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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

여러분이

2007년 3월 2일 01시 34분 등록
늘상 하는 운동을 하러 갔다가 갑자기 후다닥 가방을 챙겨 들고 집으로 와버렸다.
그냥 오늘은 술은 진탕 마셔줘야 될 것 같다는 본능적인 느낌뿐이다.
오자마자 와인을 가득 따라 벌컥 마셨다.
빈속에 그대로 취기가 전해오는 게 냉장고의 치즈를 꺼내러 가는데도 몸의 흐느적거림을 느낄 수 있다.
치즈를 꺼내어 나의 가여운 위를 생각하여 넣어준다.

고양이가 갸르릉 거리며 곁으로 다가온다.
내가 슬픈 걸 알아서 위로하러 온 거니?
치즈냄새가 나서 온 거니?

어느 쪽이던 상관없다.
나는 녀석에게 치즈 한 귀퉁이를 떼어 그의 혀로 음미하게끔 아주 조금씩만 핥게 한다.
녀석은 양보다는 감각적인 시간에 만족하는 듯하다.
어미라는 여자는 또 한잔의 와인을 따라 마신다.
녀석은 여전히 곁에서 미동도 않고 있다.

이상한 녀석이다.
내가 동굴 속으로 숨고 싶은 날.
이유도 모른 채 술을 먹고 싶은 날.
버럭! 하고 에잇! 하고 돌아선 날.
이내 저의 한계를 알아 버린 날.
속에서 너 쪼다 라고 아우성치는 날.
그런 날은 어김없이 녀석이 곁에 앉아있어 준다.
늘 고맙고 늘 사랑하는 나의 고양이 테리.

녀석은 나이가 들면서 더욱 감각이 상실되는 듯하다.
녀석의 이름을 부르면 사방천지를 헤매며 어딘가에 눈길을 마주치려 애를 쓴다.
내가 여기 있다고 소리치고 발을 굴려야 이윽고 나를 찾아온다.
백내장으로 수술을 했음에도 녹내장까지 진전돼서 시력회복이 불가능했다는 의사 소견이다.
그럼에도 나름대로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했는지 제 몫은 다 하는 녀석이다.
인간으로 치자면 노년기에 접어든 12살 늙은 고양이는 점점 더 제 수명에 가까이 가는 듯 가끔 이상한 행동을 보이기도 하여 나를 가슴 아프게 한다.

동물을 안 키워 본 이는 반려동물이란 말을 이해하기 힘들지도 모른다.
나는 어릴 때부터 동물과 같이 있었고 그들에게 인간의 언어를 가르치고 또한 그들과의 감정을 공유하는 법을 익혔다.
내가 아는 한 그 아이들은 참 선한 녀석들이다.
동물 이야기를 하자면 자다가도 신이 난다.
세상을 돌아다녀도 내 눈에는 항상 구석구석에 살고 있는 그 아이들이 먼저 보인다.
나는 늘 “안녕”이라고 말을 건네고 그럼 녀석들이 “하이”라고 말을 걸어온다.

나는 테리를 안고 쓰다듬으며 간지러운 목소리로 말을 건넨다.
관세음보살……
“테리는 어쩌다 이렇게 털 많은 고양이로 태어난 거니?”
녀석은 내가 질문하면 꼭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어댄다.
“인간으로 태어나기엔 제가 죄가 많았나 봐요”
나는 녀석을 꼭 안아준다.
“테리.. 다음 세상엔 꼭 사람으로 태어 나.. 관세음보살님께 기도해 줄게”
관세음 보살, 관세음 보살..
골골거리며 눈을 지그시 감고 음미한다.
오랜만의 주인의 손길이 좋았나 보다..
혹시라도 살아날까 녀석의 눈 주위를 열심히 맛사지 해준다.

고양이 이야기는 그만하고 사람이야기를 하라고들 하신다.
그런데 사람이야기는 쓸 소재가 그다지 없다.
아마도 나는 사람이야기 이콜 남자 이야기 일 것이란 선입관이 먼저 앞서는 듯하고 남자 이야기라면 현재 진행형이 아닌 이상 다 지나간 추억에 불과하니 이미 가버린 사랑은 나조차도 흥미가 없고 그다지 땅기지가 않음을..
그래도 나를 들썩이게 하는 거 하나는 피가 통하는 생물체로 곁에서 자나깨나 나를 지켜 봐주는 저 녀석임에……

술이라는 게 참 그렇다.
처음 한잔은 맛있고 금방 취하는 듯 한데 두잔 석 잔에서는 그다지 재미를 못 느낀다.
그러다 마시고 또 마시면 졸려운 증세가 갑자기 공격을 가하기 시작해 일거에 불도 끄지 않고 양치질도 못한 채로 침대로 올라가게 한다.

