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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써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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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월 25일 23시 16분 등록

저녁 무렵 짧은 외출을 했다.
예전에 수지침을 공부한 적이 있는데 그들 중에 한사람에게서 연락이 왔다.
오늘 모임 있는 날인데 시간이 되면 참석해서 얼굴 보잖다.
글을 쓰고 있던 참이라 서둘러 대충 마무리를 하고 외출준비를 했다.
화장까지 마치고 나가려는데 갑자기 몸이 가볍지 않음을 느낀다.
괜찮을 거야, 특유의 게으름이겠지 하며 목적지에 이를 때까지 나는 내내 졸음 겨운 사람처럼 눈을 감고 자다시피 하여 가다보니 혜화역에 다다랐다.

전화통화한 이가 내가 나올 거라는 이야기를 사전에 하지 않았나보다.
모두들 눈이 휘둥그레 반가이 맞아주었다.
오랜만에 만나 뵙는 선생님과 함께 1년여 이상 열심히 공부했던 동기들,
그리고 우리들 틈에 끼거나 우리가 그들 틈에 끼어 공부하며 만난 사람들,
어떤 이는 말쑥한 모습으로, 어떤 이는 약간 살찐 모습으로, 어떤 이는 조금 까칠하게 또 어떤 이는 여전히 변함없는 모습으로 자리를 함께했다.

모임에 가면 늘 하는 말 그리고 많이 들어온 말.
"써니씨도 올해엔 좋은 소식?" "써니언니가 있으니 나는 안심에요."
나는 웃으면서 '나는 아니야, 나는 갔다 왔지' 했더니 모두들 눈이 휘둥그fp진다. 짐작하고 있던 이들도 오랜만의 급작스런 나의 발언에 평소처럼 대충 넘어가지 않고 집고 넘어가는 나를 보며 여러 반응들을 보였다.
전혀 몰랐다는 반응과 저렇게 밝은데 하는 사람 등등.
확실히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하고 있었다. 선생님께서는 한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더니만 어쨌거나 그렇게 말할 수 있다는 것은 자기 자신이 그만큼 나름대로 정리가 된 것 아니겠느냐며 격려의 말씀을 해주셨다.

돌아오는 길에 공연히 쓸쓸함이 감돈다. 여러 대화 중 왜 그 대목에서 내가 그렇게 말했지? 그리고 왜 나는 끝까지 나를 더 말하지 않는 걸까? 내가 다 지고 가야하는 것일까? 사람들의 머릿속이 궁금하고 나를 변호하는 일에 소홀했다는 감이 드는 것은 무슨 구차함인지 모르겠으나 그런 기분이 든 것은 사실이다.
비교적 모임을 일찍 종료하고 늦지 않은 귀가를 했다. 그러니까 저녁 먹고 이야기 조금 나누다가 헤어져 돌아온 것이다. 분명 어떤 마음의 어려움이나 육체적으로 피로할 일도 없었다. 그런데 집에 도착해서 마저 쓰려니 졸음이 밀려온다.
하는 수 없이 내일 새벽에 일찍 일어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생각하며 잠을 자기로 마음먹었다.

결코 여니 때보다 늦게 잠에 이르지 않았다. 그런데 내가 벨소리를 못 듣는 것이다. 마치 잠에 취해버린 사람처럼, 지난 가을부터 부쩍 심해진 알 수 없는 움직임의 둔화로 나는 무척 힘들었다. 마음먹은 대로 일을 해나갈 수가 없는 것이다. 지난여름 6월엔가 나는 아르바이트처럼 일하는 직장에서 심하게 하혈 하였다. 그때는 그냥 좀 변화가 있는 거 겠거니 하면서도 이렇게 심한 적은 없는데 하며 당황한 채 무심히 지냈다. 그런데 그때이후 나는 아침에 일찍 깨지 못한 것 같다. 5월에만 해도 아침 일찍 일어나고 직장에서 일하고 - 전보다 힘들지 않은 비교적 덜 힘들게 일하며 공부를 시작 했었다. 그런데 다리가 너무 땡기던 기억이 난다. 종아리가 너무 부으면서 탱탱하게 피가 안 통하는 듯하며 무거웠다.

