수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반도체'라는 사업의 특성 때문이었다. 경쟁사의 독점과 기술종속을 막고 세계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반드시 차세대제품을 개발해야만 한다. 4M D램의 개발에 회사의 운명이 걸려 있었다. 나는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열정을 경영하라』 (진대제 지음, 김영사, 2006) 중에서 발췌



***



그동안 각계각층의 요청에 의해 국내외에서 상당히 자주 강연을 해왔다. 공돌이로서 조국에 돌아와 반도체신화를 일구어낸 젊은시절, 글로벌기업의 최고경영자로서 세계와 경쟁했던 일, 그리고 '공익근무요원(정통부 장관)'으로서 이 나라의 IT산업을 지휘하게 된 사연 등 알고 보면 그리 대단치도 않은 나의 인생이야기에 사람들은 귀를 기울여주었다.


내가 초청받아 간 강연회의 주제는 대부분 디지털 산업과 정보통신(IT)에 관한 것이었는데, 아이로니컬하게도 강연 후 질문의 내용은 주제에서 벗어나는 것이 많았다. 예를 들면 '성공의 비결이 무엇이냐?'는 식의 질문이 대부분이었다. 그때마다 나는 간단히 대답해 주기는 했지만, 나중에도 이메일과 편지로 물어오는 질문이 꽤 많았다. 대부분 성공비결에 관한 것이었는데, 어떨 때는 '박사하고 사장하고 장관까지 다 해보았는데, 그것도 모두 성공적으로 잘한 것 같은데, 무슨 비장의 방법이라도 있느냐?'는 식의 노골적인 질문도 있었다.


물론 나는 그들이 무엇을 궁금해하는지 알고 있고, 최대한 그들에게 도움이 되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 특히 이공계 대학생들을 비롯한 미래의 지도자가 될 젊은이들이 야망에 빛나는 눈빛으로 진지하게 질문을 던질 때는 속을 다 뒤집어서라도 전부 보여주고 싶다. 그렇지만 "이렇게만 하면 성공할 수 있다"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때문에 그때그때 생각나는 대로 답변하게 되고, 또 질문하는 사람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답변을 했던 것 같다.


내가 정답을 얘기해 줄 수 없었던 이유는 모범답안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었다. 항상 초를 다투는 기술개발로 세계와 싸우느라 너무 바쁘게 살아왔으니 그런 것을 정리해 둘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천명의 나이를 넘어 세상을 알 만하게 되었다는 생각도 들고, 이제껏 살아온 삶을 찬찬히 뒤돌아보니 항상 나를 이끌어준 삶의 진리 같은 것이 하나 있었다. 언제 어디서나 꿈과 목표를 높이 설정하고 끊임없이 열정적으로 최선을 다해 그 목표에 도전하는 것, 그리고 나중의 결과가 어떻든 간에 겸허히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 이를 한 마디로 "성공하려면 스스로의 열정을 경영하라"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러나 너무나 먼 후의 현실적이지 못한 목표를 꿈으로 설정하면 현실과의 괴리가 커서 쉽게 좌절감을 맛보고 중단해 버릴 가능성이 있다. 그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된다. 나는 좀더 실현 가능하면서도 가까운 목표를 세우라고 권하고 싶다. 많은 젊은이들이 CEO가 되기 위해 무엇을 준비해야 하느냐고 묻는다. 그럴 때마다 내가 얘기하는 게 있다. 대기업의 사장이 되기 위해서는 부장과 임원을 거쳐야 하는데, 일을 잘하는 사람이 아니면 부장이나 임원이 될 수 없을 것이다. 또 임원이 되었다고 해도 남들보다 빼어난 능력을 보여야 사장의 후보군에 들어갈 수 있다. 그러니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우선 뛰어난 부장이 되는 것이다.


