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커뮤니티

살다

여러분이

  • 옹박
  • 조회 수 2459
  • 댓글 수 3
  • 추천 수 0
2007년 3월 12일 11시 18분 등록

분별지와 무분별지 : 학습에 대하여


두어 달 전에 후배녀석에게 전화 한 통을 받았다.
“형, 요즘 진로에 대해 고민이 많아요. 상담 한 번 해주세요”
후배는 국내 자동차 회사의 연구소에서 3년간 일했다. 석사를 마치고 유학을 고민하던 그가 대안으로 선택한 것이 병역특례 업체였다. 고민인즉슨, 내가 졸업한 경영대학원의 석사과정 입학 정보를 얻고 싶다는 것이었다. 굳이 학교로 다시 돌아오려는, 석사를 한 번 더 하려는 이유가 있느냐고 부드럽게 물었다. 그는 ‘공돌이’로 직장생활을 마감하지 않으려면 경영학을 공부해야 할 것 같아서라고만 대답했다.

그는 경영을 배우기 위해서 경영학을 공부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 경영대학원을 나와야 한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다시 학교로 발걸음을 돌리는 것은 그 후배만은 아니었다. 친구들 중 많은 수가 실망스런 직장생활을 접어두고 다시 학생의 길을 선택하고 있었다. 배우기 위해서는 일단 학문을 공부해야 하고, 학교에 입학해야 한다는 논리가 그들의 생각인 듯하다.

역사학자인 에릭 홉스봄은 케임브리지라는 좋은 학교를 나왔다. 처음에 그에게 길은 훤하게 열리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곧 그는 학계에서 따돌림을 받아야 했다. 유대인이며 공산당의 당원이었기 때문이다. 중요한 공직에서는 미리부터 배제되었고, 그가 출간한 책은 여러 나라에서 금지되었다. 결국 학자로 성장하기 위한 그럴듯한 수단들은 모두 차단되었다. 냉전이라는 당시의 시대적 배경으로 볼 때 그는 저명한 역사학자의 길을 걷기에는 턱없이 역부족이었다.

그러나 그는 책을 짓눌러 사상을 더듬는 사람이 아니었다. ‘학교는 언제나 따분한 곳’이라 말했다. 그는 현실과 경험을 통해 배우는 활동가였다. 그는 우선 다채로운 정치 활동을 통해서 배우기 시작했다. 트라팔가 광장에서 버트런드 러셀과 함께 핵무기 확산 반대 시위를 벌였다. 아바나에서는 체 게바라를 위해 통역을 해주었고, 부다페스트에서 소련의 스파이와 크리스마스 저녁을 함께 보냈다. 그는 창조적인 별종 학자였다. 닐 퍼커슨은 그를 가리켜 “역사가들의 삶은 대체로 지루하지만 홉스봄은 완벽한 예외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첫사랑을 느낄만한 열 여섯 아니면 열 일곱살 무렵에 나는 음악의 계시를 받았다. 내 경우에는 재즈가 첫사랑의 자리를 비집고 들어왔다. 지적 유희와 말에 온통 점령당한 나의 삶에 말로는 표현되지 않는 절대적 감성을 심어준 것은 바로 재즈였다. 그렇다 하더라도 나중에 커서 재즈 애호가라는 평판이 도움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 에릭 홉스봄, '미완의 시대'

현재의 그를 만들어낸 또 하나는 다름 아닌 재즈(Jazz)였다. 그는 적극적인 취미활동으로 그의 감성을 깨웠다. 그의 유명세에는 필시 재즈의 역할이 컸다. 공산당원이었던 탓에 40대 전에는 미국 땅을 밟아보지 못한 그가 “미국을 아는 길로서 재즈는 다른 어떤 수단에도 꿀리지 않았다”고 말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문화 체험은 학문 못지 않은 배움의 통로이다. 홉스봄과 공통점이 많은 피터 드러커 역시 서양 미술사, 동양 철학 등의 전혀 색다른 문화를 3년마다 바꾸어가며 감상한 것이 큰 도움이 되었다 하지 않았던가.