공부하는 동안에는 어렵지는 않았으나 주관식으로 쓰려고 하면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이해는 되는데 금새 까먹는 것이었다. 더 괴로운 것은 교육학 따위는 무척 재미있다는 것 그런데 나의 흡수율이 저조하다는 것 이런 이유로 인하여 나의 한계인가 답답해하며 당황하고 그런 가운데 꾸준히 독서실 책상머리에 앉아 지내기는 하였다. 그래서 나는 이것이 능력부족이라는 생각만 했다.
나의 몸의 상태에 대한 생각보다는 나의 정신에 의한 의지박약의 나약함만을 탓해온 것이다. 그래서 미칠 지경이었다. 싫은 것이 아닌 능력부족 혹은 효율성의 낙후가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아 죽을 지경이었다.

그리고 귀찮고 지겹게, 지루하게, 많이 혹은 오래 질질 끌며 찌쁘드하고 가뿐하지 않게 한 달의 1/3이상을 차지하는 이 현상들을 이를 갈며 싫어했다. 그리곤 한동안 긴장상태에 놓여있어 그랬는지 그런대로 무난히 넘어갔다. 다만 나는 늘 조마조마했다. 한 달이면 한 열흘 혹은 2주는 내 세상 만난 것처럼 가벼운 혹은 안도한 기분이 들고 나머지 반은 맨스에 대한 공포에 떨어야 했다. 왜냐하면 맨스를 길게 하다 보니 조금 지나면 또 배란일이 다가오고 그러면 또 몸이 으슬으슬 으시시 이상해지는 것이다. 어떨 때는 배란기가 와도 맨스의 공표에 짓눌리게 된다. 그래서 수첩에 진하게 표시를 해대게 되는 것이다. 내 의지대로 일을 처리할 수 없을지 모를 공포에서 해방되는 일은 내가 미리 알고 대처해 나가는 길밖에 없기에 어느새 그런 방패를 해나가게 되었던 듯싶다.

그런데 시험을 마치고 난 요즘에는 어깨가 너무나도 아픈 것이다. 어깨가 무슨 바윗덩어리를 올려놓거나 쇳덩어리를 뭉쳐 올려놓은 듯 짓누르는 것이다. 나는 그래서 나의 글쓰기 버릇이나 몰아치기 버릇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인 줄만 알았다. 자고나면 머리가 맑지 않았다. 마치 감기든 사람처럼 묘한 으슬으슬 함과 밤새 비나 눈이 내려 기압이 내려간 상태 같은 공기의 느낌을 받고 밖을 내다보면 날이 말짱한 것이다. 나는 마치 늘 안개가 자욱이 내려앉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고산지대에 놓여있는 사람 같았다.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그러하다. 화장기 없이 외출하는 날엔 아주 못 봐준다. 다 죽어가는 면상이라니...

이런 나의 모습은 꽤 오래된 듯하다. 시력도 급격히 떨어졌고 눈이 시며 자꾸만 눈물이 났다. 봄에는 아마 더할 것이다. 찬바람을 받으면 눈물로 아이라인이며 아이샤도우까지 다 지워져 버리고 만다. 나는 단순히 노화인 줄 알았다.
지금도 골이 띵하다. 감기나 그런 것과는 다르게 띵하면서 멍멍하면서 그리고 최근 들어 가장 뚜렷해진 증상은 자꾸 졸리다는 것이다. 밤새도록 자고 나서도 또 졸리고 자꾸만 졸리다. 그래서 일부러 역동적인 움직임을 강제하여 성당을 오가며 걷기도 하고 그랬다. 마음은 전혀 힘들지 않은데 왕복하여 집에 올 때쯤엔 갑자기 힘이 든다. 그리고 사람 많은 곳에 가면 머리가 아프다. 나는 호프집이나 노래방 등의 폐쇄적 공간에 잘 가지 못한다. 목이 금새 확 가버린다. 옆에서 누가 담배를 피우면 마구 기침이 나와서 견딜 수가 없다.