그런데 나의 술 취하면 가끔 저지르는 잘못이 하나 있는데 그게 바로 전화를 걸어 수다를 떠는 거다. 일종의 주사인데 이거 몇 번 했다가 그 다음 날 아침에 얼굴을 들 수 없는 경우가 몇 번 있었는지라 굉장히 주의 한다.
어느 정도로 주의 하는가 하면 술 먹기 전에 전화기를 꺼내어 괜시리 혹시라도 술 먹으면 발 뻗고 싶은 이가 있을 듯하면 그런 이의 전화번호를 저장에서 삭제로 과감히 지워버리는 것이다.
아예 전화번호 삭제에서 통화기록, 문자 메시지 기록까지 남아 있는 것은 깨끗하게 지운다.
그리고 마음 편히 먹고 술을 마시는 것이다.

어찌 보면 참 어렵게 사는 사람이다.
왜 그렇게 살까?
술이 깨서 보면 웃음이 나오지만 나름대로의 품위를 지키려면 어쩔 수 없다.
이거 발각되면 지금껏 살아온 화려한 싱글에 줄 긋는 게 되기 때문이다.

마음 가는 데로 쓰는 글은 어떤 글일까.
나는 항상 서두가 긴 사람이다.
누구를 만나도 그렇고 일을 해도 그렇고 전화를 받아도 그렇고..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항상 분위기를 소프트 하게 하고 제대로 본론으로 들어가는 스타일로 매사가 그래왔다.

나는 경쟁을 해본 기억이 그다지 없다.
삶을 통해서 우연찮은 경쟁 속에 휘말렸을지는 모르나 나는 되도록 양보하는 편이다.
경쟁이란 자체가 우스웠고 그렇게 원한다면 니가 가져라 하는 식이었다.
좀 건방지지만 나는 그런 것 들 앞에서는 늘 웃고만 있었다.

또 나는 그다지 탐을 해본 기억이 없다.
사람들이 원하는 것에 별로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그런가 보다 그럼 하고 내주었던 편이다.
모든 사람이 원하는 것은 그다지 내가 갖고자 하는 것이 아니었다.
난 필요 없어 하며 그들에게 나누어 주는 게 재미있었다.
참 배부른 소리다.

좀 뜬구름 없지만 바다의 아름다움을 이야기 하고 싶다.
바다의 모습은 누구나가 상상하는 바다 그 모습이다.
솔직히 정동진이니 해운대니 와이키키니 다 그게 그거다.
그럼에도 왜 좋았던 걸까..

좋아하는 노래 중에 이런 가사가 있다.
오오사카노 우미와 가나시이 이로야네……
사람들이 슬픔을 바다에 다 버리러 오니 그래서 바다는 슬픈 색깔을 띄고 있다는 그런 가사..

나도 그랬던 것 같다.
바다 앞에서 뭔가 혼자서 맹세를 하고
바다 앞에서 뭔가 혼자 의식을 지내곤 했다.
바다야 미안……

다음에 바다한테 가면 할 말이 있다.
그 동안 미안했는데 이제 내가 널 위해 무엇을 할까.
니가 원하는 것을 말해.
그렇게 담엔 바다에게 말할 테다.

내가 바다의 말을 알아듣는 귀를 가져가야 할 텐데..
나도 그렇게 솜사탕처럼..
목화 솜처럼..
그렇게 그러냐.. 하고 담을 만큼 커진 마음으로 가야 할 텐데……


이상하다.
술을 마시면 꼭 바다가 생각이 난다.