‘미완의 시대’는 그의 자서전이지만, 정작 자신의 이야기는 별로 없다. 역사가답게 관찰자의 입장에서 그가 만난 사람들의 개인사로 책을 가득 메웠다. 그가 풀어내는 이야기는 역사적 위인을 통해서도 아니요 극적인 사건 중심도 아닌, 그의 주변인을 통해 이루어진다. 예컨대 그가 미국을 이해한 것은 책을 읽어서라기 보다는 그가 만난 두 미국인 – 랠프 글리슨과 스터즈 터클 –을 통해서였다. 그는 사람을 통해 역사를 이해했다.

나는 대한민국 엘리트의 길을 걸었다. 학자가 될 마음은 별로 없었지만, 전문가가 되기에 가장 빠르고 효과적으로 배울 수 있는 수단이라 믿었다. 그러나 해가 거듭할수록 과목은 쪼개지고, 개념은 오히려 복잡하게 이해해야 했다. 가방끈이 길어질수록 전체에서 내가 어디쯤 와있는지 알 수 없었다. 고등교육은 나를 거창하게 말 잘하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었을 뿐, 복잡한 지식은 오히려 나의 ‘참배움’을 방해하고 있다고까지 생각하게 되었다. 이제야 나는 오래전에 읽었던 법정 스님의 글에 공감한다.

“우리들이 얼마나 알고 있느냐, 이 말은 얼마나 복잡하게 분별하고 있느냐의 뜻이다. 안다는 것은 산스크리트어의 어원으로 보면 아는 것을 쪼갠 것, 즉 분별의 지식이다. 그래서 이것을 분별지(分別智)라고도 표현한다. 그런데 이 분별지는 인격과 직접 관계가 없다. 그저 아는 것을 뜻할 뿐이다. 일찍부터 인도 사람들은 이와 같은 지식을 ‘분별 망상(妄想)’이라고 해서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다. 그 대신 분별을 넘어선 무분별지의 세계를 추구하고, 또한 거기에 도달하려고 애썼다. 여기서 말하는 무분별지는 시시콜콜하게 따지고 쪼개고 하는 분별 망상을 초월한 경지를 뜻한다. 우리가 의지해야 할 것은 사변적인 지식이 아니라 끝없는 빛, 즉 지혜라고 불교경전에서는 누누이 강조하고 있다” – 법정, '서 있는 사람들'

학교에서 학문을 통해 다루는 것은 ‘분별지’에 해당한다. 전체를 부분으로 쪼개고 나누고 개념화하여 부분을 깊이 인식하는 것이 현재 학문의 역할이다. 그것은 이미 보편화 되었다. 현대의 우리가 이제 부족한 것은 전체를 조합하고 통합하여 감탄하고, 의미를 이끌어 내어 ‘끝없는 빛’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필요한 것은 지식이 아니라 지혜다. 나는 그것이 비학문적 수단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생각한다. 학교 졸업장이 중요한 사회적 인증이라는 것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지만, 학문이나 학교라는 수단이 지나치게 강조되어 온 것도 틀림없다. 그리하여 수단이 ‘배움’이라는 본래 목적을 삼켜버렸다.

나는 목적이 분명하다면 수단은 문제되지 않는다고 믿는다. 마치 산을 오르는 길은 무수히 많지만 결국 정상에서 모든 길들이 모이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러나 현재 대한민국이 말하는 교육은 그 길을 하나라고 규정하는 듯 하다. 배움을 위한 수단이 학문과 학교로 지나치게 편중되어 있는 모습을 보면 나는 안타깝다. 에릭 홉스봄은 학문 이외의 다양한 학습의 수단들을 이용해 평생학습을 이룬 좋은 예이다. 그는 학자였고 학교에서 가르쳤지만 비학문적 경험을 통해 더 많이 배웠다.