또한 요즘엔 갑자기 자고 나면 붓는다. 손과 발이 띵띵 붓는다. 친구들에게 물으면 그네들은 그렇지가 않은데 나만 유독이 맥을 못 춘다. 그러나 아마 거의 대부분 나의 이런 면을 아무도 믿지 못할 것이다. 그 어느 순간은 너무나 열정적 기질로 인하여 나의 존재를 드러냄에 악을 쓰거나 열변을 토하기 때문이리라. 그래서 나는 나의 이런 일면 들이 나의 이중적 구조인가 의심하곤 했다. 그리고 체질을 설명할 수 없기에 무병인가 속으로 의심해보기도 하면서.

어쨌거나 나의 상태는 서서히 조금씩 더 심해지는 방향으로 나를 잠식해 들었고 나는 그런 일상의 나를 비교적 오래도록 간과한 채 방치해 온 것이 사실이다.

맨스가 올 때쯤 보통 대게의 경우에는 스르르 잠이 오거나 맨스 기간에 잠에 취해 들 때에는 드라큐라 영화가 생각나기도 하였는데 물론 드라큐라가 매혹적인 시선을 주기에 그에게 빨려들기도 하겠지만 드라큐라의 연인들이 그에게 빨려드는 데에는 그가 그의 입술을 가져다 그녀들의 피를 흡입하게 되면 그 황홀경에 옴짝달싹 못하고 맥을 놓아버릴 수밖에 없다는 느낌이 절로 들곤 하였다. 여자의 몸에서 피가 빠져나갈 때에는 마치 사랑받을 때처럼 그런 현상이 절로 일어나는 것이란 걸 미루어 짐작하여 느낄 수가 있었다. (남자들에게 이런 느낌을 설명할 수 있을까? 둔한 여자라면 아마 그냥 귀찮은 일로 치부하여 관찰하지 않았을지 모를 일이다.) 내 몸의 피가 서서히 빠져나감을 느끼는 것은 또 다른 성애 같은 그야말로 절정의 오르가슴이 아닐까 상상이 저절로 들곤 하였다. 왜냐하면 옴짝 할 수 없는 그 순간의 진지함이 부르르 떨림보다 오히려 몇 배 강한 아득하고 고요한 신비감 같은 느낌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마치 절정에서의 멈춤처럼 그리고 그 여운을 숨죽여 흠뻑 느끼는 것이다. 줄줄 혹은 격하게 피가 새어 나오는...

그러니까 나의 경우는 맨스 기간이 성스러운 어떤 기간과도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 시간만큼은 절체절명의 고요와 평안과 무엇에도 방해받지 않고 온전히 쉬어야하는 절대적 안식과 평온함만이 존재해 줄 수 있기를 애절하게 갈망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현실에서 그런 생활에 이르기까지는 힘이 들기에 그리고 웬만한 노력으로는 성취될 수 없기에 대강 느끼고 말며 금새 현실의 차가운 기운과 냉랭함에 나의 생각의 자유와 상상과 느낌들을 할 수 없이 포기하고 저당잡힌 채 여기까지 질질 끌려진 상태로 연명하기에 이르렀다. 우리가 어떤 진정한 고비를 넘어선다면 이러한 느낌들 까지도 충분히 느끼고 즐기고 개선할 수 있을까? 나의 맨스 기간을 안식일에 비유하면 그릇될까? 처음에 나는 맨스가 노폐물을 내보내는 정도로 생각했지만 그로인해 맑은 피가 재생되어지는 것이라는 순결한 의식 같은 느낌을 갖곤 했지만 나중에는 내 피를 주는 어떤 의식을 상상하게 되었다. 새로운 피를 생산한다는 것은 나를 덜어내어야 함이기에 그게 화장실의 변기통을 통하여 씻어냄을 통한 배설의 쾌감만이 아니라 내 몸을 돌고 나온 나의 것을 누군가 무엇엔가 에게 나누어 주는 의식을 느끼게 되었다.