IP *.48.37.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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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아
2007.03.02 07:49:13 *.167.80.45
거제도의 남쪽 절벽과 작은 섬들이 어우러져 있는 곳에 "서이말(鼠耳末)등대가 있다. 서이말이란 쥐의 귀모양으로 생긴 땅끝이라는 뜻이다. 우리말로 하면 "쥐귀 포구"라는...
총각 시절에 향인을 많이 닮은, 사귀는 여인이 있었다. 선배되는 분과 세명이 서이말로 낚시를 하려 갔다. 저녁이 되어도 낚시에 빠져있어 아무런 다른 생각이 없었는데 홀로 훌쩍거리며 울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난 당황하여 왠일이냐 물으니 회가 먹고 싶어 운다 한다. 한편 웃습고, 천진함에 당혹 스럽기도 했다.
아이스박스에서 제일 크고 먹음직한 고기를 내어 회를 뜨고 소주한잔에 그날밤을 지낸 기억이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젊었을 때의 어슬픈 행동이 헤어지는 결과를 가져 왔지만 향인의 글을보니 옛 추억을 잊을 길 없다.
회가먹고 싶다고 울고 있는 여인과. 술을 마시면 바다가 그리운 여인이 혼돈되어 추억속에서 아른거린다.
서이말 등대의 추억을 향인의 글을 읽으면서 아침을 맞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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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
2007.03.02 08:33:17 *.254.127.51
내마음을 정하게 해주는 봄비가내리는 아침입니다.
같은 분위기의 향인님글도 만났습니다.
고양이 와인 향인님의 삶에서 애잔함과 삶을 진지하게 맞이하고 누리려는 애쓰시는 흔적을 만나게됩니다.
인생이란 현실을 잘 맞이하고 보내는 모습이 달관의 삶같아요.
부드럽고 섬세하고 애잔함까지.... 더해져요.
향인님 호가 참 잘어울려요, 초아선생님께서 잘 지어주셨지요?
글과 삶의 모습이 같은 향기가 납니다.
어떤향기일까? 장미향같아요.
진정한 자신을 만나는 오늘이 되시기를 기원_()_옴마니반메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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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니
2007.03.02 10:27:23 *.70.72.121
술을 한 잔 걸친 그녀의 볼카한 살구꽃 피어나는 볼과, 가늘어 지는 눈 웃음과, 어느덧 제법 흐늘어지는 콧소리 약간 담긴 더 요염해 지는 목소리... 를 .. .

생명과 무생물, 보임과 볼 수 없음의 차이, 사람과 사랑 혹은 그 외.. 죄 지음이나 운명이라기 보다 그저 각자 저마다의 모습으로 살면서 어우러짐이 아닐까? 내가 어찌 꽃이 되고 나무가 되고 바다 일 수 있으랴, 갈 수 있고 느낄 수 있고 더러 찢기고 잘려지면서 눈을 감아도
보았고 당신 없는 여기서 향기를 느끼는데.

우리 다 갖기 보다 서로를 인정하고 함께 혹은 각자의 모습을 살아감이 당연함은 아닐 런지, 그래서 친구가 필요하고 꿈을 꾸고 이렇게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 야옹이와만 속삭이지 않고 자신을 열어주는 향인이 난 좋은데.. 그녀에게서 봄을 느낀다. 그녀가 꿈을 꾸는 모습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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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화
2007.03.02 12:05:06 *.180.48.238
비가 와서 혼자 밥 먹기 싫어서, 친구에게 문자를 보냈습니다.
'선약없으면 저녁같이 먹자'
얼마 후 전화, 오늘 근무라고. 내일아침에야 퇴근한다고.
따뜬한게 먹고 싶은데... 잘 안돼네.

이야기를 하고, 들어줄 상대가 있는 건 축복이지요.
향인님은 그래도 고양이한테라도 말하지...흑. 난 그냥 혼자 찌게 끓여 냄비 붙들고 말해야지 원..

'풍경'이란 제목 보고는 사진을 기대했었어요. 허걱. 글보다는 시각적인 정보에 익숙한 사람이라서...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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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인
2007.03.02 15:11:04 *.48.37.157
밤 늦게까지 술 한잔에 끄적거리다 잔 거 같은데 아침에 일어나 눈을 뜨자 뭔가 켕기는 느낌에 으으으하며 사이트에 들어와 보니 새벽 잠 없는 부지런한 분들 많은 이동네분들이 벌써 다들 읽으시고 한 말씀씩..에궁 미치겄구만서두 정화씨의 냄비붙들고라는 말에 그만 뒤로 넘어가 ,그래 가끔 궁상도 떨자고 맘편히 먹습니다.
진지하신 말씀들 감사드립니다.헤헤 머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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