즉, 자기가 어떤 분야나 어떤 지위에서 일하든 그 안에서 세계 최고가 되겠다는 꿈을 가지고 노력을 경주해야 더 크게 성공할 수 있다는 얘기다. 마케팅을 하든 연구개발을 하든 생산현장에서 일하든, 자신의 경쟁자가 누구이고 어느 수준에 있는지를 항상 눈을 부릅뜨고 귀를 크게 열고 살펴야 한다. 이는 또는 자신이 속해 있는 회사 내에서뿐만 아니라 국내에서, 또 세계에서 누가 본받을 만한 대상인지를 항상 찾아봐야 한다는 의미다. 이렇게 중간단계에서 성공하겠다는 꿈과 목표를 높게 설정하고 계속 스스로를 채찍질하면서 끊임없이 노력해야 그 다음 꿈을 실현할 수 있다. 그래서 자신의 주변환경을 잘 이해하고 현실성 있는 꿈을 설정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만루홈런을 치려는 욕심에 계속 삼진을 당하는 것보다는 매게임에서 적시안타를 치는 것이 훨씬 더 가치있는 일이라는 비유와 일맥상통할 것이다. 이런 계획하에 30대에 최고가 되어 40대에 모든 기량을 남김없이 발휘할 수 있다면 가장 이상적일 것이다. 분야를 막론하고 최고가 되면 삶의 궤적에 대해 고민할 필요가 없다. 자기 자리에서 최고가 되면 자연히 다음 길이 보이기 때문이다.


나는 "전공이 이공계인데 비전이 있을까요?"라고 질문하는 대학생이나 신입사원들을 만나면 오히려 "자네의 경쟁자가 누구인지를 우선 알아보라"고 권유한다. 최고가 되는 일은 그렇게 거창한 일도 먼 일도 아니다. 그저 지금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서 최고가 되어보면 된다. 일본에 가면 3대나 4대를 이어가면서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찹쌀떡이나 쟁반국수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또 인정받는 작은 가게들이 있다. 최고란 이런 것이다. 앞으로 우리나라도 이런 전통이 자리잡는 사회가 되리라고 믿는다.


내가 아무리 이렇게 설명해도 사람들의 질문은 여전히 변하지 않는다. 돈을 많이 벌기 위해, CEO가 되기 위해, 또 장관이 되기 위해 젊어서부터 어떤 계획을 수립해 왔느냐는 것이다. 미안하지만 나는 회사에서 일할 때 CEO가 되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일하지 않았다. 적어도 그 바로 근처에 가기 전까지는 확실히 그랬다. 그런 목표는 높기는 해도 너무 멀리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대신 나는 '내가 현재 하는 일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최고가 되겠다'는 목표를 한 번도 잊지 않았다. CEO는 지속적으로 좋은 실적을 만든 것의 결과이지 처음부터 그런 목표를 세운다고 되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하지만, CEO가 되는 것은 그간에 자신의 업적이 쌓임으로써 이루어지는 결과이지 결코 그 자체가 목표가 될 수 없다.


내가 중학교 때 한약재를 작두로 써는 아버지를 도와 한참 한약재를 많이 썰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마다 나는 어떻게 하면 한약재를 상하지 않고 균등하게, 또 빨리 자를 수 있나 골똘히 생각했다. 한약재를 어떤 각도로 넣고 작두를 어느 정도 높이에서 어떤 강도로 누르면 잘되는지, 작두의 고리를 얼마나 단단히 조여야 힘이 덜 드는지도 고심했다. 자기 자리에서 최선을 다한다는 것은 이런 것이 아닐까 싶다.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최선을 다해 일하는 사람에게는 좋은 결과가 올 수밖에 없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열정을 경영하라』 (진대제 지음, 김영사, 2006)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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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
2007.01.22 15:40:15 *.254.30.126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간절함이 함께하는 열정이면 이루지 못할 것이 없겠군요.
미영님 마음을 보는 것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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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포구 성산동
2007.01.22 20:24:10 *.50.171.33
아니 이걸 다 정리하신 거에요?
누님의 열정이 더 대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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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
2007.01.23 16:10:12 *.49.9.23
오랫만에 올리셨네요. 기다리는 사람 많은데....
이분 알파벳을 1234순서대로 메기고 알파벳의 합이 100이 되는 단어를 찾는 재밋는 얘기 하시는 분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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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정
2007.01.23 17:39:47 *.244.218.8
맨 첫줄은 못보고...
언니 얘긴줄 알고 '우와 완전 드라마야~'하면서 중간까지 읽었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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