제대위의 촛불만 성스러운 것은 아니리라. 내 몸 구석구석을 돌고 나온 피, 한때는 내 심장에서 펌프질로 깨끗하게 태어나 제 힘껏 내 몸 어디에든 후련하게 쓰였다가 정해진 길, 저만이 가야할 통로로 빠져나와야 하는 그 알 수 없는 끝도 한도 없는 쉼 없는 작동과 룰과 규칙을 다 살아낸 한줌의 피, 그것은 생성과 죽음의 일체된 반복일 뿐이 아니겠는가? 그러기에 피, 너는 언제 어디에서도 똑 같은 무게의 신선함과 방향이 있음을 내 어찌 모르랴.

우리 몸이 맨스를 통해 피를 내보내는 의식이나 드라큐라에게 빨려 자신의 피를 내보낼 때 스르르 영원한 잠에 드는 자들의 모습이나 별반 차이가 없는 느낌말이다. 그래서 여성의 피는 그렇게 혼자서 수없이 죽고 수없이 스스로 태어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신비감에 젖어들게도 된다.

내 몸에 피가 너무 많이 빠져 나가서 겪게 되는 내 육체와 그로인한 정신과 의지의 한계는 늘 한 덩어리 일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순환과 생성과 재생에 관계되는 이러한 일련의 피드백은 몸과 마음이 하나 일 수밖에 없다는 엄숙한 법칙의 유기체적 관계의 맥락을 풀어헤친다.

땅에서, 우리가 일컫는 생명에서 몸과 정신이 따로 일 수 없다. 그래서 그 둘의 조화를 함께 조율하여 나아가야 할 것이다. 더러 썩은 것이 있다면 잘라 내거나 그래도 살릴 수 있다면 살아 함께 움직여야지. 그런데 묘한 미련에서 일까 아쉬움일까 어딘가에 아니면 좋은 수나 방법에 매달리고 싶다. 일테면 기도를 실컷 해보던지 아니면 그대로 멈추게 할 수 있는 다른 대안은 전혀 없는 것일까? 그러는 사이 세월이 가고 변형과 상함이 더 두렵게 나타나게 될지가 문제이다. 그렇다, 우리는 늘 시간의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이럴 때 화끈하게 기적이 일어나 주면 안될까? 모두가 나의 기적을 기뻐하고 따를 텐데. 그러면 나를 통해 증거 할 수 있을 텐데. 그 역시도 만원사례라서 선을 그어야만 하겠지? 신도 바쁘실 테니까 말이다. 그렇다면 나의 서두름을 믿음 없다 탓하지 마시라. 아니거든 내 미룸을 게으르다 탓하지 마시라. 어차피 내 몸이요 내 일일 수밖에 없잖은가. 그러면 나는 그 둘의 결과를 다 지고 갈 수밖에는 없다. 이미 일은 내게 발생한 것이기에. 그래서 이 말은 오래 회자될 수밖에 없는가? 운칠기삼, 기회 있는 사람이 운 있는 사람을 따라가지 못한다.(사전에 없네?..)

아니었으면 좋겠지만 받아드려야 한다면 그에 합당한 최선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병든 너와 그렇지 않은 내가 따로 또 같이 함께 감사할 수밖에 없다. 웃는 나와 우는 네가 함께 있고 잘난 나와 못난 네가 함께 감사한다. 문제는 우는 것에 못난 것에 아픈 것에 있지 않다. 무엇을 깨eke고 어떻게 나아가느냐이다.