나에게 상담을 받으러 온 후배에게 나는 이런 말을 해주지 못했다. 그는 결국 자신이 처음 생각한 대로 경영대학원에 입학했다. 선택은 그의 몫이라는 믿음 때문에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지만, 홉스봄을 조금 더 일찍 알았더라면 혹은 그와 같은 활동적인 사상가를 진작 알았더라면 하는 후회가 남는다. 혹시라도 그가 학교에 대한 회의감으로 다시 찾아온다면 이번에는 잘 설명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지식과 지혜의 균형을 맞추라고.

IP *.54.31.44

프로필 이미지
귀한자식
2007.03.12 18:02:12 *.252.38.3
길고도 진지한 글이지만,
잘 와닿네요.

특히
"가방끈이 길어질수록 전체에서 내가 어디쯤 와있는지 알 수 없었다."
는 부분은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만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간만에 학교에서 수업을 들으니 여러 생각이 절로 생깁니다.
학교를 쉰 2년반동안 다른 활동을 하였고,
다시 학교로 돌아왔지요.
수업을 들으면서 전에는 느낄 수 없었던 것들이 마구마구 연결되고 있는게 느껴집니다. 공부가 재밌다고 느끼긴 참 오랜만인거 같아요.

지식과 지혜의 균형을 맞추는 일은
앞으로 쭉~해야할 일이겠죠...^^
프로필 이미지
호정
2007.03.13 00:29:59 *.142.243.157
너의 주관심사와 바로 연결하였구나.. 잘 읽었다..
프로필 이미지
백산
2007.03.15 00:17:36 *.75.166.69
옹박 ,, 멋지군...
얼굴과 몸매만 멋진게 아니라
마음은 더 멋지군...^^
자신감 넘치지만 진실한 ...
옹박같은 사람에게 힘이 생기면
많은 사람들을 이롭게 할 텐데...
덧글 입력박스
유동형 덧글모듈

VR Left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1479 다테마에(建前)와 혼네(本音) [5] 香仁 이은남 2007.03.16 5706
1478 내 안의 나를 찾아가 이야기하자 [2] 이은미 2007.03.16 1725
1477 (002)조화와 상생의 풍물판 [4] 한정화 2007.03.16 2110
1476 스페셜리스트의 종말 [1] 강인묵 2007.03.16 1620
1475 [칼럼02] 글쓰기경영 [1] 송창용 2007.03.16 1670
1474 예술의 사회성(홉스봄의 정신에 나타난) [4] 최정희 2007.03.15 2996
1473 3기 연구원 선정 평가 기준 [5] 구본형 2007.03.15 1872
1472 제대로 보기는 봐야하는데.... [1] 기원 2007.03.14 1664
1471 [23] 그래도 [1] 써니 2007.03.13 1546
1470 Reader는 Leader가 된다. [4] 이희석 2007.03.13 1616
1469 열심히 산다는 것은 - 詩 안도현 [2] Alice 2007.03.13 2486
1468 구본형 소장은 “ ” 다. “ ”에 들어가는 문구를 찾는다면 [8] 정양수 2007.03.12 1850
1467 홉스봄, 그의 유목민적인 삶 [2] 김지혜 2007.03.12 1657
1466 개인의 삶 vs. 공동체의 이상 [3] 김도윤 2007.03.12 1962
1465 변절하지 않는 법에 대하여 [1] 엄승재 2007.03.12 1641
» 분별지와 무분별지 : 학습에 대하여 [3] 옹박 2007.03.12 2459
1463 칼럼001 꿈을 위하여 [1] 양재우 2007.03.12 1544
1462 [1] "맹호부대용사들" 노래의 이면... [3] 정선이 2007.03.12 3733
1461 연구원을 지망하는 이들에게 [10] 초아 서대원 2007.03.12 1826
1460 하얀거탑 장준혁을 보내며..ㅜㅜ [1] 이기찬 2007.03.12 2897