나는 혼자였지만 늘 함께 했고 많은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즐거웠지만 외로웠다. 그리고 그러한 것들을 숙명이라 하기 전에 그건 자연스러운 삶일 뿐이다.
그냥 그렇게 산 것이다. 그때그때 최선을 다할 것을 찾고 다짐하고 깨우치면서.

몸아! 네가 나의 생명의 근원임을 나 미처 몰랐다. 너는 내가 어미라고 부르기 이전에 나의 입을 만들어 나왔고 내 곁에 붙어 있었다. 의지와 정신아 너는 홀로 살 수 없음이라. 세상은 시험장이 아니다. 선행으로 나를 감시하여 영원히 영혼으로 살아가고 부활에 이르며 내세에 아름다운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기 이전에 오늘이 있음을 이 오늘을 후련히 살아야 함을 알겠더라. 하여 우리가 구한 것이 좋은 옷과 멋진 집과 비싼 차에 있는 것이 아닌 깨우침에 있더라.

보는 것이 귀하고 듣는 것이 귀하며 이 땅에서 각자의 모습으로 이렇게 함께 할 수 있음이 기쁨이요, 나눔이요, 도움이요, 행복이요, 참 진리이더라.
사랑하는 모든 것들은 꽃과 새와 나비와 노래와 따스함에만 있지 않으며 미운 것, 더러운 것, 하찮은 것, 좋은 것, 나쁜 것, 불편한 것, 아픈 것, 희망과 실패와 조화와 부조화와 생성과 소멸과 어우러짐에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내 나의 사랑은 그것이 사랑이어서가 아닌 각자의 모습에서의 최선과 홀가분한 후련함 그리고 계속한 어우름과 벗어던짐과 갖지 않음의 혼재 속에 있었나보다. 그래서 그토록 하고 싶음을 찾았고, 하였고 끝없이 헤매는가 보다.

사랑하는 이여! 사랑은 그저 사랑이더이다.
미움이여! 더 사랑하고픈 갈증이더이다.
내가 네게 더 많이 얻고자 함은 네가 그만큼 다른 것을 채우고 있었기에 나를 비우고 있었던 것 일뿐 그것은 정작 너의 모든 것은 아니었다.
그러니 나는 늘 너와 함께 있고 너는 늘 나와 함께 있는 것과 다르지 않더라.

너 하나만을 고집하여 목매어 달릴 때 하염없는 눈물지었으나 너를 벗어 나를 무심히 바라보니 네가 내 곁에 꼭 붙어있는 것을 알겠더라.
나의 이기심에서 나의 의욕에서 나의 출장에서 나의 성취에서 나의 곳곳에서 나를 만나고 또 너를 만나 함께 붙어서 살고 있더라.

이제 내가 해야 할 일 혹은 하게 될 일, 하는 일들이 무엇일꼬?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무엇이건 다 하고 있을 터이니.
기분 나는 대로, 흥에 겨운 대로, 마음 내키는 대로 어화둥둥 춤추고 거닐면서
치열한 그이와 바다만 바라보는 그이와 신나는 그이와 또 무서운 그녀와 모를 그녀와 이리 씰룩 저리 둥글 교통하면서, 맥을 잡고, 떠들고, 숨바꼭질하고, 까꿍하며 해맑고 기운차게 더러는 궁상스럽게 훌쩍이며, 목 놓아 울부짖으며 살으리라, 살으리라. 이 땅에 아름다운 물결 흘러넘칠 때까지. 그리하여 마침내 그 시작도 끝도 없는 원이 만들어 지거들랑 우리 모두는 하늘과 땅에 경계 지음도 못 찼고 흥에 겨워 살리라, 살리라. 여기가 어드메냐 서로가 깔깔깔 낄낄낄 키득키득 배꼽잡고 웃으며, 웃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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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dgie
2007.01.25 18:46:04 *.86.31.59
눈물 투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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